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소개를 받았다2021.02.04.
방으로 돌아온 엘로니아는 티타임에 참가하겠다는 답신을 간략하게 써 내려갔다. 에이미에게 전달을 부탁하며 서신을 건네던 그녀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외출하기 전에 뭔가 놓고 왔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은 느낌이…….’
그 모습이 심각해 보였는지, 에이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서신……. 전하지 말까요?”
“왜?”
“표정이 누군가가 물건을 가져갔다는데, 뭘 가져갔는지 모르시는 얼굴이라서요.”
꽤 구체적인 답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카르벨을 찾아갔던 본 목적을 깨달았다.
“아, 맞다!”
명단! 간 김에 명단을 받아오려고 했거늘. 카르벨이 아셀리와 혼담이 오고 갔다는 사실에 놀라 그냥 나오고야 말았다. 그녀의 탄식에 에이미가 친절히 되물었다.
“공작님 집무실에 뭐 놓고 오셨나 봐요.”
“와, 귀신같네. 부업으로 점이라도 보는 거야?”
“아뇨. 나가시기 전에 저보고 마차에 뭐 없었냐고 물으셨잖아요.”
에이미는 똑 부러지게 답했다. 아, 그렇구나. 멋쩍게 몸을 일으키는 엘로니아를 두고 그녀가 말했다.
“서신 붙이는 김에 받아올까요?”
“아니야. 내가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아무래도 티타임 명단이다 보니 누군가의 손에 맡기는 게 영 불편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정령사 역할을 위해 보는 명단이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허락받고 구한 명단도 아닐 테고 말이지.’
그냥 직접 움직이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무실에서 나올 때 응원이나 하지 말걸.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나 봐.’
돌아가면 또 무어라 놀릴지 뻔히 보이는 듯해 엘로니아는 미적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도착한 집무실에는 고민한 것이 무색하리만큼 아무도 없었다. 대신 운이 좋게도 근처를 지나가던 집사장 파올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양 묻기도 전에 엘로니아를 보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는 연무장에 계십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요?”
“원래 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연무장에 계셨습니다.”
“많이 바쁜가요? 실수로 놓고 온 게 있어서요.”
“시간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있다는 뜻인 거죠?”
“주인님의 의사에 달린 일이라, 제가 답을 드리기 매우 난해한 부분입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답이 나오는 반응속도가 남들과 달리 매우 빨랐다. 말도 워낙 빠른 터라 자칫하면 발음이 뭉개질 수도 있는데 희한하게도 놓치는 음 하나 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묘하게 약장수의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파올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연무장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면 주인님을 불러 드릴까요?”
불러 달라고 하려던 찰나. 엘로니아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지. 매번 내 수업 중간에 찾아온 건 카르벨이었잖아?’
수업 중간에 난입 아닌 난입으로 그동안 얼마나 곤혹스러웠던가! 지금. 그 반대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기사들 앞에서 위엄 좀 잃어보라지.’
엘로니아는 사악한 웃음을 삼키며 비장하게 답했다.
“연무장으로 가고 싶어요. 꼭.”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마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파올은 지체 없이 곧장 안내했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엘로니아는 가벼운 걸음을 빨리했다. 1층에 다다르자 복도의 창문 너머로 하나둘 기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혹가다 보초를 서는 이를 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훈련을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 기사들 틈에서도 카르벨은 한눈에 들어왔다. 매번 미소로 응대하던 모습과 달리 진중한 얼굴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흐트러짐 없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총사령관이었지, 참.’
직접 검을 잡는 모습을 볼 일이 거의 없었던지라 신기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파올이 말을 덧붙였다.
“주인님은 아침 6시 30분에 기상을 하시고, 7시 30분부터 간단한 업무를 보십니다.”
“……네?”
“9시부터 12시까지는 연무장에 계시고요.”
갑작스러운 일정 안내에 얼떨떨하게 파올의 뒤통수를 응시하자, 그는 뚝심 있게 말을 이어갔다.
“주인님 일정입니다.”
“아, 예…….”
엘로니아는 주입식 일정에 어색한 답을 건넸다. 하지만 파올은 궁금하지 않은 일정을 줄줄이 설명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가며 걸은 지 얼마간. 거대한 저택을 돌아 연무장에 다다르자 특유의 열기가 느껴졌다. 엘로니아가 나타나자, 가장 외곽에 있던 기사들 중 일부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혹시 예비 마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엘로니아를 대신해 파올이 답을 건넸다.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에 일순간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아주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 고하지도 않았는데 적갈색의 머리를 한 남자 하나가 무리에서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는 오자마자 허리를 숙여 큰 소리를 인사를 건넸다.
“부단장 데드 로번. 예비 마님께 인사드립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접히는 허리에 일순간 연무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듯한 덩치와 달리 얼굴은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처음 보는데도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글서글한 면이 있었다. 데드는 허리를 90도로 꺾은 채 고개만 빼꼼히 들어 물었다.
“연무장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답을 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는 다소 심각한 얼굴로 신중하게 물었다.
“혹시 경비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아니에요! 카르벨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잠시 들렀어요.”
다급하게 손을 휘젓는 그녀를 본 데드의 안색이 환해졌다.
“아, 주군을요!”
데드가 고개를 돌려 목검을 든 한 기사를 짚었다.
“주군을 모셔와.”
“예, 부단장님!”
과하게 각이 잡힌 답과 함께 기사는 고개가 휘청일 정도로 꾸벅 인사를 한 뒤,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파올이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지시했다.
“마님을 이리 세워두시면 안 되죠, 데드 경.”
