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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 (20/234)

20.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2021.02.07.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앞을 막아선 카르벨의 등이 제일 먼저 보였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날 선 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웅, 공기와 만나 잘 벼린 날이 울었다. 안 그래도 서늘한 연무장의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변했다. 카르벨의 옆에 바짝 붙어선 데드의 등도 눈에 들어왔다. 파편이 튈 때, 함께 막아선 모양이었다.

“베온. 시더.”

카르벨의 부름에 연무장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묵직하게 울렸다. 처음 듣는 매서운 말투였다. 그의 부름에 앞서 대련을 하던 두 기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앞에 두고 카르벨은 차갑게 말했다.

“검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기사는 헤일튼가에 필요 없다.”

“죄송합니다, 각하.”

목검이 부러진 것은 의도한 일이 아닐 텐데도 꾸중을 받은 기사들은 아무도 변명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검은 검이 아니다, 이건가.”

“아닙니다.”

엘로니아는 괜히 침을 삼키는 데도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괜히 크게 느껴졌다. 그만큼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삼엄한 이 분위기가 어색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누군가가 어디서 파편을 주워 왔는지, 데드에게 건넸다. 카르벨의 첨예한 검날에 베인 듯한 파편의 단면이 깔끔하게 잘려져 있었다. 데드는 단면의 속을 확인하고는 옆에 있던 그에게 내밀었다.

“내부가 곯아 썩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구별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 한들 부주의를 지울 수는 없다. 엘로니아까지 있는 자리였다. 부상자가 나왔어도 그리 말할 수 있는가.”

차갑게 잘라내는 말에 기사 둘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의외로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말투에 엘로니아는 생경한 듯 눈을 깜빡였다.

‘펠런 백작 부인과 티타임을 가기도 전에 다치면 곤란해서 그런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의 널따란 등을 바라봤다. 원래 그녀보다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사람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등이 유난히 넓게 느껴졌다. 이를 처음부터 지켜본 노움은 님프와 사이좋게 앉아 밝은 목소리로 그들을 가리켰다.

[와, 살벌하다. 님프가 말한 무시무시한 인간이 저 사람이구나?]

그의 질문에 님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움은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돌려 엘로니아에게 말했다.

[진짜 감자 안 먹을 거야? 싸움 구경에는 최고인데!]

이쯤 되니 정령이 추천하는 감자 맛이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먹다 목이 막힐 듯한 분위기에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자를 먹을 만큼 그녀의 간은 크지 못했다. 거절을 알아들었는지 노움은 더 권유하지 않았다. 카르벨은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솎아내라.”

“예?”

“전부 파기해도 좋으니 솎아내.”

그 지시를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데드는 넓은 연무장 끝까지 닿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목검을 전량 수거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직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예비용까지 끌려 나왔다. 수북하게 쌓인 목검의 양은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겉보기에는 전부 천편일률적으로 같아 보였다. 곤란한 듯이 힐끔거리는 데드를 두고 카르벨이 다가왔다. 그는 덤덤하게 엘로니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연무장은 기사들이 많아 위험해. 앞으로는 내가 갈 터이니 파올을 통해 부르는 게 좋겠어.”

갑작스러운 목검 수거에 당황한 기사들과 달리 그는 침착했다. 엘로니아는 그의 뒤를 훔쳐보며 물었다.

“목검은 전부 버릴 생각이세요?”

“믿을 수 없으니 그래야지.”

그 많은 것 중 단 하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모두를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기사들도 군말 없이 명을 따르고 있었다. 님프와 나란히 짧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기사들을 훑던 노움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겉으로 보고 모를 텐데.]

노움이 가리킨 방향에는 숨을 죽인 기사들이 차례차례 목검을 수거하고 있었다. 외관으로는 크게 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움은 목검이 쌓일 때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건 아니야. 그다음은 썩은 거고.]

살벌한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목소리였다. 모든 목검이 회수되자, 연무장에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위협적으로 날아오던 파편을 떠올렸다. 확실히 거친 움직임이 많은 연무장에서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목검은 위험도가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량 폐기는 다른 피해를 원천 봉쇄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곯은 나무를 골라낼 수 없다면 말이다. 노움이 가리킨 기사 역시 들고 있던 목검을 내려놓았다. 엘로니아는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목검, 썩었을 거예요.”

목검을 내려놓던 기사가 하던 행동을 멈췄다. 동시에 기사의 시선이 카르벨에게 닿았다.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카르벨은 입을 열었다.

“엘로니아.”

질타하는 투는 아니었다. 나직한 음성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혹여 그녀가 잘못 짚기라도 한다면. 가문의 기사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을 게 뻔했다. 정령사라고 공표까지 된 마당에 흠집이 잡혀서 좋을 게 없었다. 특히 가짜 정령사라면 더더욱. 하지만 노움이 가리켰기에 쓸모없는 가정이었다. 엘로니아는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나무를 좀 볼 줄 알거든요.”

옆에서 듣던 데드가 무언가 깨달은 듯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부러지기 직전 마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죠.”

