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첫 데뷔탕트2021.01.14.
“마님은 어쩜 붉은색도 잘 어울리시고, 하얀색도 잘 어울리세요?”
“마님, 남색은 어떠세요?”
“아니야, 바보야. 보라색이 마님의 주황빛 머리카락을 더 돋보이게 해드리지! 눈도 자색이시잖니. 깔맞춤 몰라?”
“뭐? 너 지금 하얀색 무시해? 어차피 혼인식에 입는 드레스는 하얗거든?”
엘로니아의 연회복을 두고 시녀들은 난데없는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 틈으로 에이미가 슬쩍, 연분홍빛 드레스를 들고 왔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엘로니아에게 속삭였다.
“마님. 저는 이걸 추천해 드려요.”
엘로니아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가 낙점되고 나자 시녀들의 손놀림은 가히 닉스를 압도하고 남았다. 정작 닉스는 거울 앞에서 대충 앉아 그녀를 구경하고 있었다.
[드레스는 파란색이지. 시녀들이 뭘 모르네, 쯧.]
엘로니아는 차마 보는 눈이 많은 이들 앞에서 답을 할 수 없어 조용히 고개를 저어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가 말하는 파란색은 분명 닉스와 닮은 채도의 색일 게 뻔했다. 엘로니아는 늘 너무 밝고 진한 채도의 색상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파이어 목걸이 역시 엘로니아에게는 줘도 쓸 일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닉스는 자기주장이 뚜렷했다.
[잘 생각해 봐. 정령 중에 나를 제일 먼저 봤잖아? 사파이어 목걸이도 받았잖아? 그럼 당연히 파란색을 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태어날 때 벗고 태어났으니 발가벗고 살자고 하지 그러니. 엘로니아는 못 들은 척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에 시끄럽게 그녀의 옆에서 파란색을 찬양하던 닉스는 결국 제풀에 지쳐 포로롱, 허공에서 사라졌다. 님프는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타이밍이 좋지 못한 듯했다. 향유를 열심히 바르던 에이미는 그녀의 빗을 들며 물었다.
“머리는 올릴까요? 풀까요?”
“에이미는 어떤 쪽이 좋아?”
“저는 푼 쪽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해줘.”
카르벨도 머리를 푼 쪽이 더 낫다더니. 에이미에게도 같은 답이 나온 것을 보면 딱히 비꼬려고 했던 말은 아닌 모양이다. 무던히도 준비하는 그들을 두고 엘로니아는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멈출 수 없었다.
‘드디어 나도 연회라는 곳을 가보는구나!’
데브니가에 지낼 적에는 연회에 갈 드레스 하나를 마련할 수 없었다. 데브니 남작 부인이야 예외였다. 그녀는 교양과 인맥을 위해서라며 꾸준히 모든 연회에 참석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그녀를 위해 엘로니아는 데뷔탕트도 거치지 못했다. 사실상 사교 모임에는 카르벨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처음인 셈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여러 부인들에게 에티켓과 매너를 배웠지만 실전은 또 다른 문제였다. 미미하게 떨리는 그녀를 느꼈는지, 에이미는 두 손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아셀리 황녀님도 마님보다 아름다울 수 없을 거예요!”
“말이라도 고마워.”
“빈말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의 말대로 거울 속에 비친 엘로니아는 처음으로 자신을 못 알아볼 뻔했다. 연한 분홍빛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빛에 반사되어 얼핏 보면 하얗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자가 진 곳은 엄연히 제 본연의 색을 띠고 있었다.
[뭐, 파란색은 없지만 괜찮네.]
평소 칭찬에 인색하다 못해 좋은 말이 없던 닉스조차도 괜찮다는 투로 말했다. 엘로니아는 씨익, 웃으며 신이 나 걸음을 옮겼다. 달칵, 문을 열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르벨과 그레이터가 보였다. 그레이터는 그녀를 보자마자 놀란 듯 인사와 함께 칭찬을 건넸다.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마님.”
“고마워요, 그레이터.”
까닥, 드레스 자락을 들고 배운 대로 우아하게 인사를 받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남기며 말했다.
“그럼 마차로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죠.”
앞장서는 그레이터의 뒤를 따르며 엘로니아는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카르벨에게 속삭였다.
“있잖아요, 사실 어제 잠을 못 잤어요.”
“어째서.”
무뚝뚝한 카르벨의 질문에도 그녀는 잔뜩 신이 나 답했다.
“오늘이 사실 제 데뷔탕트나 다름없거든요.”
정면을 바라보던 카르벨의 시선이 그제야 잠시 엘로니아를 향했다. 남들은 14살이면 치른다는 사교계 첫 데뷔를 그녀는 성인식을 한참 넘고 약혼까지 하고 나서야 치르고 있으니 놀랄 법도 했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어릴 때는 다 그렇잖아요. 막 예쁜 드레스 입고 잘생긴 남자의 손을 잡고 황실에 가는 게 꿈이었거든요.”
이에 카르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칭찬하니 고맙군.”
“공작님이 잘생겼다는 건 아니거든요?”
누가 엘로니아의 말을 듣는다면 헛소리라고 외칠 만한 발언이었으나,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니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말한 ‘잘생긴 남자’는 카르벨을 칭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예전에 그런 꿈을 꾸었다는 말이었는데! 그러나 그는 뻔뻔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지금은 그대의 손을 내가 잡고 있는데.”
