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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미뤄진 초대 (25/234)

25. 미뤄진 초대2021.02.25.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카르벨이 찾아왔다. 그는 대뜸 저번 밤에 가져갔던 케이스를 내밀었다. 황실에서 선물로 준 것이었다.

“돌려주러 왔다.”

“부지런하셔라.”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급히 환복한 터라 졸음이 가득한 답이었다. 에이미의 가히 놀랄 만한 솜씨는 방금 일어난 그녀도 막 단장한 영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등허리에 미처 다 묶지 못한 리본이 풀려 바닥에 끌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잠이 반쯤 덜 깬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자, 카르벨은 직접 그녀의 손을 들어 케이스를 들려주었다.

“확인해 보니 필요 없어졌어.”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겪은 것인지 꼼꼼히 살피던 그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 미련조차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보석도 밤에 보면 더 예뻐 보이나?’

엘로니아는 뚱한 표정으로 넘겨받은 케이스를 옆에 있던 에이미에게 고스란히 넘겼다. 막 일어난 그녀와 달리 카르벨은 멀끔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와 주름 하나 없는 의복. 목까지 채운 크라바트까지. 어지간히 일찍 일어나지 않고서는 완성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전에 집사장이 알려준 사람답지 않은 일정표가 떠올랐다. 그에게는 한창 활동 시간이었다. 이 탓에 불평도 하기 힘들었다.

‘밤마다 정령 셋이 노래를 부르는데……. 잠을 자는 게 이상하잖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이었다. 심지어 어디에 말할 수도 없는. 때문에 엘로니아는 하품을 삼키며 되물었다.

“이것 때문에 아침부터 오신 건가요?”

“낮부터는 바쁠 예정이라.”

바쁘면 바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예정은 또 뭐란 말인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다소 멍한 탓에 말을 하기도 귀찮았다. 황실에서 받은 선물도 돌려받았겠다, 엘로니아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카르벨의 시선이 잠시 뒤를 향했다. 아마도 에이미가 있을 곳이었다. 사람을 물려달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에이미. 잠시 공작님과 단둘이 있어도 될까? 아침 투정은 조금 부끄러워서 말이지.”

건성으로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조금만 덜 졸렸더라면 쑥스러운 척이라도 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만사가 귀찮았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는 통한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필요하실 때 불러주세요.”

그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그녀는 빠르게 방에서 사라졌다. 둘만 남자 카르벨이 작게 고개를 까닥이며 그 점을 지적했다.

“아침에는 취약했군.”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요.”

아마도 보통의 사람은 이 시간대가 기상 시간일 것이다. 엘로니아의 하루가 특별히 늦게 시작하는 편도 아니니 말이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창밖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막 지나간 자리에 서늘한 공기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세한 바람이 추워, 엘로니아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숄을 어깨 위로 끌어당겼다. 대충 올리니 자꾸 내려왔다. 이마저도 귀찮아 그냥 내버려 뒀다. 그러자 카르벨이 손수 어깨 위로 친절히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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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즉각 말해주길.”

“일이요? 무슨 일이요?”

“사소한 것도 괜찮아.”

엘로니아는 과한 친절에 잠이 깨는 기분이었다. 본래 잘 교육받은 그는 특유의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비록 엘로니아에게는 밉살맞은 소리를 일삼지만, 밖에서는 적당한 매너를 차렸다. 그녀는 숄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이런 거?”

“멀쩡하다는 뜻이군. 그럼 됐어.”

카르벨은 말을 끝으로 그녀의 방을 빠르게 훅 눈에 담았다. 사용감이 느껴지는 방은 특별할 것 하나 없었다. 확인을 끝마친 그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질 게 뻔히 보이는 악혼녀를 위해 물러났다. 탁, 문이 닫히고 엘로니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카르벨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아셀리에게서 선물이 왔다 하여 날을 세웠거늘. 정작 받아온 핀은 평범했다.

‘뭐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녀라면 정령사를 본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마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미세한 탓인가 싶어 마법사에게 부탁까지 했건만, 결과는 같았다.

‘이렇게까지 미세한 정도면 사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지만.’

엘로니아를 연회에서 소개한 뒤, 많은 이들이 경외와 동시에 두려움에 떨었다. 정령사는 ‘자연으로부터 과거를 읽는 자’. 세상에는 과거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순수하게 올라온 이를 찾는 편이 더 빠를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일부 귀족들에게 엘로니아는 불편한 존재였다.

“나도 포함되겠군.”

그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만 카르벨은 그녀가 가짜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령사가 존재한다고 한들,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이를 모르는 이들은 엘로니아가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할 터. 그가 직접 진짜인 척 세워뒀으니. 그녀를 지키는 책임은 카르벨의 몫이었다.

‘적어도 가짜 역할을 하는 이상…….’

그로 인해 일어나는 위협은 제거해주는 것이 옳다. 그녀가 오래 버텨야, 그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복도를 걷던 카르벨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문득 떠오른 상념이 난해했다.

‘과연 우연일까.’