카르벨의 가늘어진 시선이 잠시 그녀를 훑었다. 허락의 의미로 그가 가벼이 한 손을 들었다. 데드는 곧장 기사의 목검을 지렛대 삼아 발로 밟았다. 몇 번을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밟아대자, 목검은 부러지며 속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속이 곯아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에 노움은 힘껏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맞췄다!]

표정에서부터 뿌듯함이 보였다. 그 뒤는 어렵지 않았다. 노움이 가리키는 족족 엘로니아가 골라내면, 어김없이 속은 곯아 있었다. 하나를 확인할 때면 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과 박수를 보냈다. 목검을 전부 확인한 데드는 놀란 듯 되물었다.

“전부 속이 썩어 있네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영업 비밀이에요.”

옆에서 노움이 손을 번쩍 들며 자신의 주장을 했으나, 엘로니아는 검지로 쉿, 자신의 입을 막았다. 노움과 님프는 그녀를 따라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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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이라고 해서인지 아무도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검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이제부터 관심을 가져 보려고요.”

비록 직접 사용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엘로니아는 부끄러운 척 작게 몸을 꼬며 말을 덧붙였다.

“카르벨도 검을 잡는데, 저도 신경을 써야죠.”

아주 잠깐. 카르벨의 등이 굳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답이 나오기 무섭게 데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드문드문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주, 주군께서 가르쳐 주시겠답니까?”

이에 카르벨이 즉답했다.

“당사자는 처음 듣는 소리인데.”

배울 생각은 없었으나 데드의 반응이 놀라웠다. 호기심이 솟아난 엘로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왜요? 카르벨에게 배우면 안 돼요?”

“아뇨! 아주 훌륭하시죠.”

말과 달리 데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지옥의 훈련에서 살아 돌아온 이의 모습이었다. 대체 얼마나 심하면 데드의 떨리는 목소리에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카르벨이 제국에선 검으로 따라올 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예, 맞습니다. 따라올 자가 없죠! 아무도 못 따라갑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내뱉은 데드가 카르벨의 눈치를 보았다. 어느새 희미한 미소를 띤 그가 상냥하게 데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에 데드는 빠르게 화제를 바꾸어 보고를 올렸다.

“최, 최근 목검 제작에 사용되는 나무를 기르는 지역에 큰 침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탓에 상태가 이러한가 보네요.”

특유의 힘찬 어조가 내용을 가벼이 들리게 했다. 하지만 카르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상단주는.”

평범한 질문에 평이한 미소가 뒤따랐다. 다만 상황이 평범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기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거래처가 바뀌겠군.’

안 그래도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고용인들조차도 한 번의 실수에 저택을 떠난 이가 셀 수 없었다. 이번 상단 역시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으면서도 데드는 물었다.

“전대 공작님 대부터 거래를 한 상단이 아닙니까.”

“그래서.”

느리게 그를 응시하는 시선이 묘한 압박감을 불러일으켰다. 친절한 되물음에 위기감을 느낀 데드는 바짝 몸을 곧추세우며 힘차게 답했다.

“지금 부르겠습니다!”

  *** 상단주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 부부였다.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라는데, 그 긴 세월 동안 헤일튼 공작가와 꾸준히 거래를 해 온 곳이라고 했다.

‘엄청 유명한 상단일 줄 알았는데…….’

제도에서 익히 들어온 손에 꼽히는 곳은 아니었다. 꾸준히 장기적인 거래처가 많아 내실이 튼튼한 곳이었다. 상단주 부부는 이미 다 들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노움은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안녕!]

아무도 볼 리가 없으니 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닉스는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 이상한 놈을 보는 듯이 말했다.

[얘 말고는 아무도 못 보는 데 뭐 해?]

[혹시나 해서!]

노움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카르벨의 앞에서도 손을 번쩍 들었다. 엘로니아는 턱에 힘을 주며 눈짓으로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노움은 아쉽다는 듯 쭐레쭐레 엘로니아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님프를 눈동자만 굴려 찾았다. 이를 알아본 노움이 선뜻 알려주었다.

[님프는 산딸기 따러 갔어.]

‘갑자기?’

[정령사가 감자는 싫다길래. 산딸기는 좋아해?]

엘로니아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티를 낼 수 없었다. 접객실에서는 카르벨과 그녀 그리고 상단주 부부만이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상단주 부부가 내놓은 검수 확인 서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카르벨이었다.

“검수 확인한 담당은.”

“오래 일한 고용인이 실수한 모양입니다. 확인하자마자 해고했습니다.”

그들은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검토 확인이 적힌 서류에 고개를 박았다. 오래 일한 탓에 너무 믿었던 게 문제였다. 여태 실수 한번 없던 아이였기에 더 그랬다. 침수된 목재는 대부분 폐기했다. 그중 일부는 싼값에 다른 곳으로 팔려 갈 예정이었다. 분명히 헤일튼 공작가의 목검으로 가공될 것들은 따로 엄선해서 골라뒀거늘. 어쩌다 뒤섞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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