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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답신 (26/234)

26. 답신2021.02.28.

  엘로니아는 연회에서 본 펠런 백작이 떠올랐다. 자상하게 부인을 챙기던 모습이 퍽 보기 좋아 유독 기억에 남아 있었다.

‘가문의 배경이 없는 이를 부인으로 들일 정도이니…….’

정략혼이 대부분인 귀족가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보다 가문의 결합으로 보는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재혼만 네 번이라니 너무 잦지 않은가?’

덕분에 펠런 백작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도 많았다. 엘로니아 역시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절차에 문제는 없고, 추문도 없었기에 그러려니 머리로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아마도 평생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힘들 듯했다. 그저 지금 펠런 백작 부인이 만족하고 있으니, 빠른 쾌유를 비는 수밖에. 엘로니아는 편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걱정되셨나 보다. 좋다는 차도 구해오실 정도면.”

[글쎄.]

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떨떠름한 표정이 그녀의 말에 전혀 공감을 못 하는 눈치였다.

[펠런 백작인지 파리 백작인지가 선물했다는 차가 일단 몸에 좋은 차는 아닌데?]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더불어 믿기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여태 펠런 백작은 네 번의 재혼을 했는데, 전 부인들 중 사별을 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이전 부인들과 제법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연회에서 만나면 시답지 않은 사담도 스스럼없이 건네곤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불화가 있다는 소문도 없었다. 오해는 아닐까? 엘로니아는 다른 가정을 넌지시 띄웠다.

“가끔 약간 독 성분이 있는 것도 약으로 쓰일 때가 있다던데…….”

[내가 설마 그런 것도 구분을 못 하겠어?]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

그를 불신한다고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닉스의 망울진 눈이 왈칵 찌그러졌다.

[얘 좀 봐라. 내가 과거를 보여줬잖아! 거기에 차가 나왔어, 안 나왔어!]

“나왔어.”

[거기에 물이 들어가, 안 들어가.]

“들어가.”

[그럼 내가 알겠어, 모르겠어.]

오, 그렇구나! 작게 탄식을 내뱉자, 그는 뻐기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껏해야 짤막한 목이 쭉 내빼어진 모양새였다. 아이의 모습이라 위엄보다는 하찮아 보였으나, 닉스는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엘로니아는 다소곳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변을 살핀 뒤,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바로 코앞에 닉스를 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그 차에 독이 들었다는 거야?”

[그래 보여. 한 번 마신다고 죽을 정도는 아닌데, 꾸준히 마시면 서서히 기력이 없어지고 죽어갈걸.]

“그럼……. 설마 펠런 백작이…….”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데도 엘로니아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확실치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망설여졌다. 때문에 끝까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부인의 편지에는 그가 선물했다고 했으니,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닉스는 상쾌하고 빠르게 답했다.

[몰라.]

“…….”

일말의 멋쩍음조차도 없는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모른다는 말을 저리 당당하게 할 일인가. 잔뜩 긴장했던 엘로니아의 시선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확연히 달라진 반응에 닉스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지금 그 차가 없잖아. 난 물건에서 과거를 보여주는 거지, 과거에서 본 것에서 또 과거를 볼 수는 없다고.]

엘로니아는 서신을 깔고 앉은 그를 가볍게 털어냈다. 답신에 대한 고민이 한층 깊어졌다. 무작정 차를 마시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증거도 없이 펠런 백작을 의심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을 싣기도 힘들었다. 목걸이를 구한 부티크의 소개장은 받아야 하니 되도록 관계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뚫어져라 서신을 노려보며 고민하던 엘로니아는 답신을 하는 대신 편지를 도로 접었다. 새 편지지를 챙긴 그녀는 에이미를 불렀다.

“에이미,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정원으로 갖다줄래?”

“정원이요?”

의외라는 기색이 가득한 질문이었다. 엘로니아는 밝은 음성으로 답했다.

“날씨도 좋으니 기분 전환이나 할 겸, 밖에서 먹으면서 서신에 답장하려고.”

“이 날씨에요……?”

에이미의 눈동자가 창문을 가리켰다. 흐릿한 하늘이 비가 오는 것도 아니면서 해도 없어 애매하게 칙칙했다. 일반적으로 좋다는 날씨와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래 햇볕을 좋아하지 않아. 눈이 부시거든. 적당히 흐려야 좋지.”

“알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힘찬 대답과 함께 에이미는 빠른 속도로 방을 떠났다. 그제야 뚱하니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닉스가 물었다.

[갑자기 케이크는 왜?]

“님프를 부르게.”

찻잎이라면 숲의 정령인 님프가 훨씬 잘 알고 있을 터. 그런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로 불러볼 생각이었다. *** 정원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로 흐릿한 바람이 불었다. 해가 없어서인지 쌀쌀함이 느껴졌다. 보온을 위해 로브까지 걸쳤으나, 바람에 펄럭이는 덕에 큰 의미는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닉스는 바람에 머리카락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얼굴을 강타하는 로브를 손으로 거둬들이며 아련히 그 이름을 불렀다.

“님프……. 초콜릿 케이크 먹자.”

테이블 밑에서 빼꼼, 님프가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 번 맑게 웃은 그녀는 초콜릿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그녀의 앞으로 접시를 끌어다 놓았다.

“먹어도 돼. 주려고 가져온 거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케이크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한입 가득 우물거리던 님프가 기쁜 듯 바쁘게 테이블 주변을 배회했다. 엘로니아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펠런 백작 부인이 보낸 서신을 꺼냈다. 혹여 날아갈까 봐 구겨지도록 손에 꼭 쥐었다.

