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랑스러움과 격정의 차이점2021.01.31.
그의 품을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
그녀가 깨달았을 때는 카르벨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보는 걸 원하는 건가?”
그는 태연하게 엘로니아의 시야에 서류를 보여주며 넘겼다. 당황한 그녀는 바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사, 사고예요. 제가 앉은 거 아니에요. 아시겠죠?”
민망함에 엘로니아는 후다닥,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더 일어났다가는 그녀의 균형감각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드레스를 대충 손봤다. 그런 그녀와 달리 카르벨은 너무 평온했다. 이대로 그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녀의 꿈이었다는 듯이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저주받은 카르벨의 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쓰러져도 된다고 했더니, 이렇게 연습을 하는군.”
“실수였다니까요!”
“괜찮아, 아주 훌륭했으니까.”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카르벨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만 앞으로 아픈 척 쓰러질 때는 조금 더 효과적으로 힘을 빼야 그럴싸하겠어.”
이미 엘로니아가 한 말을 들어놓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도 오늘 그 덕분에 연회에서 제법 정령사라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지 않았던가. 돈과 안정적인 노후. 희망찬 미래! 그렇게 자신을 다잡은 엘로니아는 침착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명단 주세요.”
카르벨은 아무런 말 없이 서류를 넘겼다. 밉지 않게 그를 노려보았으나, 뻔뻔한 그에게 먹힐 리 없었다. 그는 명단을 보는 엘로니아를 빙글거리는 미소로 한참을 지켜봤다. 처음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전부 그녀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엘로니아는 작게 혀를 차며 명단을 눈에 담다가, 온종일 바짝 긴장했던 탓인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고요한 마차 안은 어느새 잠든 그녀의 일정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카르벨은 그녀의 손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명단을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마차가 자잘하게 움직일 때면 엘로니아의 머리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으음…….”
작은 잠꼬대와 함께 엘로니아의 머리가 기울었다. 좌우로 정처 없이 흔들리던 머리는 결국 그의 어깨에 툭,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시원한 향이 카르벨의 머리를 가볍게 만들었다. 아주 잠깐 휘청이던 그녀를 잡아주었을 뿐인데, 그 찰나에도 연회 내내 붙어 다니던 리아티코의 진한 향이 단숨에 날아갔다. 카르벨은 힐끔 고개를 돌려 어깨에 기댄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탁 트인 듯한 시원한 느낌이 엘로니아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마차 안을 채워가고 있었다. 덕분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던 두통도 멎은 지 오래였다.
‘신기하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편안해질 수가 있다니.’
카르벨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그녀의 볼을 손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 * * 엘로니아는 바깥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천장에 새겨진 이상한 무늬를 노려보았다. 몸이 편안한 것을 보아하니, 연회 때 입은 드레스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녀는 누운 채로 조용히 읊조렸다.
“에이미.”
“예, 마님!”
주변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지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이불을 덮은 채 물었다.
“어제 내가 연회에서 어떻게 돌아왔지?”
“돌아오시는 마차에서 잠이 드시는 바람에……. 불편하실 듯하여 환복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고마워.”
어쩐지 기억에 없더라. 엘로니아는 끙, 몸을 일으켰다. 에이미는 조용히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조찬부터 올릴까요, 아니면 서신이 하나 도착했던데 먼저 전해드릴까요?”
“서신?”
“펠런 백작 부인께서 보내셨습니다.”
티타임 초대를 여러 번 언급하더니, 돌아가자마자 초대장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래. 돈은 벌어야지. 그녀는 어제 춤으로 인해 삭신이 쑤시는 몸을 쭈욱 폈다. 어제 보다 만 명단이 떠올랐다. 눈에 제대로 들어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마차에 혹시 내가 보던 서류는 없었니?”
“서류요? 없었는데요.”
에이미는 골똘하게 다시 한번 생각하고는 확신에 차 고개를 저었다.
‘카르벨이 다시 가져갔나.’
오늘만큼은 그 얼굴을 안 보고 살 수 있나 했더니. 엘로니아는 포근했던 침대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그녀는 단걸음에 그의 집무실 앞에 섰다. 그가 두고 갔던 물방울 사파이어 목걸이가 든 케이스까지 야무지게 챙겨오기까지 했다. 집사장이 똑똑, 문을 두드리고 그녀가 왔다는 사실을 고했다. 그러자 짧은 텀을 두고 그의 음성이 넘어왔다.
“들어와.”
엘로니아는 애써 어제 마차에서 있던 일을 상기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매번 그가 찾아오기만 했지, 직접 이렇게 간 적은 처음이었다. 헤일튼 공작저가 워낙 넓기도 했거니와, 그녀의 행동반경이 크지 않은 탓에 집무실은 처음이었다. 거대한 고동빛 육중한 문이 소리조차 없이 열렸다.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각오는 물거품이 되었다.
“일찍이 왔군.”
“벌써 정오가 지나가는데, 일찍이라고 하기는 그렇지 않아요?”
“약혼녀가 마차에서 덮친 뒤, 잠드는 바람에 이쪽은 힘들었거든.”
덮치기는 누가 덮쳤다고! 보란 듯이 하는 말에 문을 닫고 나가려던 집사장 파올과 눈이 마주쳤다. 나이는 지긋했으나 묘하게 얍삽한 느낌을 주는 그는 깔끔하게 올린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슥, 넘긴 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변명할 시간도 없이 탁. 문이 닫혔다. 엘로니아는 황당한 얼굴로 닫힌 문을 응시하다 성큼성큼, 카르벨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죠?”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엘로니아의 상냥한 회유에도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싫은데.”
