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스치는 향2021.04.08.
엘로니아에게는 겁도 없이 달려드는 닉스지만 카르벨의 시선에는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님프도 퍽 그를 피하는 듯했다.
‘그 정도로 인상이 더러운가?’
매번 의식적으로 웃는 사람이기에 그렇게까지 도망갈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닉스가 기겁하는 이 순간에도 그의 입매에는 친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이들도 있어. 그대가 원하는 이를 붙여주지.”
“데이트라면서요. 호위까지 붙다니……. 저희 쫓고 쫓기는 거였어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거든.”
유독 조심하는 그가 마음에 걸렸으나, 전대 공작 부부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염려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 데드 경을 확인했다. 간절한 눈빛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덩치가 큰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말할 수 없는 부담스러움도 함께였다. 어차피 누가 호위를 맡든 큰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몇 번 마주친 사람이 좋지 않겠나 싶었다.
“데드 경이 친절하고 좋으시더라고요.”
“그럼 다행이고.”
뒤에서 대놓고 안도하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인가 싶은 의문이 들 무렵. 연무장 끝에서부터 기사들이 차례차례 예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밀물처럼 천천히 퍼지는 인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했다. 연무장과 퍽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리프리는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훑었다. 엘로니아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카르벨은 대뜸 한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에스코트를 하기 위한 모습이었다.
‘지금?’
긴가민가하는 눈으로 그를 흘기며 슬그머니 손을 얹자, 강한 힘이 그녀를 붙잡았다.
“가지.”
“예?”
“도망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엘로니아가 되묻기도 전, 카르벨은 아주 단호하게 데드 경을 향해 지시했다.
“데드는 따라오게.”
“예, 알겠습니다.”
답이 들리기도 전, 그는 엘로니아의 손을 잡고 달렸다. 그녀 쪽으로 오던 리프리가 놀라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나 엘로니아는 카르벨이 이끄는 대로 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오전부터 에이미가 데이트라는 말에 심혈을 기울여 꾸민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로 말이다. 속도가 생각보다 나지 않자, 그가 재촉했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카르벨도 드레스 입고 뛰어 봐요!”
어젯밤에 도망치자는 게 정말 이렇게 뛰자는 뜻일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으면 조금 간편하고 도망가기 좋은 드레스로 입고 나왔을 것이다. 그녀의 외침에 카르벨은 흐음, 작게 침음을 흘리고는 번쩍, 엘로니아를 안아 들었다.
“이러면 되겠군.”
놀랄 시간도 없이 뒤에서 리프리가 쫓아오고 있었다. 아니, 저 인간은 또 왜 따라와?! 카르벨은 한 번 슥, 대수롭지 않게 그를 보고는 가볍게 뛰었다. 저택 입구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데드 경이 말 두 필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미리부터 도착해 기다린 모양이었다. 카르벨은 능숙하게 말에 그녀를 올린 뒤, 그 뒤에 가뿐히 올라탔다.
“형님!”
뒤에서 부르는 리프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가 말의 옆구리를 발로 구르는 것이 더 빨랐다. 다그닥,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 말은 헤일튼 공작저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뒤로 데드 경 역시 말을 타고 뒤따라오고 있었다. 언뜻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님프와 노움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 제도의 번화가에 들어서고 나서야 카르벨은 말의 속도를 줄였다. 엘로니아는 쓸데없이 긴박했던 공작저의 탈출을 떠올리며 물었다.
“누가 봐도 리프리 저하를 피해서 나온 꼴이잖아요.”
“뭐 어때. 틀린 말도 아닌데.”
그는 한 팔로 엘로니아의 허리를 단단히 두른 채 뻔뻔히 답했다. 거리가 유독 가까워 거리를 두려고 해도 안장 위의 공간은 그리 넓지 못했다. 카르벨은 보란 듯 엘로니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다 떨어지면 이전에 저택에 매달렸던 것처럼 무사히 끝나지 않을 텐데.”
“협박하는 거죠?”
“글쎄. 약혼녀의 안전을 바랐다고 해주지 않겠습니까?”
안전은 무슨. 오기가 생긴 엘로니아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콱 감싸 안았다. 순간 그의 몸이 미세하게 움칠거렸다. 그들의 뒤를 따라 말을 몰고 오던 데드 경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엘로니아는 사악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때요. 제가 왜 피했는지 아시겠죠?”
카르벨의 서늘한 시선이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능글맞던 그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따갑게 찌르는 시선에 엘로니아는 더듬더듬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아니, 본인은 장난을 있는 대로 쳐놓고…….’
억울했으나 어쩌겠는가. 말 고삐를 쥔 이는 그였으며, 엘로니아는 승마를 할 줄 모른다. 여기서 그가 버리고 가기라도 한다면 마차라도 빌려서 타고 가야 했다.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허리에 두른 팔을 풀어내자, 그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렇게 해서 되겠어, 엘로니아?”
“예?”
“어느 연인이 그렇게 안겠나.”
“카르벨, 잠깐만요.”
“기왕 할 거라면 목을 감싸야 내가 더 편히 그대를 안지 않겠어, 응?”
놀리는 거다. 이건 대놓고 놀리는 거다! 엘로니아는 뒤로 몸을 빼내었으나, 허리는 여전히 그에게 매인 상태였다. 엘로니아는 어쩔 수 없이 상체만 간신히 뒤로 기울 뿐이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할 것까지야.”