“아, 그렇죠. 맞습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연무장의 특성상, 탁 트인 공간에 그늘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바삐 움직였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투박한 의자는 군데군데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데드는 그곳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그는 옆에 있던 기사 하나의 등을 툭, 쳐 눈치를 주며 엘로니아를 향해 말했다.
“마땅한 의자가 없어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연무장에 있는 의자는 제가 쓰면 안 되는 건가요?”
“아, 아뇨.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비 마님을 이런 누추한 곳에…….”
“괜찮아요.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인데요.”
오히려 그녀가 방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하던 일을 멈춘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엘로니아가 구석에 있던 벤치로 향하자 그는 부랴부랴 품에서 구깃구깃한 손수건을 꺼내 의자에 깔았다. 까닥, 고갯짓으로 감사를 전하고 착석하자 기사들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불편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예, 감사합니다.”
꾸벅 일제히 고개를 숙인 기사들은 천천히 들고 있던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엘로니아는 옆에 있던 파올에게 조용히 물었다.
“파올. 미안한데요, 혹시 공작 부인은 연무장에 오면 안 된다. 뭐 이런 규칙이 있는 건 아니죠?”
“예. 없습니다.”
“확실한 거죠?”
“그럼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마님.”
파올은 그저 꼿꼿하게 서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뿐이었다. 씨익, 입매만 늘리는 미소가 어째 더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미심쩍은 눈길로 생소한 연무장을 훑어보았다. 방금까지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훈련의 열기로 지워졌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그녀를 응시하는 데드의 시선만 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선에 못 이긴 엘로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드 경. 혹시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누가 봐도 반대되는 말을 외치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무슨 말인데 그래요?”
머뭇거리던 데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정말……. 주군을 꿀벌이라 부르십니까?”
쿨럭. 엘로니아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기침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아니, 그런 것까지 말했단 말이야? 엘로니아는 진동하듯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장난이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정말 딱 한 번 불렀어요!”
“주군께서 농담을 받아주시다니.”
그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역시 연무가 끝나면 마님을 뵈러 가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카르벨이요?”
처음 듣는 소리에 되묻자 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무가 끝나시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더군요.”
어쩐지 그가 늘 오전 수업이 끝나면 찾아오더니. 생각해 보니 12시, 연무가 끝나는 시간과 그녀가 오전 수업을 마치는 시간이 엇비슷했다.
‘보나 마나 감시하러 온 거겠지.’
엘로니아는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이며 훈련하는 기사들을 건성으로 응시했다. 그녀가 주의 깊게 본다고 생각했는지, 데드는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목검이지만, 누가 쓰느냐에 따라 날붙이만큼 효과를 지닐 수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목검으로도 사람을 베어내시죠.”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굳이 카르벨이 아니더라도 연무장의 기사들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버석한 흙바닥이 밀리고, 딱딱한 목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을까.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의 눈앞에 불쑥 님프의 얼굴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흡, 숨을 삼킨 엘로니아는 놀라서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네!’
그러나 그녀와 달리 님프는 그저 방긋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웠다. 연무장에서 말을 할 수 없으니 엘로니아는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자 님프는 쑥스러운 듯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를 보라고?’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내리자, 자그마한 황토색의 아이가 그녀를 보며 힘차게 손을 들었다.
[안녕! 난 노움. 땅의 정령이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에 씩씩한 미소까지. 아무래도 님프가 데려온 모양이었다.
‘살다가 정령에게 소개도 받는구나.’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자, 노움이 고개를 기울이며 님프에게 말했다.
[님프. 너 잘못 안 거 아니야? 나 보이는 거 맞아? 답이 없는데?]
그의 말에 님프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드레스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엘로니아는 들었다는 의미로 빠르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러자 노움은 신기한 듯 눈을 빛냈다.
[와, 진짜잖아? 날 보는 사람은 1천 년 만에 처음이야!]
그는 신이 난 듯 눈을 빛냈다. 노움은 코를 가볍게 긁적이며 물었다.
[감자 먹을래?]
엘로니아는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노움은 포르르, 날아올라 그녀의 의자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감자 싫어? 그럼 고구마?]
엘로니아는 꿋꿋하게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무에 집중하는 척하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노움은 답이 없자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응시했다. 연무장 기사들을 보는 그의 옆으로 님프가 따라 앉았다.
[오, 그래?]
무어라 속닥인 것인지, 답을 하던 노움이 그녀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정령사. 피하는 게 좋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엘로니아가 힐끔, 옆에 앉은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노움이 손가락으로 근처에서 대련하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님프가 쟤네 목검이 썩었다더라. 부러지면 크게 다칠 수 있을 거래.]
정작 노움이 짚은 기사들의 검은 외관상 다른 목검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조금 전, 데드가 목검에 대해 설명했던 말이 떠올랐다.
‘목검이라도 실력이 있으면 날붙이랑 비슷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엘로니아는 불안한 시선으로 대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간 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본능적으로 외쳤다.
“위험해요!”
그러나 휘두르던 검을 멈추기란 쉽지 않았다. 우지끈. 투박한 파열음과 동시에 목검이 부러졌다. 튕겨져 나온 파편은 그대로 엘로니아를 향해 날아왔다. 놀란 그녀가 피하려고 몸을 움츠리던 찰나. 탕. 투박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운이 좋게도 잘 피했는지 아픈 곳은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 어딘가에 떨어져야 할 파편 조각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카르벨의 음성이 앞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나를 찾았다 하더니. 이런 식으로 놀라게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