갑자기 엘로니아에게 미약한 마력이 담긴 목걸이가 선물로 들어오고, 연무장에서 목검이 튕겨 나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 무덤덤한 혼잣말을 삼킨 그는 복도를 벗어났다. *** 펠런 백작 부인에게서 오후 늦게 서신이 왔다. 초대장을 받았을 적과 달리 수수하고 검소한 편지지가 낯설었다. 눅진하게 붙은 실링을 뜯어내자, 안에는 간결한 글씨체가 가늘게 적혀 있었다. <티타임은 건강상의 이유로 일정을 미뤘으면 합니다. 기꺼이 초대에 응해주셨는데, 실망을 안겨드려 마음이 편치 않네요. 데브니 영애께서 부디 미뤄진 날짜에 응해주실 수 있는지 의중을 여쭤봅니다.> 그 아래에는 바뀐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많이 아프신가 보네.”

연회에서 밝고 힘찼던 펠런 백작 부인을 떠올렸다. 엘로니아가 티타임에 오기를 노골적으로 바랐던 사람인지라, 이렇게 미룰 때는 제법 심각한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불현듯 카르벨이 무슨 일이 없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야 돌이켜보니, 펠런 백작 부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펜을 들며 구시렁거렸다.

“그냥 티타임이 밀리지 않았냐고 묻지.”

황실에서 받은 케이스도 딱 오전에 돌려준 것을 보아하니 얼추 그녀의 추리가 맞는 듯싶었다.

“소개장이 어지간히도 받고 싶었나 보네.”

적당히 안부를 물으며 참석 여부에 긍정을 표했다. 갈 수밖에 없는 일이니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하여, 언제든지 괜찮으니 쾌차 후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됐다.”

마지막까지 꼼꼼히 살핀 뒤, 에이미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서신을 넘기고 나니, 문득 연무장에서 지켜주었던 그의 등이 떠올랐다. 티타임에 가야 할 테니 도운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받은 도움이 고맙기는 했다. 마침 고맙다는 말도 전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퉁명스럽게 펜을 내려놓았다.

“그래. 원래 사람이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가 고대하는 듯이 보이는 티타임에 도와준 몫만큼 최선을 다해야겠다. 엘로니아는 그렇게 다짐하며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새로 잡은 티타임의 날짜가 다가오자, 서신은 다시 도착했다. 내용도 엇비슷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일정을 미루는 내용이었다.

“많이 안 좋으신가?”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몸살이겠거니 생각했거늘. 두 번이나 밀리니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에 엘로니아는 진심으로 우려를 담아 답신했다. 편지를 그리 자주 쓰지 않아서인지, 정령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옹기종기 책상 위로 자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특히 닉스는 아주 큰 소리로 낭독을 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마지막으로 뵈었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잖아?]

“그렇다고 처음 봤다고 쓸 수는 없잖아.”

심드렁하게 답을 건넨 엘로니아는 문득 대화의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닉스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떻게 알았어?”

[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거.”

[내가 누구냐. 엣헴. 바로 닉스 님 아니시겠냐!]

으스대며 고개를 치켜드는데 박수를 쳐줘야 할지, 무시를 해야 할지 잠깐의 갈등이 스쳤다. 저 잘난 걸 자랑하기 좋아하는 그를 떠올리고는 엘로니아는 힘껏 손뼉을 쳤다. 물론, 다소 성의 없는 반응도 함께 따라왔다.

“와, 맞습니다.”

[네가 나 몰래 재밌는 데 가서 놀았나 확인해 봤지.]

“지금……. 내 과거를 봤다는 거야?”

[아니지! 그건 마차에서 돌아오는 길에 봤고. 지금은 펄럭?]

“펠런 백작 부인.”

[그래, 그 사람을 봤지.]

그는 손가락까지 튕기는 여유를 보였다. 허공에서 주변을 맴돈 그는 툭, 엘로니아의 정수리 위에 앉았다. 곧 시원한 기운이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이제는 정령이 보여주는 과거도 나름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과하게 화려하다 싶은 펠런 백작 부인의 방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차를 마시며 티타임 초대 명단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그녀가 있었다. 순간 엘로니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말 저 사람이 펠런 백작 부인이라고?’

통통하고 얕게 살이 올랐던 불그스레한 뺨은 눈에 띄게 살이 빠져 있었다. 피부는 핏기가 없어 다소 창백했다. 연회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안타까움에 침음을 삼켰다. ‘아프시다더니, 정말 큰 병이라도 앓고 계신 건가?’ 정작 귀족가를 전부 달달 외웠던 머릿속에 그러한 정보는 없었다. 더군다나 연회 때는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였던 그녀였다. 백작 부인의 화려한 방과 어울리는 화려한 차림새로 본 게 엊그제 같았다. 똑똑, 백작 부인의 방에 노크가 들렸다. 시녀가 들어오자 그녀는 잔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차를 새로 내와 주겠어요?”

“예, 부인. 평소 좋아하시던 걸로 내올까요?”

“아니에요. 지금 거와 같은 걸로 부탁해요.”

정중한 거절에 시녀는 알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을 마지막으로 더는 펠런 백작 부인의 가녀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놀란 마음 탓인지 그 모습이 생경했다. 덕분에 짤막하게 보내려던 서신은 점점 길어졌다. 장황하게 걱정을 담아 보내서일까. 본래 초대장에 참석 여부만 확인하면 따로 답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티타임 초대와 별개로 펠런 백작 부인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걱정해주어 고마워요, 데브니 영애.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서 남편도 걱정이 많답니다. 직접 건강에 좋다는 차를 구해다 줄 정도로 지극정성이랍니다. 그러니 곧 일어나겠지요. 이번에는 꼭 티타임으로 뵐 수 있기를.> 그러고 보니 편지를 쓰던 그녀의 옆에는 차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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