음……. 닉스랑 친해지면 제일 먼저 그의 영혼까지 전부 털어버리리라. 그러고는 입이 가장 가벼운 이들에게 전부 퍼트릴 거다. 어릴 때 발가벗은 초상화라도 있다면 폭죽에 매달아서라도 제도 창공에 띄워버리고 말 것이다. 최근 나름대로 닉스와 친해졌다고 생각하기에 그날이 멀지 않았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엘로니아는 현재 이길 수 없는 그와 타협할 심산으로 펠런 백작 부인이 보냈던 목걸이 케이스를 내밀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편히 보던 그가 익숙한 케이스에 자세를 바로 했다.
“필요 없다니까.”
“그럼 펠런 백작 부인이 보낸 티파티 초대장은 거절할까요?”
그녀는 책상 위에 케이스를 내려놓으며 슬쩍, 초대장을 들어 보였다. 서신 봉투에 적힌 펠런 백작의 가문 명을 보란 듯 그의 앞에서 흔들었다.
‘직접 물어보면서까지 가고 싶어 했는데, 정말 거절할 거야? 정말?’
약을 올리듯 힘껏 거만하게 목을 꼿꼿이 세웠다. 카르벨은 책상에 팔을 꼬아 기대며 답했다.
“그 표정 참 흥미로운데.”
“그것 봐요. 카르벨도 이러면 싫죠? 제가 매번 얼마나 인내심을 기르고 있는지 알면 수수료를 100%로 해도 모자랄 거예요.”
“꼭 저 목걸이를 돌려주고 싶은 그런 기분이야.”
“그게 왜 그렇게 돼요?”
이 사람은 반성이라던가, 자기 성찰이 전혀 없는 건가? 엘로니아는 정령을 처음 봤을 적과 같은 기분으로 그를 훑었다. 그러나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판매처의 소개장만 받아오면 돼. 그럼 그대가 바라는 금액은 곧장 지불하지.”
“거기에 하나 더.”
승기를 잡은 김에 엘로니아는 슬쩍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저희 사랑스러운 연인 설정 아니었나요?”
“맞아. 뭐가 문제지?”
“오늘 그 설정이 잠시 격정 멜로로 변한 게 아닌가 해서요.”
그가 집사장 앞에서 했던 말을 콕 집어 말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마차에서 그건 사고였고, 엘로니아는 벌써 다 잊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는 그런 사건이 아니던가. 그러나 카르벨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난 어디에도 격정이라는 말을 쓴 기억이 없는데.”
“아까 집사장이 있는 곳에서 말했잖아요. 제가 더, 더, 덮…….”
제 입으로 이 말을 꺼내야 한다니. 엘로니아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얼렁뚱땅 말을 넘겨버린 그녀는 다시금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아무튼, 처음 맞춘 설정은 지켜 주세요. 오해한다니까요.”
후우. 엘로니아는 속으로 진땀을 훔쳤다. 카르벨은 웬일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의하지.”
역시 보석을 주니 마음이 좀 너그러워진 것이 분명하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관대해진다. 오랜만에 그와 말이 통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앞섰다.
“좋아요. 아, 그리고 아셀리 전하가 이름으로 부르시던데, 무슨 관계예요?”
“왜, 질투 나나?”
허, 참. 이게 무슨 소리람? 잠을 잘못 잤나. 이제 환청까지 들린다. 엘로니아는 그를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보내 주신 정보에 그런 건 없었다고요. 보아하니 전부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엘로니아에게는 대놓고 데브니 영애라고 했으니 확실하다. 그녀 역시 이름과 가문을 구분해서 부를 줄 아는 이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실 사람이라면 실수라도 했다가 고스란히 그녀가 가짜 정령사로 누명을 쓸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신중을 기해도 모자랄 일에 이런 틈은 반갑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혹여 그가 오해라도 할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어제 물어보려고 했어요. 마차에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길래 기다렸을 뿐이지.”
“아아……. 그때는 향이 독해서 그랬지.”
이에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툭, 답을 던졌다.
“그쪽에서 혼담을 요청했었어.”
“네. 아셀리 전하께서 혼담을……. 혼담을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말에 동의하던 엘로니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헤일튼 공작가 출신의 황후는 현 황비가 들어오고 얼마 있지 않아 서거했다. 그런 관계에서 혼담을 보내는 대범함이라니.
‘이게 무슨 빵가루 같은 소리야.’
세상에서 끼어들면 안 되는 일이 바로 사랑싸움, 집안싸움 아니던가. 그러나 그 두 개가 합쳐진 소용돌이 속에 그녀가 던져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청했었다’는 과거형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카르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거절했어. 그게 전부다.”
“설마 완벽한 아셀리 전하께서, 말도 안 되지만 공작님을 여러 가지 의미로…….”
“그저 황실의 전통성을 운운하는 이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택한 거다. 그 외의 이유는 없어.”
군더더기 없는 설명을 마친 그는 작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근데 왜 말이 안 되는 거지?”
엘로니아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굉장히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한 듯싶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적당한 미소와 함께 슬금슬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는 이만. 서신을 써야 할 것 같아서요.”
“엘로니아.”
“아니에요. 보기 좋아요. 인생은 원래 자신감으로 살아가는 거죠. 파이팅!”
응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빠른 속도로 집무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