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서신이 보낸 통보2021.03.21.
펠런 백작저에서 있던 일 덕분에 엘로니아는 매일같이 고일이 보낸 진귀한 선물을 받아야만 했다. 어디에 쓰는지 당최 가늠도 안 되는 이상한 항아리를 보내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항아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에이미. 이건 어디에 둬야 잘 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으음……. 꽃을 넣기엔…….”
“술 담글 일 있어?”
그러기엔 엘로니아의 허리까지 오는 항아리는 너무 거대했다. 꽃을 꽂는 용도는 절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물건을 담자니 그리 실용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창고에 잘 모셔둬.”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엘로니아 님. 초대장이 왔는데요.”
“또? 무슨 초대?”
엘로니아가 불안한 듯 되묻자, 그녀는 다발로 묶인 듯한 서신 더미를 건넸다.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초대가 이만큼이나 있어요!”
엘로니아는 질린 듯이 슬그머니 편지를 테이블에서 멀찍한 곳으로 밀어버렸다. 펠런 백작저에서 있던 일은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특히 엘로니아가 보였던 정령사의 기적은 큰 화제였다. 엘로니아는 서신을 건성으로 읽어 내렸다.
“결국 내가 뭘 봐주길 원하는 것들이잖아.”
말은 유하게 돌려서 말하고는 했으나, 대부분 비슷했다. 심지어 가출한 강아지를 찾아달라는 어린 영식의 눈물겨운 서신도 있었다. 옆에서 서신을 함께 본 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인간들은 양심이 없어. 한 번 부탁을 들어주면 계속 부탁하려 든다니까?]
그녀도 그랬던지라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엘로니아는 괜히 읽었다 싶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나는 남의 뒷조사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건 길드에 맡기라고!”
공작저는 넓었고, 엘로니아의 목소리는 그리 멀리까지 퍼지지 못할 게 분명했다. 뭐, 카르벨 정도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녀는 하고픈 말을 전부 날려버렸다. 그리고 멀찍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그의 귀에 그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카르벨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에 옆에 있던 기사단장 데드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 이, 일동 정렬!”
순식간에 여기저기 퍼져 있던 기사들이 한데 모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카르벨은 갑작스럽게 각이 잡힌 그들을 보며 되물었다.
“뭘 하는 거지.”
“방금 누구 하나 조지시겠다는 미소를…….”
“…….”
카르벨의 서늘한 시선에 데드의 등에서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카르벨은 의무적인 미소가 아닌 다음에야 웃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였다. 데드가 그를 10년을 넘게 지켜본바. 정말 화가 나서 죽이고 싶을 때가 아니면 웃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 웃지 않았던가! 카르벨은 팔 위로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그래. 아주 잘 봤어.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네, 데드.”
“예!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그 죽을 대상이 궁금하지 않나.”
“……예?”
“오랜만에 검이나 잡지.”
데드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가 흙바닥에 널브러졌을 시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카르벨은 언제나처럼 친절한 미소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훈련을 조금 더 해야겠어, 데드.”
“가, 각하…….”
기분이 나쁘신가? 평소보다 배는 독한 검 끝을 막아내느라 무리한 탓에 데드의 팔은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카르벨은 다른 곳을 보며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또 왔군.”
카르벨이 응시하는 방향을 따라 보던 데드는 혹여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다시 검을 잡으라고 할까 봐 죽은 척을 하며 생각했다.
‘예비 마님 계신 방향인 것 같은데. 손님 오시나?’
***
“그렇게 웃었다가는 입가에 주름진다!”
차마 카르벨의 이름을 넣어 욕을 할 만큼 대범하지는 못했다. 엘로니아는 그래도 후련해진 마음으로 제 이마를 상쾌하게 닦아냈다. 그러던 순간, 산뜻한 바람이 날렸다. 그녀의 구불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어졌다. 곧 아래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인간이라면 늙으면 주름이 지기 마련입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니 언제 온 것인지 리프리가 서 있었다.
‘오늘 손님이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카르벨은 다른 것은 몰라도 손님만큼은 기가 막히게 일정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약속을 잡고 온 것은 아닐 테다. 마법사라더니, 신출귀몰하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편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리프리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연회 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이 마음에 걸려 왔습니다.”
“카르벨도 알아요?”
“서신을 보냈습니다.”
카르벨이 못 본 건가. 이런 류의 실수는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의외였다. 그녀는 괜히 서늘한 제 목덜미를 한 번 쓸어내리며 물었다.
“들으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음. 제가 하는 말 무엇이든…….”
“남의 뒷조사 하는 사람 아니야, 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들었습니다.”
그럼 그냥 처음부터 다 들은 거잖아. 엘로니아는 주어를 빼고 외친 스스로를 칭찬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사촌이 욕을 먹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는가. 엘로니아는 머뭇거리다 그에게 부탁했다.
“방금 들은 것들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실래요?”
“들었습니다만…….”
“알죠. 아니까 부탁드리는 거예요. 제가 최근 그……. 정령사 문제로 부탁을 좀 많이 받고 있는 터라.”
이런 말까지 하려니 익숙지 않아 제대로 설명하기 민망했다. 그는 이해하기 힘든지 작게 인상을 썼다. 워낙 잘생긴 얼굴인지라 그 위에 작게 우그러진 눈꺼풀도 희한하게 그와 어울리는 듯했다. 리프리는 한참 만에 답했다.
