43. 좋은 사람2021.04.29.
퍼즐을 맞추던 엘로니아의 손이 멈췄다. 분명 또렷하게 들었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닉스가 시끄럽게 훈수를 두었다.
[아니, 저기 맞춰 보라니까. 딱 봐도 여기가 제자리인데!]
그의 시끄러운 말조차도 어딘가로 흘러 지나가는 듯했다. 그녀가 답이 없자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퍼즐에 온 진심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닉스는 답답한지 펄쩍 뛰었다.
[저기 맞추라니까? 엘로니아. 어이? 저기요? 정령사?]
그녀의 눈앞에 손을 휙휙 저어 보이기까지 한 그는 그녀가 미동조차 없자 부루퉁하게 볼을 씰룩였다.
[뭐야, 보이면서 안 보이는 척하고.]
구시렁거리던 닉스는 흥미를 잃었는지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져 모습을 감췄다. 그사이 엘로니아는 천천히 그의 말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카르벨이 뭐라고?’
헤일튼가의 적통이 아니라니. 살다 보니 별 농담을 다 듣는다. 누가 봐도 카르벨은 헤일튼가의 가주였다. 제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나고, 가끔 우스울 정도로 제 자리에 확신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고개를 들자 리프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망설이던 리프리가 어색한 공기를 뚫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그래. 거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묵직한 음성이 그녀의 뒤에서 울렸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카르벨이 태연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시종들까지 물리고 무얼 하나 했는데. 재미있으셨나 봅니다.”
웃으며 하는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다 들었구나.’
어디서부터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믿기 힘들던 리프리의 말을 들은 건 확실해 보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싸, 싸우려나?’
제아무리 리프리라 하더라도, 한 제국의 공작, 그것도 총사령관을 욕보인 죄는 작지 않았다. 전쟁으로 번지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우려와 달리 다가온 그는 자연스럽게 엘로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제 하루를 빼는 바람에 시간이 안 났어. 혼자 둬서 미안하군.”
일어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엘로니아는 슬쩍 리프리를 흘겨본 뒤,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평범한 약혼녀라면 리프리의 말에 화를 냈어야 하는 걸까.
‘지금 화를 내기엔 너무 늦었어.’
엄청난 말을 뱉어 놓고 리프리는 결국 말을 철회했다. 그냥 충동적으로 했다고 하기에는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기에 어떻게 반응하는 게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카르벨의 도움대로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게 맞을 듯싶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프리 역시 러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엘로니아 양.”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카르벨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다소 예민한 답을 건넸다.
“저하. 즐기시는 것도 좋지만 선은 지켜 주십시오. 제 약혼녀입니다.”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저하의 입장은 그러실 수 있겠지만, 저택 내에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리프리는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짧은 순간조차도 카르벨은 슬쩍 몸을 틀어 엘로니아가 보이지 않게 막아 냈다. 곧 리프리는 덤덤하게 답했다.
“부주의했군요.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럼.”
싱긋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카르벨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손이 붙잡힌 엘로니아도 어색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뒤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엘로니아는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어디 가요?”
“그대의 방.”
굵고 짧은 답에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또 좋은 기분은 아닐 테니 그의 생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화를 내지.’
그녀가 카르벨에 관한 자료를 보았을 때, 그의 생일과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까지 알차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자료에는 갓난아기였던 카르벨이 뒤집기를 언제 했는지, 엄마와 아빠라는 말은 언제 했는지까지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게 전부 지어낸 이야기라고?’
과하게 자세하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말을 맞추는 게 가능한 일일까. 솔직히 없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아주 사소한 정보였다. 실제로 엘로니아가 언제 처음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린 카르벨이 상상이 안 되어서 이질감이 느껴지나 했더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적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회에 가기 전, 나와의 연애 이야기를 뼈대부터 맞췄어.’
의심하면 안 된다. 분명 님프가 보여 준 과거에서 카르벨의 어린 모습을 보았다. 전대 공작 부부는 카르벨을 아끼는 듯했고,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모습이 전대 공작을 빼다 박았던데!’
흑발에 잿빛 눈동자. 조금 서늘한 인상까지 똑같았다. 비록 공작부인처럼 마력은 없고, 그녀와 비교했을 때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리프리조차도 확신이 아닌 가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전대 공작 부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가 오해하고 있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혼란이 가중될 때쯤에는 이미 그녀는 자신의 방까지 도착한 후였다. 엘로니아는 퍼뜩 정신을 차린 뒤 감사를 전했다.
“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인사에도 그는 갈 생각을 안 했다. 붙잡은 손을 뺄 수 없게 힘을 줘 잡고 있었다. 에이미가 방문을 열자, 그는 태연하게 방 안으로 그녀를 에스코트를 하기에 이르렀다.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물었다.
“바쁘신 줄 알았더니.”
“조금. 어제 하루를 빼먹었더니 일이 많았거든.”
“어쩐지 아침부터 얼굴 보기 힘드시다 했어요.”
