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님프의 선물.2021.02.11.
실수라고는 하나 이 또한 책임자인 상단주가 짊어져야 할 몫. 그들은 입이 있어도 닫아야만 했다. 그저 부상자가 없는 것에 안도할 수밖에.
“죄송합니다, 공작님.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꼼꼼히 확인하겠습니다.”
상단주 부부의 호소에도 카르벨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도 다친 이가 없었기에 파기로 끝내는 겁니다.”
친절한 미소를 곁들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얼굴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덩달아 엘로니아도 뻣뻣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노움은 부자연스러운 공기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대놓고 읽고 있었다.
[상단주가 꼼꼼한데? 농작지도 직접 일구고 수질도 꾸준히 관리하다니, 대단해!]
생각보다 괜찮은 곳인 모양이었다. 닉스도 지지 않고 말을 얹었다.
[흥, 조건은 좋네.]
퉁명스러운 반응이었으나, 평소 칭찬에 인색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노움은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런 땅은 찾기 힘들어. 님프가 좋아하겠다.]
닉스의 볼이 불퉁스럽게 씰룩였다. 저를 빼놓고 연무장에 갔다고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산딸기라도 심겠대?]
[그건 정령사랑 같이 먹을 거야. 닉스도 먹자!]
[왜 자연스럽게 정령사가 끼어 있는 거야? 언제부터 나 없이 협의가 된 거지?]
[닉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정령사는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으니까!]
그는 의기양양하게 소유권을 주장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전혀 들은 바 없는 일이었다. 처음 듣는 소리인 양 눈을 깜빡이는 노움을 보고 있자니, 그저 닉스의 심술궂은 농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노움은 익숙한 듯 확인서를 보며 답했다.
[하지만 님프가 정령사를 돕고 싶대.]
[걔 또 멧돼지 만나서 울고 있는 거 아냐?]
[아니야. 이제 멧돼지랑 친해졌다고 했어.]
[멧돼지랑 친해져서 뭐 하게.]
삭막한 접객실의 테이블 위에서 투덕거리는 그들은 소란스러웠다. 엘로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얹을 것 같았다. 닉스와 노움의 대화를 제외하면, 실상 접객실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을 ‘님프가 산딸기를 따다 멧돼지를 만났을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던 두 정령은 결론이 났는지 엘로니아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닉스는 부루퉁하게 투정을 부렸다.
[아니, 정령사는 내가 먼저 찾았는데 왜 네가 붙어 있어?]
그는 쌩하니 날아와 자신의 자리라는 사실을 알리듯 그녀의 어깨 위에 매달렸다. 이러한 소란을 모르는 카르벨은 그저 겉치레처럼 입을 열었다.
“침수는 안타깝게 생각하나, 거래는 여기서 끝을 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각하.”
“수고하셨습니다.”
상단주 부부는 예상외로 쉽게 물러섰다. 읍소로 결정이 바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상단주 부부가 서류를 도로 가져가자, 노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포르르 날아올라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곧 기다렸다는 듯이 기억이 물밀 듯 들어왔다. 깔끔한 상단과 차곡차곡 정리된 문서와 물건들. 그 수를 생각하면 바지런해야 청결을 유지할 법한 곳. 그런 곳에서 상단주 부부는 헤일튼가의 시종에게 소식을 듣고 있었다. 말이 길어질 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들은 시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고용인을 찾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목재가 곯았다니?”
동굴 속에서 듣는 것처럼 상단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분명 침수된 것들을 분리했는데. 어쩌다 이게 섞인 게야?”
“죄송합니다. 마지막 검수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나 봐요.”
고용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여러 차례 상단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상단주는 곤란한 듯 투박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대로 신뢰 하나만을 내세워서 올라온 상단이야. 관리하기 힘들기에 규모도 늘리지 않고 믿고 맡긴 분들과 거래를 해 왔는데, 이번 일로 전부 무너지게 생겼다.”
“죄송합니다.”
“한 번도 이런 실수를 안 하던 애가 하필 왜…….”
남자는 그저 죄인처럼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상단주는 단호히 말했다.
“해고다.”
엄하게 끊어낸 것과 달리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네 어머니가 아픈 것도 알고, 오래 일한 정이 있으니 배상 책임은 묻지 않으마.”
“……그간 감사했습니다.”
“됐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가 확인할 것을.”
건성으로 손을 흔드는 상단주를 마지막으로 기억은 서서히 머릿속에서 멀어져갔다.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이는 카르벨이었다. 상단주가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거래가 파기되었으니 떠난 것이었다. 거래는 거래. 손해를 입힌 거래를 지속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를 알기에 엘로니아는 그저 자랑스럽게 웃는 노움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줄 뿐이었다. 조용해진 접객실에서 카르벨은 무심히 말했다.
“다른 거래처를 알아봐.”
“예, 각하.”
