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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티타임의 시작 (27/234)

27. 티타임의 시작2021.03.04.

소스라치게 놀란 엘로니아의 손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덩달아 말도 평소보다 빠르게 뱉어냈다.

“찾기는요. 그냥 눈에 들어와서 공작님도 책을 읽으시는구나, 하고 스치듯 본 거죠.”

목덜미 부근에서 흐음, 하는 목소리의 진동이 잘게 느껴졌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는 키보다 높은 책장이, 뒤에는 카르벨이 바짝 지키고 서 있는 탓이었다. 어깨너머로 단단한 팔이 여전히 그녀가 뽑으려던 책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조금 뒤로 물러서 주시는 건 어떠실까요?”

몸을 슬쩍 들썩이자 카르벨은 보란 듯 책등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찾던 책이 이건가?”

“아뇨. 그 옆에……. 아니. 책 찾던 거 아니었다니까요?”

저도 모르게 틀린 답을 정정할 뻔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난스럽게 던졌던 질문과 달리 진지한 모습이었다. 카르벨의 시선 끝에는 그녀가 꺼내려고 했던 책이 있었다. 엘로니아는 넌지시 물었다.

“보면 안 되는 책이에요?”

“아니야. 그대가 황실에 그리 관심이 있는 줄 몰랐군.”

카르벨은 책등을 톡톡,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그제야 확인하니 책의 제목부터 황실의 역사라고 턱 하니 적혀 있었다. 그녀는 혹여 또 황실 역사를 외우라느니 다른 자잘한 것까지 일거리를 줄까 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절대.”

“알았어. 그렇게 정색하면 믿어 줄 수밖에 없잖아.”

“그냥 펠런 백작님 얘기를 전하러 온 거였어요.”

“펠런 백작? 백작 부인에 대해 물을 줄 알았는데.”

본론을 꺼내자 그제야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카르벨은 이미 펠런 백작 부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건강하던 사람이 그렇게 삽시간에 안 좋아졌으니. 그럴 만도…….’

티타임의 주최자 역시 펠런 백작 부인이니 그녀에게 소개장을 받아야 할 카르벨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인가 싶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펠런 백작님이요. 어떤 사람이에요?”

“전에 준 정보로는 부족한가?”

“그런 정형화 된 문서 말고요. 그냥 공작님이 느끼시기에 어떠신지요.”

연회 때 짧게 본 인상만으로는 섣부르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사람이란 단순히 정보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엘로니아가 본 펠런 백작은 너무 단편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수없이 바뀌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떻게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질문에 카르벨도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글쎄. 그리 친한 이는 아니라서.”

그는 팔짱을 끼며 가늘어진 눈으로 엘로니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맛살이 아주 짧게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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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숨을 들이쉰 카르벨은 다소 낮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물었다.

“그런 남자가 취향인가?”

“……저 눈 높아요. 머리 꼭대기 위에 달렸어요. 전혀 아니에요!”

격렬하게 부정했으나 의심의 눈초리는 거둬지지 않았다. 그녀는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잘생긴 사람이 좋아요! 키는 저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크고, 자상하고, 목소리도 좋고, 어깨도 넓고, 몸도 좋고! 젊고!”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었다. 애초에 펠런 백작과 나이 차가 크게 났기 때문이었다. 젊다는 부분에서 그는 완전하게 배제되기 때문에 더 의심할 여지의 싹을 잘라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카르벨은 놀란 듯 조금 커진 눈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얼토당토않은 말 때문에 잠시 본심이 나와버렸네.’

엘로니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자. 그의 장난에 말려 들어가면 안 된다. 정작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웃음기가 사라졌던 그의 입매가 다시 호선을 그렸다. 말투도 한결 가벼워졌다.

“유의하지. 그래도 다행이군. 펠런 백작이 워낙 인기가 많은 이라 걱정했거든.”

“그래요?”

“귀천도 안 따져, 사람 검소해. 적당한 재력과 인망. 거기다 매너가 좋은 이야. 다정하기까지 하니.”

확실히 그렇다고 듣기는 했다. 그러나 엘로니아가 궁금한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백작 부인과 불화는 없고요?”

“불화라면 어느 종류? 부부, 치정, 경제. 많잖아.”

“뭐든요.”

“메티카 감옥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취조라도 하는 건가.”

“비슷해요. 백작님이 부인께 드린 차가 독성이 있는 것 같아서요.”

어찌 보면 놀랄 법도 한 이야기에도 카르벨은 미동조차 없었다. 고개를 가볍게 기울인 그가 말을 이었다.

“확신해?”

“잘은 모르겠지만, 부인께서 백작께 차를 받아 마시신 뒤로 건강이 나빠지셔서요.”

“알아보지.”

다른 부차적인 설명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한 답이었다. 그가 어떻게 확신하냐고 물으면 정령이라고 답을 해야 할지, 다른 핑계를 찾아봐야 할지 고민한 시간이 무색했다. 답까지 미리 준비했거늘, 정작 흔쾌히 들어주는 카르벨 덕에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한번 말을 뱉으면 지키는 사람이었다. 엘로니아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이 말을 전하려고 찾았어요.”

깍듯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까지 건넨 그녀는 그가 다른 방식으로 약을 올리기 전에 빠른 속도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 * * 엘로니아가 사라진 서재는 한결 조용해졌다. 카르벨은 그녀가 나간 문을 그 자리 그대로 반듯하게 선 채 바라보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팔을 뻗어 엘로니아가 처음 집으려고 했던 책을 꺼내 들었다. 멀쩡했던 책등과 달리, 책 모서리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마치 타다 만 것처럼. 내용, 제목은 평범했지만, 그 타다 만 자국 하나로 평범하지 않은 책이었다. 황실 서고가 불타던 날. 전부 타고 남은 더미에서 유일하게 형태가 제법 남은 채로 발견된 한 권이었다.