끙……. 엘로니아는 차마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 처음으로 발을 딛는 사교계라는 사실에 엘로니아가 잊은 것이 있으니. 오늘은 바로, 그녀가 정식으로 많은 이들 앞에서 정령사라고 소개되는 자리였다. 제국에서는 정령사란 존재를 태어나서 거의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이가 더 많았다. 이렇다 보니 그녀를 보기 위해 먼 지방에 있는 귀족들까지 호기심에 몰려들고 있었다. 덕분에 연회는 만석이었다.
“정령사님, 안녕하십니까. 오블 자작입니다.”
“반갑습니다.”
“자연을 다스리는 정령사님께 인사드립니다. 바르타 후작가의 장남, 베일 바르타입니다.”
“반가워요.”
엘로니아는 이제 카르벨이 왜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황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카르벨은 그녀에게 작은 조언을 건넸다.
“얼굴 잘 풀어두는 게 좋을 거야.”
“왜요?”
“앞으로 쭉, 끝날 때까지 같은 표정을 지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그대로 얼굴 근육이 굳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카르벨은 한술 더 떴다.
“갑작스럽게 약혼을 하셨다고 하셔서 아주 놀랐습니다, 공작.”
“놀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어찌 그리 다른 이들과 염문 하나 없이 버티셨나 했더니. 정령사 약혼녀를 두셨으니 꽁꽁 숨겨두실 수밖에요.”
“제가 너무 그녀를 아끼는 바람에 괜히 여럿을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군요.”
“이거, 아주 좋으실 때입니다.”
그의 대화를 옆에서 고스란히 듣는 엘로니아는 몸이 비비 꼬여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직 황제에게 정식으로 정령사라고 임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모두들 그녀를 정령사라고 칭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카르벨이 신원을 보증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도 엘로니아는 겸손하고 교양 있게. 배운 대로 행동해야만 했다. 물론 중간중간 카르벨과의 조작된 연애담을 퍼트리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간 어떻게 그리 티 하나 안 내고 두 분이 만나셨습니까. 이거, 공작도 다시 봐야겠습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카르벨은 선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라 하긴 그렇지만 그녀가 몸이 좋지 못해, 저택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아, 몸이 약하신 모양이군요. 이런…….”
“괜찮습니다. 제가 곁에서 맞춰가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많이 나아진 것처럼요.”
그는 정말 사랑하는 연인을 보듯, 엘로니아의 머리를 귀 뒤로 손수 넘겨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그 행동 하나에도 여기저기서 부럽다는 말이 작게 흘러 들릴 정도였다. 역시 맨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자연스럽게 샴페인 잔을 하나 들었다. 잠깐씩 카르벨과 다정한 척은 했으나, 이렇게 오랜 시간. 그것도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정작 그 사랑스러운 연인을 위한 남자는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엘로니아. 조금 더 가까이 와도 돼. 너무 떨어지면 의심을 받잖아.”
그는 가볍게 엘로니아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마주 본 그는 엘로니아의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자연스럽게 빼앗아 들었다.
그 행동에도 여기저기서 꺅, 소리가 들렸다. 새삼 카르벨의 인기가 실감이 났다.
“병상에서 이제 막 쾌차했으니 술은 안 됩니다.”
“딱 한 모금만요.”
“내가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다녔길래 기억도 못 하는 거예요?”
잠깐 고민을 하는 듯 위를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눈까지 접어가며 해사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그러더군.”
에라이. 치사해서 안 먹는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심한 말을 되새기며 혀를 찼다. 샴페인 잔을 시종에게 건넨 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술이 들어가면 실수할 확률도 늘어나는 거다.”
이럴 때마저도 그는 냉정했다. 엘로니아는 쳇, 작게 혀를 찼다. 딱히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와 다정한 연인 사기극을 벌였던 것은 연달아 오는 인사를 받아내느라 금방 잊어낼 수 있었다. 순차대로 인사를 건네던 중. 엘로니아는 반갑지 않은 이들을 마주했다.
“엘로니아, 잘 지냈느냐?”
고작 두 달도 채 안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아득하게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이들. 바로 데브니 남작 부부였다. 언제 그렇게 살갑게 그녀를 불렀다고. 연회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엘로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데브니 남작 부인은 10년 만에 만난 딸이라도 보는 듯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는 눈물까지 쥐어짜 냈다.
“힘들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렴. 친정이 괜히 친정이겠니?”
엘로니아는 곧장 그녀에게 잡힌 손을 자연스럽게 빼냈다. 그러고는 웃으며 답했다.
“제안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인.”
명백하게 선을 긋는 말이었다. 엘로니아는 자신이 이렇게나 냉정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이걸 굳이 표현하자면 ‘카르벨식 거절 방법’이라고 칭하는 게 맞겠다. 딱 그와 같았다.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하기. 이제 그녀는 한낱 남작 부부가 마음대로 손을 먼저 덥석 잡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엘로니아의 말에 잠시 남작 부부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데브니가에 대해 호기심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 순간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단편에 불과했다.
“데브니 남작. 이런 아름답고 우수한 딸이 있다는 것을 왜 말을 안 했나.”
“그러니까요. 매번 에릭스 자랑만 그리해대서, 딸이 있는 줄도 모를 뻔했잖아요.”
놀라움과 의문이 뒤섞인 질문에 그들은 준비라도 해온 것인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정령사라는 것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불편하니 그랬지요.”
“이래 보여도 데브니 남작가 아닙니까. 그 옛날 선조 시절부터 이어온 규칙과 안내가 있지요.”
정령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은 대단히 명맥을 잘 유지한 가문처럼 포장했다. 평생을 허름한 모습을 거짓으로 꾸미고, 자신들을 포장했으니 저 정도는 일도 아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