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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실례하겠습니다 (40/234)

40. 실례하겠습니다2021.04.18.

차가운 시선과 오만함이 담긴 얼굴. 키레일의 모습 속에서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함. 누군지 보일 것도 같은데, 또 모르겠다. 이름을 듣는다면 바로 깨달을 것 같은 애매한 기분이었다. 엘로니아가 작게 인상을 쓰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밝게 웃었다.

“그래서 진실만 말해야 하는 마력을 살짝 담아서 전했지. 뭐, 솔직하면 문제 될 거 없잖아.”

그런 마법이 들어 있었다니! 목걸이를 하고 갔다가 춤을 추며 카르벨에게 욕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아마 그랬다면 그녀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지 못할 것이다. 경악하는 엘로니아의 어깨를 뒤에서 카르벨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순간 놀란 엘로니아가 짧게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은 엘로니아는 입 모양으로 뻐끔뻐끔 그에게 소리 없이 물었다.

‘왜요?’

그의 잿빛 눈동자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슬쩍 기울은 머리에 그의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그는 답을 하는 대신 그녀를 지그시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갑자기 왜 미인계야?’

의문이 들기 직전, 카르벨은 그녀의 어깨를 반듯하게 고쳐 잡았다. 노련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키레일에게 물었다.

“그 답을 꺼낸 이가 누구인지 기억하나.”

“손님 정보는 함부로 누설하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이쪽은 누설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키레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대놓고 들으라는 듯 엘로니아에게 물었다.

“정령사가 보기에는 어때?”

키레일은 눈에 띄게 관심 없다는 투로 카르벨을 보며 툭툭 말을 던졌다.

“눈매를 보아하니 평소에 그리 잘 웃는 편은 아닌 듯하고, 옷에 주름 하나 없는 게 사람 피곤하게 할 성격이겠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대? 엘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동의하려는 본능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끄덕이려는 고개를 고정하느라 몸이 부들부들 떨리자, 어깨에 놓인 카르벨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혼녀의 입장에서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키레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덧붙였다.

“저런 놈이 잘 해 줘?”

“그, 그, 그, 그럼요.”

“목소리가 좀 떨리는데?”

“카르벨을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서 그만.”

정말 카르벨이 올해 들어 가장 잘한 일은 그 진실을 말하게 하는 목걸이를 가져간 것이다. 있었다면 이보다 참극이 없었으리라. 키레일은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소개장이 원래 누구에게 왔던 것인지 아는 사람이다 보니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엘로니아는 이 불편한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른 척 질문을 던졌다.

“아,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향수 뿌리시죠?”

“향수? 이거?”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여태 느껴지지 않았던 리아티코의 향이 다시금 뿜어져 나왔다. 독한 향에 본능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엘로니아는 가까스로 얼굴 근육을 펴 가며 상냥하게 되물었다.

“시중에 파는 리아티코로 만든 건 아닌 것 같고. 개량하신 거죠?”

“예전에 주문이 들어와서 만들었지. 꽤 되었는데?”

키레일은 순식간에 가게 안에 가득 찬 향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리아티코가 미약하지만 남을 유혹하는 향수라고 정평이 나 있잖아?”

“그렇죠.”

“그 때문인지 진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있길래 만들어 봤지.”

“그런 식의 주문도 받아 주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내가 재밌어서 만든 김에 판 거야.”

리아티코를 개량한 게 뿌듯한 모양인지 그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어깨까지 자랑스럽게 펼친 그가 움직일 때면 짙은 향이 더욱 선명해졌다.

“어때. 정령사님도 내게 마음이 좀 생기시나?”

“전혀 아니요.”

요즘은 유혹도 죽기 살기로 해야 하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아티코 향이 독하게 느껴질 리 없다. 착각은 아니었는지, 키레일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내 취향은 아니야.”

주문은 받아 두고 이래도 되는 건가. 하지만 키레일은 행동만큼이나 상단 운영도 제멋대로 하는 듯했다.

“문제 될 게 뭐 있어? 나는 만들어 달래서 만들었고, 팔아 달래서 팔았는데.”

엘로니아는 슬쩍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렇게라도 향을 거르지 않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어깨에 놓인 카르벨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그에게도 마음에 차는 향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급기야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입가를 막았다.

‘이 정도면 본래 의도에서 정반대의 효과가 아닌가…….’

유혹을 기대했을 텐데. 순간 무언가 찝찝함이 그녀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유혹?’

동시에 떠오른 아셀리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카르벨도 마찬가지였는지, 뒤에서 다정하지만 제법 억누른 듯한 질문이 나왔다.

“주문자, 황실 사람인가.”

“그것도 비밀.”

키레일은 약을 올리듯 검지를 세워 까닥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상 답은 다 준 것과 다름없었다. 아셀리가 향수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주문자는 유혹을 요구했다고 한다. 제국에서 아셀리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인데, 굳이 이런 향수가 필요할까.