“우연인가…….”

카르벨은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글자에 고정된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용에 집중하고 있다기보다는 다른 생각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차에 관해서는 그도 알아보고 있었다. 펠런 백작 부인이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은 알음알음 퍼졌으나, 그 원인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누군가 독이 든 차를 먹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시기상조라 말을 아끼고 있을 뿐.

‘엘로니아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눈치가 빠른 편인가.’

애매하게도 약으로 쓰이기도 하는 차였다. 독성이 더 강해 그대로 쓰이는 법은 없고, 다른 것들과 섞어 소량 사용되는 일이 더 잦았다. 펠런 백작 부인이 먹는 차 역시, 그렇게 혼합된 것이었다. 다만 독성이 든 찻잎이 소량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즉사할 정도로 과한 양은 아니었기에 그 덕에 죽지 않고 지금까지 시름시름 앓아 온 것이리라. 탁, 책을 덮은 그는 다시금 제자리에 책을 꽂았다. 조금 알아볼 것이 생긴 듯했다. * * * 펠런 백작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뜻한 답이 돌아왔다. <보내주신 차를 마신 뒤, 한결 몸이 좋아졌습니다. 곧 티타임을 열 수 있을 것 같아요.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필체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님프가 구해다 준 차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주 탁월했는지, 이번에는 전과 달리 티타임이 밀리지 않고 예정대로 열렸다. 엘로니아 역시 부티크의 소개장을 받겠다는 일념하에 단단히 준비했다. 특히 펠런 백작 부인이 선물했던 그 목걸이까지 손수 목에 매었다. 일단 카르벨의 말처럼 그 목걸이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티타임 주최자의 기도 살려줄 겸. 그녀의 드레스보다 더 눈에 띄는 듯한 목걸이를 보며 닉스가 눈을 빛냈다.

[솔직히 말해줄까?]

“아니.”

[완전 마음에 들어.]

굳이 거절까지 했는데도 닉스는 입을 열어 칭찬했다. 그의 심미안은 썩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오래였기에 그저 가볍게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엘로니아는 백작가 시종의 안내를 따라 티타임이 열리는 테라스로 향했다.

“엘로니아 데브니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이 그녀가 왔다는 사실을 고하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 중 많이 좋아진 얼굴로 펠런 백작 부인이 달려왔다.

“영애! 이렇게 와 주어 고마워요. 요즘 고맙다는 말밖에 못 해서 정말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건강은 괜찮으세요?”

“보다시피요. 호호.”

닉스가 보여 주었던 과거의 모습보다 활기가 넘쳐 보였다. 펠런 백작 부인은 보란 듯 그녀를 소개했다.

“다들 연회 때 봬서 알고 계시죠? 엘로니아 데브니 영애께서 티타임 초대에 응해주셨답니다.”

“초대 감사드립니다.”

엘로니아는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일전에 카르벨을 통해 누가 참석하는지 알고 있어서인지 익숙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중 누군가가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펠런 백작 부인께서 건강이 안 좋으실 때, 정령사님께서 도와주셨다 들었어요.”

“부인께서 얼마나 입이 마르도록 말씀하시던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말에 엘로니아는 멋쩍게 웃었다.

“대단한 일도 아닌걸요.”

“그럴 리가요. 정령사님께서 손수 차를 보내셨다는 게 얼마나 영광인지요.”

펠런 백작 부인이 사실이라는 양 답했다. 힘들었던 투병을 떠올렸는지, 그녀는 기력이 없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떤 병이라고 말씀도 안 드렸는데 어찌 그리 잘 아시고…….”

“정령들이 알려주었어요. 저도 부인이 쾌차하길 바랐으니까요.”

“정령들도 엘로니아 양을 닮은 모양입니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닉스가 코웃음을 쳤다.

[누가 닮았다고 그래. 쟤는 나처럼 파랗지 않다고!]

그의 외침을 들을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화기애애한 대화에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정령으로 보셨다고요?”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익숙하거나 흔한 음성은 아니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자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누가 오는지를 숙지한 엘로니아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에릴 후작 영애?’

연회 때 언뜻 본 후작의 얼굴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에릴 후작 영애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눈매가 조금 올라간 탓에 살가운 인상은 아니었다.

“어떻게 펠런 백작 부인의 건강을 바로 알아차리셨는지, 듣고 너무 놀랐답니다.”

“글쎄요. 저는 정령들이 알려주는 사실을 들을 뿐이니까요.”

적어도 이 정도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독성이 있는 차를 선물한 게 펠런 백작이라며 삿대질을 할 만큼 엘로니아는 멍청하지 않았다. 하여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차피 확인할 방법이 없는 정령으로 답을 대신했다. 에릴 후작 영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정령들이 그런 것도 알 수 있나요? 주치의가 필요 없겠네요.”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니 의사를 더 믿어 주세요.”

“이렇게 펠런 백작 부인도 단기간에 병상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는데, 의사보다 정령이 훨씬 믿음직스러운 거 아녜요?”

묘한 공격성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그녀를 치켜세워주는 듯하면서도 말에는 뼈가 있었다. 반면 건네는 미소는 진심이라는 듯이 굴어 더욱 애매했다. 엘로니아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뭐야. 엄청 뻣뻣하네. 지금 이거…….]

눈썹을 씰룩이던 닉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믿음직스럽다면서 날 하나도 못 믿는 말투잖아!]

닉스가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 엘로니아의 머릿속으로 과거가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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