그는 태연하게 답하며 주변을 훑었다. 광장에 멈춰 선 그는 분수대 앞에서 먼저 내렸다. 카르벨은 팔을 뻗어 그녀를 보란 듯 내려주었다. 그는 고삐를 데드 경에게 넘기며 말했다.
“뒤에서 따라오게. 거리는 두고.”
“예.”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데드는 주변을 다시 한번 휘 둘러보았다. 카르벨도 그렇고 그도 자꾸 주변을 보니, 괜히 무언가 있나 싶어 엘로니아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쭉 내빼었다. 평소에 알던 광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뭐지. 이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엘로니아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카르벨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서며 물었다.
“오늘 저녁에 야시장이 열린다는데.”
“아, 벌써 주기가 그렇게 되었나요?”
야시장은 매달 두 번,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렸다. 먹거리가 많다 보니 늘 그 시기가 되면 인파가 몰렸다. 물론 엘로니아는 늘 그 시기에 일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갈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즐겨본 적은 없던 터라 미세하게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이 되려면 멀었는데. 너무 일찍 나왔어요.”
“시간은 원래 금방 가는 법이지.”
그는 거리를 향해 고갯짓했다. 엘로니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앞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웃으며 보던 카르벨은 조용히 옆에 있던 데드 경에게 읊조렸다.
“붙은 이는.”
“둘……인 것 같습니다만, 살의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광장에 가까워질 때쯤. 누군가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혹시 왕국에서 리프리와 같이 나온 이가 아닌가 했지만, 그보다는 조용했다. 리프리는 정공법을 택하면 택했지, 숨어서 무언가를 할 이는 아니었다. 다른 이유로 꼬리가 붙었다는 뜻인데, 그 목적이 모호했다. 어찌 되었든, 몰래 찾아온 이는 반가운 손님은 아닐 터.
“조용히 처리해. 뒷배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으면 더 좋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사살해도 괜찮습니까.”
“소란스럽게만 하지 마.”
“예.”
데드 경의 낮은 답을 들은 그는 다시금 웃는 얼굴로 엘로니아의 뒤를 따랐다. ***
“카르벨. 이거 둘 중에 뭐가 더 나아요?”
엘로니아는 리본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하나는 조금 채도가 낮고 짙은 붉은 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아주 약간 밝은 붉은 색이었다. 카르벨은 고심하는 척 보다 되물었다.
“무슨 차이지.”
“색이 다르잖아요.”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엘로니아는 대놓고 자신의 머리에 대어 보며 물었다.
“자, 봐요. 이거랑, 이거.”
“음, 나는 오른쪽.”
채도 낮은 붉은색이 낙점되었다. 엘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그가 선택하지 않은 리본을 계산했다. 인사하는 상인을 두고 카르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대체 왜 물어본 거지?”
“그냥요. 궁금해서요.”
굳이 그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저 자신이 고르는 데에 한 가지 의견이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뻔뻔한 답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간간이 주변을 훑는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되물었다.
“데드 경 찾아요?”
“아니. 알아서 잘 있겠지.”
“호위라더니, 대체 보이질 않네.”
의뭉스럽게 던진 중얼거림에 카르벨은 그저 잔잔한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척 굴더니, 데드 경은 정작 번화가에 도착한 이후로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카르벨이 말하는 것을 보면 대충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엘로니아가 그를 노려보다 인파에 휩쓸릴 뻔하자, 카르벨이 가벼이 그녀의 주변을 감싸주었다. 엘로니아는 미안한 듯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그제야 엘로니아는 광장에서 꽤 편히 걸을 수 있던 이유가 전부 그가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때 보면 굳이 밖으로 나오는 일은 카르벨에게 더 복잡하고 피곤한 일일 듯싶었다. 두 사람이 닭꼬치를 파는 상점 앞에 서자 상인이 물었다.
“몇 개 사시겠어요?”
“두……, 하나요!”
두 개를 외치던 그녀가 하나만 구매하자, 옆에서 카르벨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냥 두 개 주시죠.”
엘로니아는 대놓고 놀란 듯 그를 보며 물었다.
“이런 거 드시나요?”
“이런 거라 하면?”
“이거 비둘기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요.”
엘로니아는 상인이 들리지 않게 슬쩍 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카르벨에게 말을 전했다. 워낙 좋은 곳에서 자라, 좋은 것만 입는 사람이라 입에도 안 대 봤을 것 같은 음식으로라도 골려주고 싶었다. 카르벨은 여태 돌아다니면서 상점의 물건이나 음식에 일절 관심조차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런 그가 굳이 닭꼬치를 구매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이에 카르벨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대가 두 개를 먹는 줄 알았는데.”
“……예. 맞아요. 제가 다 먹을 생각이었죠.”
엘로니아는 욕심껏 제 입에 고기를 욱여넣었다. 그러자 그는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수를 놓은 그 뻣뻣한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버리셨네.”
“아니, 그것도 있어.”
그는 품에서 하나를 더 꺼내려고 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그의 행동을 막았다. 어제 그녀가 리프리의 손수건을 빌렸던 걸 기억했는지, 두 개나 갖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하러 그걸 갖고 다녀요. 쓸모도 없는걸.”
“그래야 누군가 의심하면 생색이라도 낼 수 있지 않겠어.”
독하다. 언젠가를 위해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그의 인내심에 엘로니아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엘로니아의 코끝에 익숙한 향이 스쳐 지나갔다.
‘어라?’
리아티코 향이었다. 그 독한 향이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