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하해와 같은 마음의 예비 공작부인2020.12.31.
에이미의 일은 순식간에 헤일튼 공작저 안에 퍼졌다. 고작 반나절 만에 저택에 있는 모든 시종들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들었어? 예비 마님이 그렇게 좋은 분이시라며?”
“마님께서 아끼는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실수도 넘어가 주실 정도이니 말 다 했지.”
“심지어 공작님이 선물해주신 거였다면서. 비싼 물건이라던데 그걸 그냥 넘어 가주시다니. 역시 배우신 분은 다른가 봐.”
소문 속 케이크는 어느새 물건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이는 저택에 입성한 후, 거의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엘로니아의 덕에 더욱 부풀려지고 있었다. 일부 시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엘로니아를 멀리서, 혹은 아예 보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몸이 약해서 공작님이 전전긍긍하신다던데.”
“전에 멀리서 티타임 가지시는 걸 봤는데 주인님이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
“그러니 한 번도 여자를 저택에 들이신 적 없는 분이 예고도 없이 데려오셨겠지.”
대화를 나누던 시종들은 어느새 어떤 가문의 영애가 성격이 어떻다더라 하는 가십거리들을 떠들며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무리의 한 명이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근데, 예비 마님 전속 시녀는 벌써 정해진 건가?”
“아닐걸? 아직 혼인식 전이니까.”
헤일튼저는 시급도 다른 곳에 비하면 꽤 높은 축에 속했다. 대신 일 처리에 있어서 그만 한 경력과 완벽을 추구하기도 했다. 일을 제법 해 본 이들은 그 시급에 만족하면서도 내심 마음 한편에 조금 더 안정되기를 바랐다. 카르벨이 못된 주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주변 시종들을 편안하게 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실수에는 가차 없었다. 물론 본인들의 잘못이니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언제 실수가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 헤일튼가의 시종들은 이런 그가 이번 일을 넘어간 것은 엘로니아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전속 시녀 자리가 비어 있다니. 순간 그녀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 정오의 일이 지나고, 역사 수업까지 마친 엘로니아는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댄스 교습을 받았다. 닉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게 사람 몸이야, 통나무야?]
‘통나무는 눈이라도 안 달렸지…….’
엘로니아는 춤 교육을 맡은 멜튼 양의 부담스러운 얼굴을 애써 모른 척 피하느라 숨을 참았다. 멜튼 양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자꾸만 가까이 붙는 덕에 그녀의 발이 본능적으로 뒤로 빠졌다. 그러자 멜튼 양은 그녀의 허리를 콱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머, 그런 귀여운 표정을 하고 도망가시면 안 된다고요. 춤이란 자고로 남녀가 이렇게 붙어 있는 맛이죠.”
“메, 멜튼 양. 지금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평생 배워본 적 없어 낯선 것은 둘째치고, 최근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핑계에 맞춰 적당히 병약한 척도 해야 했다. 살기 위한 외침을 들은 멜튼 양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정말이지, 건강만 괜찮으셨으면 제가 사교계에서 여자도 사로잡는 101가지 기술을 전수해드렸을 텐데 말이죠!”
“여자요?”
“너무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여자도 홀리는 법이죠. 바로 저처럼?”
멜튼 양은 찡긋, 한쪽 눈을 감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확실히 그녀는 춤을 출 때만큼은 아름다웠다. 왜 역사에서 황제들이 첩에게 정신을 팔려 국정 일을 소홀했는지 아주 조금 이해가 갈 만큼이었다.
“나중에 제가 공작님을 단번에 침대까지 쓰러트리는 비법도 전수해드리겠습니다, 호호호.”
“뭐, 뭐를 해요?!”
“다 아시면서. 아니면 이미 필요도 없으실 만큼 빠져 계신가?”
비록 말이 조금 많은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엘로니아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멜튼 양을 보자 순식간에 건강이 나빠지는 기분이었다. 카르벨과 손을 잡고 춤을 출 생각만 해도 벌써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미리 건강에 대해 언질을 받았는지 멜튼 양은 틈틈이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이런, 안색이 창백하세요.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그게 좋겠어요. 지금 잠깐 현기증이 났거든요.”
엘로니아는 충격을 연기로 승화시키며 의자에 앉았다. 괜히 더운 기분에 시녀에게 부탁해 머리를 올려 묶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시녀가 다과를 내왔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잔뜩 뿌듯한 얼굴로 깍듯하고 신속하게 준비를 마치고는 엘로니아를 향해 말했다.
“마님, 저는 케이티입니다.”
“……응?”
“제 이름은 케이티예요. 꼭 기억해주세요!”
그녀는 재차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고는 자로 잰 듯 칼같이 각을 재어 인사를 건넨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지.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가?’
엘로니아는 오후 내내 시간별로 바뀌는 시녀들을 보며 난데없는 이름 외우기에 시달려야 했다. 차를 본 멜튼 양은 우아하게 잔을 들어 마시며 말했다.
“오늘 오는데 엘로니아 님의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하해와 같은 인자함을 지닌 예비 마님이라던가?”
“그냥 하는 소리겠죠.”
