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새로운 손님 (10/234)

10. 새로운 손님2021.01.03.

테라스가 2층 높이에 있어 고개를 조금 들어야만 했다. 카르벨은 평소 꽉 막힌 옷을 입은 것과는 달리, 조금 간소한 차림새였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잠이 들기 전에 잠시 나온 모양이었다. 편하게 풀어진 셔츠와 적당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밤공기에 잘게 흔들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날렵한 눈매와 곧게 뻗은 콧대가 유독 달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희한하게도 평소보다 유해 보였다. 하도 명확하고 앞뒤 논리가 탁 들어맞는 것을 좋아하기에 잘 때도 타이를 매고 잘 줄 알았더니. 그도 사람이기는 했나 보다. 그런 것치고 꼿꼿한 자세와 고압적인 시선은 여전했다. 가늘어진 눈매가 나른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롯하게 꽂히는 시선에 피부가 따갑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흠, 목을 가다듬으며 멋쩍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밤에 보니까 제가 너무 예쁜가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할 만큼 여유가 있나 보네.”

카르벨은 눈꺼풀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교육 시간을 조금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시고 그러세요.”

“농담은 아니었는데.”

그는 기둥에 기대어 태연하게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방금 님프가 보여주었던 어린 카르벨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엘로니아는 그를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라면서 능글맞아진 줄 알았더니.”

“마치 내 어릴 적을 봤다는 듯이 말하는군.”

“어릴 때는 좀 귀엽기라도 하지. 다 크니까 징그러워요.”

조용한 정원에서 조금 크게 들렸다. 카르벨의 날카로운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녀를 살피는 듯한 시선에 이때다 싶어 냉큼 답했다.

“정령으로 봤어요. 정원에서 전대 공작님과 함께 계신 모습을요.”

이번에는 제대로 정령사다운 입증이 아니던가. 그 누구도 엘로니아에게 어린 카르벨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정말 정령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카르벨은 피식,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정령사 같았어. 교육의 효과가 이렇게 나타나는군.”

“아니, 진짜 정령으로 봤다니까요?”

“누군가 보여줬겠지. 온 저택이 그대에게 잘 보이려는 시녀들로 넘쳐나는데.”

그가 뜻하는 말이 온종일 교사들에게 지겹도록 들어야 했던 ‘하해와 같은 예비 공작부인 어쩌고’라는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엘로니아는 단호하게 답했다.

“오늘 종일 들은 말이니까 됐어요. 저는 하해와 같지 않아서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음. 역시 얄밉다. 이제는 저 밉살맞은 말도 예상이 되니 타격이 덜했다. 하하, 무시하자. 무시가 답이다. 그녀가 답이 없자, 카르벨은 테라스 난간에 팔을 걸쳤다. 상체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의 모습이 달빛과 어우러져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단출한 의복이 오히려 그와 잘 어울렸다. 낮에는 매번 그를 볼 때면 마치 누가 틀에 찍어 낸 것처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랬던 낮과 달리 현재 거만한 눈에는 미세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꽤 잘하던데.”

“제가 좀 하죠. 알아요.”

“춤 말이야. 벌써 연회가 기대될 정도야.”

뻐기듯 어깨를 의기양양하게 폈던 엘로니아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춤을 춰본 적이 없는 그녀의 춤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몸치는 아니었는지, 배우는 대로 곧잘 따라 했다. 멜튼 양도 얼마 뒤면 그녀가 사교계를 뒤집어 놓을 거라며 의욕을 내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미숙한 경험은 감출 수 없었다. 덕분에 앞선 다른 것과 달리 춤은 조금 부진했다. 나아지고는 있으나, 칭찬에 인색한 카르벨이 이렇게 직접 말할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놀리는 거죠?”

“맞아.”

엘로니아의 질문에 카르벨은 즉답했다. 후우.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쩐지 쉽게 추켜 세워준다 했다. 엘로니아는 그를 향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을 기대해주세요. 꼭 공작님을 두고 첫 춤으로 멜튼 양이 알려주신 비장의 춤을 선보여드릴 테니까요.”

전 애인 춤이라고 했으나, 뭐. 퇴치한다는 의미는 같으니까.

“기대하지.”

카르벨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힘들었던 몸도 그와 대화를 하니 분노로 다시금 힘이 솟아났다. 이게 바로 원동력이라는 거구나!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외울 게 많아서요.”

엘로니아는 보란 듯 휙, 고개를 돌려 사뿐히, 그러나 빠른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로 카르벨의 나지막한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머리, 푸는 게 더 예뻐.”

조용한 정원에 풀벌레 소리가 일순간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뒤를 돌자, 카르벨은 그저 난간에 기대듯 그림처럼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올곧게 그녀를 직시했다. 달빛을 받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묶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굳이 고르자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난간에 기대듯 기울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말 없이 카르벨은 등을 보였다. 그제야 멜튼 양과 연습하면서 머리를 묶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은 밤, 찬 바람이 쓸고 가는 얼굴이 왠지 조금 더운 것 같았다.

  *** 교육을 받은 지 한 달. 엘로니아는 그간 자신을 돌아보면 인간 승리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지긋지긋하게 보느라 너덜너덜해진 역사책을 보며 닉스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진지하게 말했다.

“난 다시 태어났어, 닉스.”

[놔!]

“나 끝났어! 다 외웠어! 해냈어!”

[이게 외우다 180도 돌아 버렸나?]

방대한 양에 정말로 돌아 버릴 뻔했으나, 다행스럽게도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찾아왔다. 엘로니아가 짤짤짤 흔들어 대는 통에 닉스의 오동통한 볼은 불만으로 잔뜩 꿈틀거렸다. 결국 심통이 난 얼굴은 스르륵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엘로니아의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힘든 여정이었다. 엘로니아는 뿌듯하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자화자찬했다.