“많이 곤란하십니까.”
“조금요. 보실래요? 글쎄, 서신이 이만큼!”
엘로니아는 후다닥, 밀어두었던 서신 더미를 들어 그에게 흔들어 보였다. 사실 오늘 온 것이 이 정도지, 다른 날에 온 것까지 합치면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리프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때에 따라서 유의하겠습니다.”
“범죄는 아니니까, 리프리 전하만 조용히 해주면 돼요. 아시겠죠?”
엘로니아는 창틀에 팔을 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찬란한 백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착각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들어줄 일이라면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어주게 되어 있을 거잖아요.”
그리 대단한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고개를 숙였다. 언뜻 보이는 붉어진 목덜미를 보아하니,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인 듯했다. 리프리는 태연한 척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다 알고 있으셔서 힘드시겠군요.”
그녀는 사실 전혀 아는 게 없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뭘 알고 있냐고 묻는지도 사실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옆에서 똑같이 창문에 턱을 괴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닉스는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대체 인간들은 왜 정령사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 말이.”
[정령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차마 닉스를 보면 그렇다고 답할 용기가 없었다. 쯧, 혀를 찬 닉스는 제 통통한 볼울 자그마한 손으로 꾹 누르며 건성으로 리프리를 흘겨보았다. 엘로니아는 대답 대신 방긋 웃었다.
“엘로니아. 바람을 피우나.”
순간 목덜미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엘로니아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놀라 크게 튀어 올랐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는 창문틀에 한쪽 팔을 기대며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기척 좀 하고 오면 안 돼요?”
“노크했는데 못 들은 건 그대야.”
“그럼 들어오면 안 되죠. 못 들은 거잖아요.”
“들어오면 내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잖아.”
이상한 논리인데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 원래 무논리로 싸우는 사람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엘로니아는 그저 해탈한 미소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위에서 감싸 안 듯 누르고 있는 카르벨 탓에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는 씻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머리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고개만 들어 떨어지는 물기를 보며 물었다.
“지금 씻었어요?”
“어. 급히 오느라.”
“리프리 전하가 서신 보냈다는데, 봤어요?”
“그래.”
봤으면서 일정을 안 알려줬단 말이야? 엘로니아는 샐쭉해진 눈으로 리프리를 향해 외쳤다.
“전하, 서신 보셨대요! 근데 왜 안 알려주었나 몰라요!”
말은 리프리에게 했으나 실상 카르벨에게 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를 알아들은 카르벨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답했다.
“답신을 해서 안 올 줄 알았거든.”
카르벨의 단단한 팔이 엘로니아의 허리를 붙들었다. 순간적으로 간지러움에 그녀가 몸을 비틀자, 그가 팔에 힘을 주었다.
“자꾸 움직이면 떨어져, 엘로니아.”
“그러니까 갑자기 왜……!”
“우리 사이를 의심하고 있어, 리프리.”
“네?!”
엘로니아는 빠르게 곁눈질로 리프리를 살폈다. 도저히 표정만으로는 이놈의 두 인간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전에 만났을 때도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고 했지, 참.’
엘로니아는 안타깝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사셨길래 사촌이 말도 안 믿는 지경에…….”
“원래 가족이라고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녀조차도 부모님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사촌이 대수겠는가. 그래도 나름 공작 부부가 카르벨을 꽤 아꼈다는 이야기를 봤던 터라, 내심 좋을지도 모른다는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까지 바르작거리던 그녀가 얌전해지니, 카르벨이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협조 좀 하지. 설정이잖아. 사랑해 마지않는 엘로니아.”
꼭 저렇게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몸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카르벨은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보란 듯 외쳤다.
“아무리 사촌이라고는 하나, 내게 이야기도 없이 둘만 만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 같은데.”
“서신을 보냈으니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형님.”
“거절하지 않았던가.”
카르벨의 단호한 답에도 리프리는 마치 동상처럼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올려다볼 뿐이었다. 리프리가 한참 만에 꺼낸 말은 다소 놀라웠다.
“며칠, 저택에서 묵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절반은 왕국의 몫입니다.”
“그러나 가주는 접니다.”
첨예한 대립이 오고 가는 와중에 엘로니아는 잠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녀는 설마 하는 기분으로 말을 건넸다.
“지금, 서신 보냈다는 게…….”
이에 리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묵겠다는 통보를 보냈습니다.”
그 누가 왕국에서 온 손님, 그것도 왕손으로 온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우한단 말인가. 에스피디 황실에서도 극진히 대접하는 형국이었다. 엘로니아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허리에 감긴 카르펠의 팔을 풀어내고자 했다. 두 손으로 끙끙대었으나, 안타깝게도 힘의 차이를 이길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싱긋, 카르벨이 웃는 것처럼 웃었다. 적당히 예의는 차리되 겉으로 보기에 진심은 없어 보이는 바로 그 표정. 그녀는 정면을 본 채로 넌지시 말했다.
“공작님.”
“말해. 듣고 있으니.”
“설마 리프리 전하가 묵는 동안 내내 이러고 다니실 건 아니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