“혹시 이 서신을 쓸 때 마신 차에 독이 들었어?”

님프는 우물거리며 그저 서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편지를 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을 굴리던 님프는 무언가 떠오른 듯 허공에서 작게 튀어 올랐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고개를 들었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아, 다 먹고 물어볼 걸 그랬나?”

먹을 때 건드려서 화라도 난 걸까. 그러나 금세 다시 나타난 님프의 품에는 처음 보는 찻잎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테이블 위에 우수수, 쏟아낸 찻잎은 바람이 불자 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이에 님프는 충격을 받은 듯 허둥지둥 테이블 주변을 살폈다. 엘로니아는 안 되겠다 싶어 그녀를 방으로 초대했다. 물론, 케이크를 더 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이에 님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님프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품에는 역시 똑같은 찻잎이 있었다. 물물교환하듯 후두둑, 케이크 옆에 쏟아낸 님프는 눈을 반짝이며 엘로니아를 바라봤다. 이를 지켜보던 닉스는 심드렁하게 누워 말을 대신 전했다.

[저 찻잎이 펠런 백작 부인이 마신 독차를 해독할 수 있대.]

“정말? 이렇게 소량으로도 가능해?”

워낙 작은 님프였기에, 찻잎의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한두 번 우리면 끝날 정도였다. 그러자 님프는 고개를 저으며 손짓, 발짓을 하며 커다란 무언가를 그리는 듯했다.

“더 가져다준다고?”

직감적으로 알아들은 게 맞았는지, 님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닉스는 못마땅한 듯 말을 얹었다.

[뭐야, 둘이 왜 이렇게 친해?]

그의 여린 볼이 불만족스럽게 씰룩였다. 그러나 님프는 그저 맑게 웃으며 케이크를 열심히 먹을 뿐이었다. 그런 정령들의 옆에서 엘로니아는 답신을 적어 내려갔다. <펠런 백작 부인. 답신 감사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여 걱정이 돼요. 그래서 좋은 차를 보냅니다. 정령의 가호가 있기를.> 답신을 할 때마다 굳이 정령에 관해서는 쓴 적이 없었다. 엘로니아가 실수할 날이 올 수도 있으니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제외했던 마지막 문구를 넣었다. 정령이라는 단어가 더 돋보이도록.

‘정령사가 준 차라고 하면 더 신뢰 가겠지?’

실제로 정령이 준 차이니 효과는 안 봐도 눈앞에 그려졌다. 정령사가 아니었다면, 한 번 본 그녀보다는 남편에게 의지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도 펠런 백작은 그녀를 아끼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보낸 차는 포트에 담겨보지도 못하고 봉투에서 영원히 말려지고 있을 수 있었다. 가장 체력이 안 좋을 때. 점점 건강이 악화되고 있을 무렵. 그런 때라면 엘로니아의 말을 한 번쯤은 믿어보지 않을까. 작은 봉투에 꼼꼼히 님프가 쏟아둔 찻잎을 담아 따로 동봉했다. 에이미에게 전달까지 마친 그녀는 꾸물꾸물, 날씨가 영 좋지 않은 바깥을 응시했다. 괜히 따스한 방 안도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한기가 남아 있는 어깨를 가벼이 털어내며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부디 무사히 서신이 펠런 백작 부인에게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공작님, 계세요?”

텅 빈 서재에 발을 디뎠다. 특유의 책 냄새가 널따란 공간에 가득 차 있었다. 엘로니아는 주변을 둘러보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있으시다더니, 없잖아.”

펠런 백작에 대해 미리 알려야 할 것 같아 기껏 손수 찾아왔거늘. 연무장은 어째서인지 보수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집무실에는 그가 없었다. 기껏 지나가는 기사에게 물었더니, 바짝 얼은 자세로 서재에 있을 거라며 안내를 했다. 그들 중 하나는 이상한 말을 하기도 했다.

“저희를 위해 목검까지 신경 써 주시고. 감사드립니다, 마님!”

“앞으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게 열심히 훈련하겠습니다!”

  알 수 없는 외침에 되묻고 싶었으나, 그들의 과다한 열정에 치여 차마 질문을 건넬 수 없었다. 헤일튼 공작저에 이렇게 큰 서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엘로니아는 건성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책보다는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하나를 꺼내서 대충 넘겨본 그녀는 머리가 아파 오는 내용에 고개를 저었다.

“이걸 다 읽기는 할는지. 책을 읽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제 자리에 다시 넣은 그녀는 다시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득 엘로니아는 누군가 자신을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괜히 오싹한 기분에 일부러 책장을 더 꼼꼼히 살피는 척했다. 그러던 중, 유독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이유는 없었다. 신기하게도 마치 운명처럼, 그 책이 그녀를 잡아당기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책을 향해 엘로니아는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아 발꿈치까지 들어 낑낑댔다. 책등의 끄트머리가 손톱 끝과 닿았다.

“됐다!”

조금만 더, 라고 속으로 외쳤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뒤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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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그늘진 엘로니아는 목덜미가 쭈뼛하게 섰다. 카르벨의 손이 위를 향했다. 그녀를 등을 감싸는 듯한 행동은 정작 꺼내려던 책을 다시 집어넣었다. 곧이어 낮게 가라앉은 속삭임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나를 찾는다더니, 왜 책을 찾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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