그레이터의 답에도 카르벨의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고작 일정이 틀어졌다고 심기가 불편할 만큼 그는 미성숙하지 않았다. 거래처가 바뀌는 일도 그리 신경 쓸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파편이 튀던 그 순간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는 안전장치 하나 없는 연무장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참에 연무장 시설을 정비해야겠군.’
엘로니아가 곯은 목검을 골라내어주는 덕에 훈련은 계속될 터였다. 어차피 그녀가 아니었으면 멈췄을 훈련. 정비를 이유로 사용이 조금 불편해진다 해도 상관없을 듯싶었다. *** 저녁 늦은 시간. 엘로니아의 방으로 하나의 선물이 도착했다.
“마님. 황실에서 선물이 도착했나 봐요!”
에이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제가 제국 깃발이 꽂힌 마차가 들어오는 걸 똑똑히 봤어요!”
“이 밤에 그게 보여……?”
“그럼요. 제 눈이 얼마나 좋은데요.”
그녀를 따라 어둠이 내린 바깥을 보았으나, 간간이 달빛이 비치는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마차 형상만이 간신히 구분될 정도였다. 에이미는 확실하게 엘로니아의 앞으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방문 앞을 서성였다. 문 너머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던 그녀는 혹여 복도에 들릴까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이맘때 황궁에서 올 거라고는 선물밖에 없거든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연회 전에 보았던 선물 명단에서 황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스피디 제국에서 헤일튼 공작가를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물론이요, 가장 많은 지원과 희생을 아끼지 않은 가문이 바로 헤일튼 공작가였다. 그만큼 황궁은 물론, 제도민들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드높았다.
‘다들 그 헤일튼 공작이 가짜 정령사를 찾았다는 걸 알까 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실에서 엘로니아 데브니 님의 앞으로 보낸 선물입니다.”
문 앞에서 대놓고 기다렸던 에이미는 일부러 심호흡을 하며 한 박자 천천히 열어주었다. 황실 대리로 나온 멀끔하게 생긴 황실 보좌관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함께 갖고 온 서신을 꺼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보좌관은 입을 열었다.
“전언입니다. 정령사의 탄생과 더불어 혼인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어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마차가 왔다길래 무언가 대단한 것이 온 줄 알았더니. 정작 황실 보좌관이 꺼낸 것은 자그맣고 고풍스러운 상자였다. 그는 펼쳤던 서신을 다시 처음처럼 접었다. 그러고는 상자와 함께 서신을 에이미에게 건네며 말을 덧붙였다.
“-라고 아셀리 에스피디 황녀님께서 전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에이미는 어색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화, 황녀님께서 직접 보내주시다니. 영광스러워라!”
표정과 행동까지 뻣뻣하게 굳어 툭 치면 삐거덕거리며 쓰러질 것 같았다. 처음 공작저에 왔을 적부터 그녀가 티가 날 정도로 피했던 주제였다.
“전하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엘로니아는 흔한 감사를 담은 서신을 건네며 말했다. 적당한 답변을 받은 황실 보좌관은 군말 없이 깔끔한 인사와 함께 돌아갔다. 탁,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에이미는 허둥지둥 선물을 들며 물었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선물인데 한 번은 열어봐야지.”
“그, 그러시겠어요?”
일 하나만큼은 빠릿빠릿하게 잘하던 그녀가 아셀리에 관한 일만 나오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가만히 에이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엘로니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셀리 전하가 이전에 공작님이랑 혼담이 오고 간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순간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고 계셨어요?”
“응.”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미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휴. 저는 또 모르시는 줄 알고! 처음 저택에 오셨을 때 모르는 눈치셔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지. 최근에서야 들었다고 하면 더 불편해할 모습이 눈앞에 훤해 엘로니아는 말을 아꼈다. 에이미는 한층 편안해진 모습으로 선물을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걸 제가 알려드리기 어려웠어요.”
그녀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생각보다 많이들 알고 있는 소문이었나 보다. 엘로니아야 공작가와 먼 삶을 살아왔던 탓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에이미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핀 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는 워낙 높으신 분이시고, 공작저의 내부 사정은 잘 모르시는 분이시니까요. 혹시나 나중에 괜히 잘못되면…….”
에이미는 곤란한 듯 입을 오물거렸다. 아무래도 황족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덧붙이기 어려워 보였다. 단순히 생각하면 아셀리는 차기 황제로 확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와의 혼인은 국서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아셀리가 아니던가. 헤일튼 가문의 출신인 황후에 대한 예우였을까.
‘황실에서 보아하니 그런 문제로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던데.’
그렇다고 카르벨이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우길 성격도 아니었다. 일단 그녀가 산증인이었다. 에이미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셀리 전하가 혼담을 보내니 다른 가문에서도 눈치를 보고. 이대로 공작님 혼삿길이 막히나 했어요.”
“그렇게 혼인을 빨리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아무래도 후계자가 없으시잖아요!”
엘로니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