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도망가자2021.04.01.
카르벨은 제 숨통을 더 조이는 듯한 갑갑한 팔짱을 풀며 답했다.
“아셀리 전하 쪽은.”
“에릴 후작 영애께서 아셀리 전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합니다.”
“거절했겠군.”
“예.”
그렇지. 그런 제 기반을 무너트릴 만한 일에 나설 여자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번 일에 아셀리는 관련이 없는 듯이 보였다. 에릴 후작 영애는 정작 엘로니아보다는 백작 부인을 더 싫어했으니. 카르벨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단 알았네. 확인되면 추가로 보고를 받지.”
“아, 그리고 각하.”
“뭐지.”
그레이터는 서신을 하나 내밀었다.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식적으로 보낸 것이었다.
“폐하께서 정령사로 정식 임명하시겠다 합니다.”
“……완전히 의심을 거두신 건가.”
“아무래도 펠런 백작의 일이 큰 모양입니다.”
임명하겠다 말만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던 황제가 움직였다. 그녀가 시녀를 지정해 가져온 편지는 원로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펠런 백작저에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본 이들의 입을 통해 그 사건은 곧 외부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의심이 많은 이들조차도 대놓고 ‘가짜’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황제라고 다를 리 없었다.
“리프리가 돌아가면 입궁하겠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레이터의 인사를 받으며 카르벨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근처에 다다르자 멀지 않은 작은 방에서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우려한 얘기를 건넨 게 아니라면 다행일 텐데.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마법으로 돈은 못 만드나요? 금이라던가, 보석이라던가!”
“안 됩니다. 된다 하더라도 대륙법으로 종신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만들어 달라는 소리는 아니었고, 진짜 같은지 궁금해서요.”
“마법은 무형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엘로니아의 탄성을 보아하니, 찻잔이라도 공중에 띄운 모양이었다.
“와, 신기하다!”
“이런 식인 것이죠. 유(有)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연금술사의 몫입니다.”
“그럼 연금술사는 금을 만들 수 있어요?”
“……금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어떤 의미로 한결같은 엘로니아의 주문에 카르벨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마법사를 앉혀두고 고작 묻는 게 금과 보석을 만들 수 있냐는 질문이라니.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기어 다니는 이들이 듣는다면 고함을 지를 말이었다. 노크를 건네기 직전, 넘어온 말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형님이 제한이 많으신가 봅니다.”
저런 식으로 계속 물었겠군. 보지 않아도 눈앞에 훤했다. 놀라 그가 왔다는 사실을 고하려는 시녀를 카르벨은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문 시녀를 보며 카르벨은 습관처럼 입매를 늘렸다. 지금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엘로니아가 건넬 답은 뻔하게 정해져 있었으니, 궁금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없지는 않죠. 그래도 예비 공작 부인이 벌거벗고 정원을 뛰어다니면 안 되잖아요.”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답이 참 재밌다. 저런 답에 면역이 없는 리프리의 당황한 답변이 우스웠다. 매번 마법을 연구하느라 골방에 박혀 지내는 이에게는 버거웠으리라.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로니아의 답은 계속 흘러나왔다.
“근데 이해해요. 제가 놀랐던 게, 많은 사람들이 카르벨 하나만 보고 움직이더라고요.”
“총사령관이 원래 무거운 자리입니다.”
“새삼 느꼈어요. 거기다 검을 잡는 사람이니까 신중할 수밖에 없죠. 찔리면 되돌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적당히 맞춰가고 있어요.”
“……사려 깊으시군요.”
예상했던 뻔한 답이 아니었다. 한 번도 제 자리가 무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가질 수 없는 자리를 가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중한 편도 아니었다. 남들에게 그리 보여야 했고, 그래야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적어도 사람이 사람을 부릴 때, 적당한 명분은 있어야 더 잘 듣는 법이었다. 카르벨은 그 규칙을 따랐을 뿐이다. 들어가서 웃으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며 가벼운 스킨십과 함께 농담을 던져야 했다. 그러나 카르벨은 선뜻 노크하기 위해 든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
“저기, 있잖아요. 혹시 마법으로 나무가 막 빨리 자란다거나 그런 건 없나요?”
“있습니다만, 나무를 직접 봐야 합니다. 묘목이라도 키우시나 봅니다.”
“아뇨,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시답잖은 대화는 생각보다 이어가기 편했다. 얼마나 대화가 길어졌을까. 똑똑, 노크가 들리고 카르벨이 들어왔다. 일을 마쳤는지 말끔한 차림새는 나갈 때 그대로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엘로니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대화는 잘 나누고 있었나.”
“생각보다는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이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는가! 싫어하는 이를 두고 어떻게든 핑계와 적당한 명목까지 만들어서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노력! 살롱에서 모든 옷이 마음에 안 든다며 원단 색이 어떻고, 레이스 흐름이 어떻고 트집 잡힐 때마다 발휘했던 임기응변이 빛을 발했다. 거기에 소파 팔걸이에 건방지게 드러누운 닉스의 투덜거림까지.
[뭐 저리 늦게 들어와? 밖에 서서 기절한 줄 알았네.]
그가 워낙 헛소리를 많이 하는 통에 엘로니아는 이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알아서 말을 걸러내는 능력까지 섭렵했다.
‘나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재능이 있나 봐.’
물론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엘로니아는 칭찬해달라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는 보란 듯 약혼반지에 입을 맞췄다.
“먼저 자리를 비워 미안하군. 오늘은 이것으로 봐주게.”