‘전후 관계가 바뀐 건가?’

그러나 향수를 써서 먼저 인기를 얻었다기에는, 아셀리를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이들도 그녀를 찬양했다. 독한 향 때문인지 엘로니아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것도 어떤 의미로 유혹이긴 한가 보다.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니 말이다. 엘로니아가 떨떠름하게 웃고 있자, 키레일은 입매를 삐뚜름히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어때? 친절한데, 꽤.”

“예?”

“나 정도면 외모도 어디 가서 창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싫어요.”

“난 매일 안 만나도 돼. 가끔 얼굴 가물가물하면 어쩌다 한 번, 응?”

“안 돼요!”

“나…….”

“하지 마세요!”

엘로니아가 키레일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엘로니아의 몸이 기울었다. 탁, 카르벨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던 그의 앞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굳은살과 거친 느낌이 고스란히 눈을 통해 전해졌다. 시야가 가려진 탓에 키레일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카르벨의 또렷한 음성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남의 약혼녀를 빼앗으면 온 제국이 시끄러울 수 있을 텐데.”

“까짓거 시끄러운 건 잠깐이고, 지내는 건 평생이라고?”

그는 집요하게 엘로니아에게 들러붙었다.

“딱 정령 하나만 주면, 평생 마석은 아쉽지 않게 해 줄게. 어때?”

정령이라는 말에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뭘 달라고요?”

되묻기 무섭게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보석에 정령을 가둬 두면, 평생 써먹겠지?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고,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거야.”

광기마저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가 어두운 가게 안에서 번들거렸다. 심지어 말을 할 때는 늘 건성이던 그가 제법 열과 성을 다해 외치고 있어 더 무서웠다.

‘진심이다. 100% 진담이야!’

닉스가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고 욕을 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데드 경조차도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입을 떡하니 벌린 채였다.

“저, 저, 저…… 잔인한…….”

하지만 키레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엘로니아에게 자신이 얼마나 연금술을 잘하는지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혹여 그녀가 제 연구를 허락할 수도 있다고 믿으며 말이다. 결국 카르벨이 강제로 그를 떨어트려 놓고 나서야 그의 입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그제야 포기한 것인지 독하게 흐르던 리아티코 향이 줄어들었다. 키레일은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가게를 꽉 채우던 향을 단숨에 몰아냈다.

“효과가 하나도 없네?”

설마 정령이라도 꾀어내려고 이런 건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는 가게를 나설 때까지도 지긋지긋하게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연락 달라고, 정령사님.”

그는 익살스럽게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정 뭐하면 몸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아니, 아니에요. 바치지 말고, 준비하지도 말아요.”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도 그는 상처조차 받지 않는 듯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들어올 때 의자를 꺼내 주었던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아, 맞다. 악수!”

엘로니아가 손을 내밀자 살포시 잡은 그는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문이 닫혔다. 키레일의 나불거리는 주둥이 덕분에 정신이 쏙 빠지는 듯했다. 어두컴컴한 골목은 여전히 스산했다. 멀리서 야시장이 열리는지 특유의 부산스러움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뒤에 있을 카르벨을 향해 몸을 틀었다. 어둠 속에 묻힌 그가 미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크게 숨을 쉬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고스란히 들릴 정도였다. 엘로니아는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얼마나 미간에 힘을 주었으면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향이 독해서 그래. 환기가 되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저보다 배는 큰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느라 가슴이 크게 움직였다. 데드 경이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자, 카르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지시했다.

“데드. 말을 가져와. 돌아가지.”

“네, 알겠습니다!”

명령에 곧장 뛰어가는 거대한 뒷모습을 보며 카르벨은 말을 이었다.

“우리도 천천히 따라가지. 곧 광장이 나올 거야.”

그는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처 숨기지 못한 짜증과 예민함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 향수가 이 정도였단 말인가. 얼핏 닉스가 독한 향도 빠르게 없애던 것이 생각났다. 엘로니아는 걸음을 옮기는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혹시 너무 힘들면 조금만 쉬었다 가요.”

말을 타고 올 적에 떨어진다는 대화를 나눈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말이 씨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너무 많으면 닉스를 부르기에도 부적합했다. 그녀는 속으로 닉스의 이름을 여러 번 외쳤다.

‘닉스, 닉스, 닉스. 응답하라, 닉스!’

그러나 자그마한 정령은 묵묵부답이었다.

‘닉스! 꼭 필요할 때 안 나타나더라!’

그녀가 온갖 방법으로 닉스를 불러내고자 소리치고 있을 때. 저벅저벅. 그녀의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쉬는 것보다 빠른 방법이 있어.”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닉스가 답이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다. 그녀가 화색을 띠며 답하자, 카르벨이 천천히 손을 뻗어 엘로니아의 팔을 붙잡았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다. 조금 거친 손바닥 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엄지로 손목 부근을 천천히 문지르며 물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는가.”

이런 식의 질문도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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