“오전에 연무장에는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그녀는 잠시 카르벨을 흘겨보았다. 얼굴 보고 싶으면 연무장에 나오라는 말인가? 안 그래도 이른 아침 일어나는 게 피곤한데 그의 연무까지 챙기는 부지런한 사랑꾼 역할은 무리였다.
“그 시간대에 공작님을 만나야 하면 연무장을 꼭 찾아가겠습니다.”
하여 돌려 그녀의 의사를 전했다. 대화가 끝난 줄 알았으나, 그녀의 손을 쥔 카르벨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힘을 쥐 제 팔을 당겼으나, 그는 아프지 않게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꾹 누를 뿐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게임을 좋아했나.”
“퍼즐이요? 아뇨. 딱 질색인데요.”
“못해서?”
“그렇게 아픈 구석을 찌르시다니.”
솔직히 닉스가 훈수만 좀 제대로 뒀어도 더 잘했을 것이다. 한 1승 정도는 따지 않았을까. 하지만 리프리에게 연전연패를 당했으니 할 말은 없었다. 패배가 떠올라 못마땅함에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리프리 저하를 너무 믿지 마.”
아, 역시. 다 들은 게 분명하다. 여태 게임이니 뭐니 말을 꺼낸 것도 실상,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발판인 모양이었다. 그답지 않게 퍽 우회적으로 말을 꺼낸 셈이었다. 엘로니아는 그에게 잡힌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벗어나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잡힌 손을 응시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믿은 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공작님과 한 약속은 지킬 생각이고요.”
“의외로군. 핑계만 맞으면 좋다고 도망갈 줄 알았는데.”
“펠런 백작 부인의 목걸이 일도 그렇고……. 공작님 덕분에 메티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데브니 남작가에서도. 하지만 뒤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에게 빚을 더 지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였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그리고 공작님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카르벨의 잿빛 눈동자가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에 박혔다. 그녀는 조금 쑥스러움을 담아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도와주셨으니까, 저도 도와야죠.”
사실 약속만 지킨다면 그녀가 어떻게 되든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잘한 위험에서 늘 그녀의 앞에 섰다. 처음에는 그가 강한 사람이니까, 가진 게 많고 그렇게 자란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어제 그는 익숙하게 고통을 데드 경에게 숨겼다. 그녀가 지켜본바, 데드 경은 누구보다 카르벨을 따르고 존경하는 이들 중 하나였는데도 말이다. ‘가끔’이라는 말로 참는 모습에서 엘로니아는 단번에 깨달았다.
‘책임감.’
엘로니아에게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강제로 길러진 그 책임감이 카르벨에게서도 거울처럼 엿보였다. 어릴 때 갑자기 떠맡아야 했던 가문. 친했던 사촌은 그를 의심하며 등을 돌리고, 기사들은 그 하나만 보고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시기. 그 외로움을 알기에 엘로니아는 리프리가 했던 말을 덮었다.
‘적통이 아니면 어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왔다면, 더군다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면 전대 공작 부부는 자신들의 의지로 카르벨을 데려온 것이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고 딸만 여럿인 집에서는 사촌들 중 아들을 입양하거나, 들여오는 일이 잦았다. 헤일튼 공작가에는 그를 제외한 다른 자식이 없으니 이유야 충분했다.
‘다들 사이좋아 보였는걸.’
카르벨은 대답 없이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약이라도 올려주면 좋겠는데. 웬일로 그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엘로니아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계약이 끝나면 저도 이혼하고 자유를 찾을 테니까요. 그때까지 같이 잘 해봐요!”
나름 한가한 손으로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건만. 그의 예리한 시선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게 민망해 그녀는 스르륵, 들었던 손을 내렸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다 물었다.
“혹시, 가짜 정령사가 필요한 이유. 물어봐도 돼요?”
“아니.”
“예…….”
그는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데에 확실히 일가견이 있다. 엘로니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하자 그는 엄지로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을 문질렀다. 특유의 검을 잡는 이의 거친 손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여기저기 굳고, 상처가 여러 번 붙어 흉이 진 손. 엘로니아는 그의 손에 자잘하게 새겨진 세월이 절대 그의 인생이 노력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르벨이 조용히 물었다.
“더는 안 묻는군.”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시니까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엘로니아의 태연한 말투에 카르벨은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언제 들어봤던가. 헤일튼가의 기사들조차도 그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걱정했다. 어디서부터 뻗어져 나간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리프리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서류를 넘기던 그의 손이 빨라졌다. 리프리는 엘로니아를 순수한 피해자로 보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맞는 말이기는 하지.’
제멋대로 데려와 가짜 정령사로 앉혀두었으니. 덕분에 되지도 않는 아셀리의 농간질에 놀아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리프리가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아직 가짜 정령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엘로니아의 이혼이라는 말에 카르벨은 깨달았다. 자신이 우려했던 것은 사라질 가짜 정령사가 아니었다.
‘정령사로 인정받으면, 바로 이혼인가.’
엘로니아가 정령사로 인정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때가 조금은 더 뒤였으면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