보란 듯 하는 행동이었다. 제 손을 잡은 카르벨의 손에도 같은 반지가 반짝였다. 리프리의 시선에 이 영롱한 보석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아주 대놓고…….’
노골적인 염장에도 리프리는 덤덤했다. 그렇게 답을 잘하던 그는 카르벨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입을 꽉 닫았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엘로니아는 더욱 열심히 떠들어야 했고.
“카르벨, 이거라도 좀 들어요. 에이미한테 제일 덜 단 디저트로 내오라고 했는데.”
“그대가 좋아하는 거니, 많이 먹게.”
“……3인분을 어떻게 혼자 먹어요.”
“그럼 먹여 줄 텐가?”
도와주는 것인지 훼방을 놓는 것인지 모를 카르벨 덕분에 그녀는 인내심을 다져야만 했다. 덕분에 엘로니아는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풀썩, 침대에 그대로 얼굴을 박고 엎어진 그녀는 힘없이 웅얼거렸다.
“1년 치 웃을 걸 오늘 다 웃은 거 같아.”
“에이, 공작님과 사이도 그렇게 좋으셨으면서.”
에이미는 그녀의 어깨를 꾹꾹 눌러 안마하며 부러운 듯이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원래 주기적으로 리프리 저하가 와서 저렇게 머무르시거든요.”
그녀의 말에 엘로니아는 빼꼼, 이불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에이미는 여기에 언제부터 있었어?”
“한 6년 정도 됐죠?”
“으음…….”
공작 부부가 사고가 난 뒤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에이미의 부드러운 손길에 엘로니아의 눈꺼풀이 무거운 듯 감겼다. 온종일 전투와도 같은 상태로 리프리에 신경 쓴 탓인지 온몸이 노곤했다. 막 잠이 들려던 찰나. 똑똑. 다시금 노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벌떡, 두 손으로 상체를 지탱한 채 몸을 활처럼 꺾었다. 문이 열리고, 카르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에도 활기차 보이는군.”
“이렇게 풀어주지 않으면 내일 몸살이 날지도 몰라요. 오늘 온종일 긴장 상태였다고요.”
“그건 곤란한데.”
그가 눈치를 주자 에이미는 알아서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보통 밤에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는 이라 그녀는 보석함을 가리키며 물었다.
“또 뭐 가지러 오셨어요?”
“그대는 나를 꼭 그대 보석을 약탈하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듯해.”
생각해 보니, 최근 소개장도 넘겨주었겠다. 그가 아쉬울 일이 없을 듯했다. 엘로니아가 무거운 눈을 끔뻑이자, 그가 황실에서 온 서신을 내밀었다.
“일주일 뒤 입궁이야. 정식으로 임명 받겠군.”
“그럼 저도 이제 연금 나오나요?”
“그렇겠지.”
졸음이 쏟아져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니면 현실감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작 서신 달랑 한 장이니 말이다. 태어나서 살다 보니 폐하의 자필 서신도 받는다. 아래에 박힌 인장까지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으니.
“서신에는 빠른 시일 내로 입궁해 달라는데요?”
“그래서 일주일 뒤로 잡았어.”
“리프리 저하가 그렇게 길게 계세요? 보아하니 짐도 없으시고 빈손으로 오셨던데.”
“빈손이라고 누가 그래.”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처음 창문 아래에서 만났을 때도 그의 주변에는 가방이라고 불릴 것이 없었다. 엘로니아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심각하게 되물었다.
“마법사라 단벌로도 버틸 수 있나요?”
“그게 마법사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입고 있어도 옷이 상하거나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가능은 한데, 저하가 그럴 성격은 아니야.”
카르벨은 자신의 가슴팍에 달린 자그마한 주머니를 톡톡, 기다란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마법사니까. 이 정도로 작은 주머니에도 무제한으로 들어가지.”
“아니, 그런 대단한 물건이 있으면 같이 좀 쓰지. 너무하네.”
“너무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엘로니아.”
일주일씩이나 머무르는 것도 썩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처럼 카르벨과 붙어 지낼 걸 생각하니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는 잠을 깨기 위해 제 뺨을 두 손바닥으로 눌러가며 답했다.
“공작님. 조금 바쁘실 예정 같은 거 없으세요? 한 일주일 정도.”
“이유는.”
“그야, 바쁘면 안 오실 테니까요. 오늘 계속 웃어서 안면 근육이 땅겨요.”
“안타깝게도 그레이터가 맡아주고 있어서. 유능한 보좌관이거든.”
어쩔 수 없겠구나. 엘로니아는 근 일주일, 열심히 웃을 운명인가 보다. 카르벨도 하는데 제가 못할 것인가 싶었다. 그녀는 꾹꾹, 제 볼을 마사지하며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전대 공작 부부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너무 깊숙이 파고드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돌아가신 이를 굳이 다시 입밖에 올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먼저 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남의 집 사정. 어차피 이혼하면 안 볼 사이인데 이대로 무시하고 지낼까 싶다가도 주기적으로 리프리가 찾아와 이럴 걸 생각하면 또 아득했다.
‘좋아, 아주 지나가는 투로, 돌리고 돌려서 묻는 거야.’
크게 용기를 낸 엘로니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공작님. 혹시…….”
“내일 오전. 연무장으로 나오게.”
그녀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카르벨이 말했다.
“네?”
“연무장이 끝나면, 도망가자는 뜻이야.”
도망?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해석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의 앞으로 카르벨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엘로니아의 긴 머리카락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공식적으로 리프리 저하를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뭔데요?”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