“정말, 그 얄미운 얼굴을 생각하면 없던 열정도 다시…….”

“그게 나는 아니겠지.”

“……?!”

엘로니아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카르벨이 방문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축하해. 다 끝냈다는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듣게 되어 영광이군.”

“정확하게는 몰래 들으신 거잖아요.”

“어차피 보고가 들어오면 피차일반이야.”

카르벨은 태연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눈이 힐끗, 엘로니아의 방구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선물이 쌓여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최근 들어 엘로니아의 앞으로 선물이 잦게 왔다. 대부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며, 엘로니아의 이름도 잘 모르는지 그저 ‘예비 헤일튼 공작부인의 앞’으로 오는 것들이 전부였다. 에이미는 이를 볼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다들 마님의 소식을 들은 게 분명해요! 이렇게 인품, 성품, 기품 다 완벽한 분을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있나요!”

그녀는 이미 객관성을 잃은 터였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열어보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선물을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게 하나 들어 뜯어냈다.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둘러싸인 케이스가 나오고, 그 안에는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제법 공을 들였군.”

카르벨은 감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로 감탄했다. 그는 엘로니아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마음에 드나.”

“뭐, 싫지는 않죠.”

“그래도 버려.”

그는 단호하게 휙, 케이스를 포장지 더미에 던졌다. 엘로니아는 경악하며 되물었다. 그냥 팔기만 해도 대체 얼마인지 가늠도 안 되는 장신구였다. 이걸 그냥 버리라니! 그런 엘로니아에게 카르벨은 품에서 꺼낸 케이스를 내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외형인데…….’

엘로니아가 무엇이냐는 듯 그와 케이스를 번갈아 가며 보자, 그는 싱긋 웃었다. 달칵, 상자가 열리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이거 메티카 감옥에서 청혼했던 그 반지죠?”

“맞아. 마음에 안 들면 새로 해주지.”

“충분히 비싸 보이는데요.”

“적어도 아까 그 목걸이보다는 비쌀걸.”

생긴 건 훨씬 작아서 얼마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일단 굵직하게 박힌 다이아몬드가 그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카르벨은 슬쩍 종용하듯 다시금 그녀의 눈앞에 케이스를 들어 보였다. 엘로니아가 마지못해 반지를 받자, 그가 말했다.

“조만간 황실에서 그대 앞으로 연락이 올 거야.”

“벌써요?”

“벌써는. 이제야 온 거지.”

하기야, 감옥에서 나온 지가 언제인데. 건강상의 이유로 미루는 것도 한계가 있을 듯했다. 카르벨은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이건 약혼반지.”

“이게 바로 1년 전에 결혼을 약속하면서 주고받은 그 반지다 이거죠?”

“그래.”

미리 날조해둔 과거는 이제 익숙하기까지 했다.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그는 노련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손님이 올 거야. 적당히 잘 처신해.”

그래서 반지까지 손수 주는 거네. 한 달. 헤일튼 공작저에서 지낸 지도 그만큼이 되었거늘. 그녀는 처음 온 날을 제외하고는 손님을 본 적이 없었다. 엘로니아는 독한 리아티코 향수를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일전에 제가 공작저에 온 날 오셨던 분이실까요?”

“아니. 다른 사람이야.”

그 말을 하는 그의 입매는 꾸준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별로 달갑지 않은 손님인 모양이었다. *** 엘로니아는 초콜릿 케이크가 올려진 접시를 들고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놓인 다른 그릇을 확인한 엘로니아는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들고 있던 그릇과 바꾸었다. 바닥에 있던 그릇에는 먹다 만 케이크가 있었다.

“과일 케이크는 취향이 아닌가 보네.”

그녀는 매일 님프를 위해 케이크를 두고 갔다. 엘로니아는 이미 초콜릿 케이크에 물린 지 오래되어, 가끔 딸기나 호두 파이처럼 다른 디저트를 놓고 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님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겨두고는 했다.

“의외로 입맛이 확고하단 말이야.”

왠지 은밀한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혹여 정원사나 다른 시종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와 꽃으로 잘 가려둔 뒤, 종종걸음으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정원을 빠져나왔다. 케이크를 몰래 빼돌리고 있는 탓에 들키면 곤란했다. 정령에게 주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정령사의 서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낮잠을 자겠다며 에밀리를 내보낸 틈에 창문을 넘어 나오는 공작부인이라니. 엘로니아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으며 밧줄이 내려진 저택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허공에 외쳤다.

“닉스, 닉스.”

답이 없었다. 조용한 공기에 엘로니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구시렁대며 팔을 걷어붙였다.

“어휴, 그 작은 걸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닉스는 가끔 제 마음에 내키면 줄을 끌어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훨씬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오늘은 영 아닌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엘로니아는 밧줄을 꽉 붙잡고 홈이 파인 벽을 발로 디뎠다. 다행스럽게도 저택은 미관을 위해서인지 여러 문양과 조각들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덕분에 조금만 힘을 주면 걸어 올라갈 턱이 꽤 많았다. 높으면 모르겠으나, 3층 높이는 충분히 올라갈 만했다. 반쯤 올라왔을까. 엘로니아는 어째서인지 등 뒤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호기심에 못 이겨 슬그머니 뒤를 돌자.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16566363791779.jpg

  화려한 백금발이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시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잘생겼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런데도 희미하게 비치는 고집스러운 인상이 누군가를 잠시 연상시켰다. 감탄을 내뱉기 전. 그가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 남의 저택의 벽을 타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