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힌트2021.02.18.
잔뜩 기합이 들어간 답과 함께 에이미는 경보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진정할 수 있었다. 어제 오전, 연무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정령과 함께였다. 자연스럽게 긴장도 따라왔다. 어제 저녁에는 이어진 황실의 선물까지 더해지니, 누적된 피로가 없잖아 있었다. 엘로니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되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바구니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게……. 님프가 산에 가서 멧돼지와 싸워 쟁취한 산딸기인 거니.”
[싸우기는. 도망쳤겠지.]
그녀의 말을 닉스가 정정해주었다. 언제 먹었는지, 이미 한 알을 베어 물은 탓에 발음이 부정확했다. 다람쥐처럼 두 볼에 빵빵하게 산딸기를 밀어 넣는 모습이 또 밉지만은 않았다. 그제야 바구니 속에서 빼꼼. 님프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항의하는 듯하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노움이 말을 전해주었다.
[도망친 거 아니래. 오히려 멧돼지가 알려줬다는데?]
진짜 멧돼지를 만나기는 하는 거였어? 복잡한 감상이 들었으나, 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좋으면 된 거 아닌가 싶었다. 님프는 자그마한 손으로 산딸기를 들었다. 기껏 들어서는 그녀에게 보여주는 게 전부였다. 엘로니아는 그 모습이 퍽 귀엽고 대견해 웃음이 나왔다.
“먹으라고?”
고개를 끄덕인 님프는 직접 날아서 그녀에 입에 손수 넣어줬다. 특유의 새콤한 맛이 입안에서 터지자, 엘로니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맛있다……. 이래서 산까지 가서 따온 거구나.”
혼잣말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노움이 고개를 들었다. 님프가 나눠주는 산딸기를 받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웃는 얼굴에 자랑이 묻어났다.
[님프가 골라주는 건 맛있으니까 믿어도 돼.]
왜 그리 자신했는지 알 것 같았다. 칭찬에 기쁜 듯 님프는 계속해서 그녀의 입에 산딸기를 집어넣었다. 괜찮다며 달래도 그녀는 고집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씹는 것보다 들어오는 양이 더 많았다.
“자, 잠깐…….”
님프는 그저 입이 열리면 일개미처럼 하나씩 바지런히 그녀의 앞으로 갖고 왔다. 잔뜩 기대하는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니, 거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에이미가 돌아오기 전에 다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구니에 걸터앉은 닉스는 턱을 괴며 물었다.
[웬일로 산까지 갔대? 겁도 많은 애가.]
건성으로 물은 질문에 님프가 허공에서 빙글, 한 바퀴 돌았다. 웃는 소리가 맑았다. 잔뜩 신이 난 모양새였다. 입안에 가득 산딸기를 머금은 채 우물거리던 노움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곧 꿀꺽,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긴 그가 코를 찡긋하며 순진하게 웃었다.
[님프가 좋은 걸 찾았대.]
닉스는 입에 묻은 과즙을 닦아내며 반문했다.
[제록 나무를 찾았다는 말 아니야?]
님프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제록 나무는 에스피디 제국에서도 일부 지역에만 나는 나무였다. 단단하고 촘촘한 재질에 가공하면 드래곤이 트림을 해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의 내구성을 자랑했다. 다만 기르는 조건이 까탈스러웠다. 여태 많은 이들이 제록 나무를 기르는 데 도전했지만, 아직까지 성공한 이가 없었다. 간간이 야생에서 나는 것을 벌목하는 게 제록 나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의 전부였다. 신기하게도 제록 나무의 묘목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발견되는 나무는 전부 성목인 탓이었다. 농담처럼 정령이 다 큰 제록 나무를 심어두고 가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엘로니아는 침착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만약 진짜 정령이 심는다면 정령사를 입증하는 데 제법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정갈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혹시 정령이 심기도 해?”
[그걸 우리가 왜?]
닉스의 답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즉답. 그럼 그렇지. 닉스의 성격상 시켜도 안 할 게 눈에 훤했다.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아쉬울 게 없었다. 닉스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보아하니 묘목인 모양이던데. 양도 꽤 되는 것 같고.]
“제록 나무도 묘목이 있긴 해?”
평범한 호기심에서 기인한 질문에 노움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힘차게 말했다.
[묘목일 때는 흔한 나무랑 똑같아! 다 자라야 제록 나무 특유의 결이 드러나서 인간은 모를 거야.]
그제야 여태 왜 그 누구도 제록 나무의 묘목을 찾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곯은 목검을 구분할 때부터 느꼈으나, 정령들은 본질을 쉽게 간파하는 듯했다. 그녀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닉스가 대뜸 물었다.
[제록 나무는 안 키워?]
“왜 내가 당연히 키울 거라고 생각해?”
우선 아닌 척 고개를 치켜들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러나 닉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리아티코 때는 적극적이길래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지.]
“그때는 그냥 찾기만 하면 되는 거였고.”
하고 싶었다. 제록 나무면 뭘 해도 손해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건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키울 만한 토양도, 남의 땅을 빌릴 만한 자금도 없었다. 더군다나 묘목이면 성목이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터였다. 엘로니아는 잠시 고민했다.
‘제록 나무를 지원하는 대가로 제안은 해볼 만하겠는데.’
워낙 구하기 힘든 묘목이니 투자금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묘목의 양이 중요했다.
“대충 묘목이 얼마나 돼?”
[멧돼지가 그 주변을 달리는 데 20분이 걸렸대.]
노움은 해맑게 답했다.
‘그게 얼마라는 거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꽤 되는 걸 보면 한두 그루는 아닌 모양이었다. 애매한 계산에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엄청 많은 거야. 아마도 종일 목검을 만들고 남을 정도!]
“그렇게나 많이? 다 무사히 자랄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그가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엘로니아는 듬직한 정령의 모습에 감격했다. 저 작은 체구가 이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님프. 제록 나무가 있던 곳을 알려줄 수 있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펜을 들고 끼적이더니 곧 약도를 그려왔다. 옆에는 흔하디흔한 외형의 제록 나무 묘목을 애매한 그림으로 묘사까지 해 두었다. 삐뚤빼뚤하기는 했으나,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똑똑. 때마침 시기적절하게 에이미가 돌아왔다.
“마님, 산딸기와 어울리는 홍차가……. 벌써 반이나 드셨어요?”
놀라 묻는 말에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바구니를 뒤로 숨겼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그녀는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녀에게 넌지시 화두를 열었다.
“에이미. 내가 나무를 좀 구하고 싶은데.”
“갑자기 나무요?”
“오늘 연무장에서 목검이 부러지는 걸 보니까, 더 좋은 목재가 없을까 해서.”
때마침 적절한 핑계까지 덧붙이니 그녀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카르벨이 원한다면 나중에 비싸게 팔 의향은 있었다. 그건 조금 먼 이야기겠지만.
“아직 새로운 상단이 정해진 것 같지는 않던데……. 따로 알아볼까요?”
의욕적으로 되묻는 그녀에게 엘로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려주는 곳에서 나무를 가져왔으면 해. 공작령 내에 있는 곳이라 어렵지 않을 거야.”
님프가 적어준 약도를 건네며 추가로 부탁을 덧붙였다.
“그리고 투자를 받을 상단을 지원받고 싶어.”
에이미는 약도에 그려진 평범한 묘목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길가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묘목이었다. 굳이 공작령 깊은 산까지 들어가서 옮겨야 할 만큼 중요한 나무란 말인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에이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저에서 투자한다면 꽤 많이 몰릴 거예요. 조건은 어떻게 공고할까요?”
“투자는 나무로 대신할 거야.”
“……예?”
“묘목은 내가 지원해. 그러니 좋은 땅과 그걸 기를 인력만 있으면 돼.”
“혹시 묘목이 무엇인지 물어도 될까요?”
“제록 나무야.”
에이미는 잠시 솔직히 말하는 게 맞는지 망설였다. 상단에게 땅과 인력은 곧 재산이었다. 그런 일부를 사용하는데 투자금도 아니고 나무. 그것도 묘목이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제록 나무라니. 심지어 다 큰 성목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걸까. 망설이던 에이미는 굳건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마님…….”
“에이미가 걱정하는 건 알아. 그것까지 염두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엘로니아의 확고한 의견에 홀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놀랍다고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해야 할지. 고작 반나절도 안 지난 시각이었으나, 엘로니아에게 오는 소식은 잠잠했다. 묘목이야 그렇다 쳐도, 직접 나서서 재배해보겠다는 연락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제록 나무인데. 정말 한 사람도 없단 말이야?’
그럴 리 없었다. 적어도 한 군데는 당연히 연락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헤일튼가와 거래를 파기한 그 상단. 넓은 땅을 가졌고, 납품하던 나무가 그대로 오갈 곳 없이 붕 떠버린 곳. 제국에서 이만한 기사를 보유한 가문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헤일튼가는 기사들에게 성공의 증표와도 같은 곳이었다. 덕분에 다른 가문보다 그 수가 많다 보니, 그만한 물량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찾기 어려울 터였다. 거래 파기로 인해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땅도 있겠다, 그만한 목재를 납품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겠다. 왜 연락을 안 하지?’
엘로니아가 직접 연락을 넣어도 되었으나, 카르벨이 파기한 계약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더 좋은 조건의 상단이 있다면 고려해볼 생각도 있었으나, 그건 제안이 들어올 때 이야기였다. 엘로니아는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에이미. 정말 없어?”
“예…….”
“꼼꼼히 돌렸지?”
“그럼요. 제가 제도에 있는 괜찮다는 상단에는 다 알렸어요!”
엘로니아는 창문 너머를 가만히 응시했다. 딱히 어느 시점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아직 묘목도 안 왔기에 시간은 넉넉했다. 단지 그녀의 기대감이 시간을 더디게 만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상용화가 되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적어도 그녀가 진짜 정령사로 인정받기 전까지. 엘로니아는 언제인지 모를 그날을 기점으로 보고 있었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아늑한 저택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헤일튼 공작저처럼 너무 큰 건 싫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길이 닿을 정도였으면 했다. 귀여운 강아지도 한 마리 데려와야지. 무럭무럭 자라나는 미래 설계에 순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쁘십니까, 엘로니아.”
고개를 들자 커다란 손이 보였다. 익숙한 장갑을 낀 손에는 얄팍한 서류가 들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던 햇빛을 막은 원인이었다. 헤일튼 공작저에서 유일하게 불쑥 찾아올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공작님.”
“혹시 뭔가 잊으신 건 없으신가요, 레이디 엘로니아.”
능글맞은 목소리가 은근히 그녀를 골릴 준비를 하는 듯했다. 전날 가져간 보석을 말하는 걸까. 대놓고 살폈으나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좋아. 힌트를 주지. 어제 그대가 연무장까지 온 이유는?”
그제야 본 목적을 깨달은 엘로니아는 되레 본인이 놀란 듯 말을 이었다.
“그렇네요? 티타임 명단을 받으러 간 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