그녀를 보는 교사마다 들어올 때면 저 말을 달고 들어왔다. 하해는 무슨, 옹달샘도 안 된다. 엘로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온종일 들은 그 말에 적당히 반박했다. 하지만 반박하는 횟수가 늘어나자 그마저도 포기하게 되었다. 고작 정오에 있던 일이 얼마나 변형되었는지, 해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닉스가 낄낄 웃었다.
[하해는 나 아니야?]
‘너는 고인 물.’
[얼마나 관대해. 너랑 같이 춤도 춰주잖아.]
그는 춤인지 소용돌이인지 모를 만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뻔뻔하게 주장했다. 엘로니아는 은근슬쩍 그에게 물었다.
“님프는 어때?”
[몰라. 그 뒤로 안 보여. 뭐 그런 일로 상심하고 그런다냐.]
닉스는 좀 상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엘로니아는 역대 파트너와 춤을 추었을 때의 감상을 늘어놓는 멜튼 양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복화술로 답했다.
“대체 케이크는 왜 먹은 거야?”
[생각해 봐. 숲의 정령이면 허구한 날 풀만 뜯어 먹고 살 텐데, 가끔 별식도 당기는 법이잖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순간 닉스에게 너는 물만 먹고 사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엘로니아는 멜튼 양의 눈치를 살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멜튼 양이 화색을 돋우며 말했다.
“어머, 배우고 싶으셨으면 진작 말씀하시지. 제가 또 ‘전 애인의 춤 신청을 받고 단번에 정떨어지게 하는 방법’에 나름 일가견이 있답니다.”
하필 그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전 애인 퇴치 춤을 설명하며 배워보겠냐고 묻던 멜튼 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꼴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지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엘로니아의 어깨를 감싸 잡아끌며 말했다.
“이건 아주 간단해요. 우선 92%의 확률로 첫걸음을 떼면 잘 지냈니? 라고 물어볼 텐데, 그럴 때 이렇게 그의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멜튼 양의 드레스가 갑자기 들썩이는 모습을 보며 엘로니아는 오늘도 일찍 끝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자, 저를 따라서 각도는 이렇게.”
이를 본 닉스가 배를 잡고 웃다 결국은 울기까지 했다. 숨이 넘어갈 듯이 웃던 그는 결국 스르륵, 사라졌다.
‘음……. 닉스를 처리할 때 좋겠군.’
비록 전 애인은 없는 덕에 퇴치할 일이 없으나 제법 쓸모있는 시간이었다. 열정적인 춤 교습 시간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신이 난 듯 내일 다시 보자는 인사를 남기며 사라지는 멜튼 양을 보며 엘로니아는 안도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어둠이 내린 헤일튼저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반딧불이와 함께 미미한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고단한 하루에 보상이 되는 것 같았다.
‘조금만 걸을까.’
어차피 들어가면 또 침대에 쓰러지듯 누울 텐데. 그럴 바에야 잠시 정원을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운이 좋다면 케이크를 먹은 뒤로 장난조차 치지 않는 님프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법 죄책감을 느꼈는지 주변을 맴돌며 자잘한 사고를 치던 그녀는 온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잘 꾸며둔 정원의 꽃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케이크라도 갖고 올 걸 그랬나?”
어디서 그녀가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차를 내올 때면 반드시 초콜릿 케이크도 함께 나왔다. 덕분에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그릇을 방 안 한구석에 숨겨 두기까지 했다. 더 먹었다가는 게워내는 꼴마저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배가 불렀지. 예전에는 엄두도 못 냈는데.’
씁쓸하게 과거 베이커리 앞을 지나갈 때의 그 빵 냄새를 떠올렸다. 순간 욱, 하고 온종일 먹은 케이크가 올라올 것 같았다. 목 끝까지 차오르기는 했으나 다행히 볼썽사나운 모습은 면했다. 늦은 시간의 시원한 공기와 탁 트인 정원을 보던 엘로니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간 신부 수업이니 외우는 일이니 방에 박혀 지냈던 일들이 단숨에 트이는 기분이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녹색 빛으로 작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면 반딧불이와 구분이 안 될 수도 있으나, 엘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님프!”
그녀가 외치자 화들짝, 놀란 님프는 안절부절못했다. 엘로니아는 단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혼내려는 거 아니야. 케이크가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5살배기 아이의 순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자그마한 손이 눈물을 훔쳐내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닉스가 했던 말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못 먹고 자란 터라 이해되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자그마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중에 케이크가 더 먹고 싶으면 말해. 내가 많이 구해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엘로니아의 말에 발갛게 부푼 눈동자가 끔뻑였다. 한참 응시하던 님프는 느리게 그녀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그녀는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고?”
엘로니아가 묻자 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의 끝, 저택에 거의 다다른 곳이었다.
‘방으로 돌아가자는 뜻인가?’
의문이 들 무렵, 님프는 조심스럽게 엘로니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순간 이전에 닉스가 데브니 남작 부부의 앞에서 했던 것처럼 시원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곧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빠르게 보였다.
“카르벨, 로엘 전하께서 뵈러 오셨단다.”
“오셨습니까, 전하.”
“반가워. 어머님께 말은 많이 들었는데, 예상보다 더 귀엽구나.”
어린 카르벨과 전대 공작 부부, 그리고 로엘 황태자였다. 어린 시절 죽었다는 황태자는 예상과 달리 평범하게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카르벨과 얼추 비슷한 나이대인데도 조금 더 어른스러운 분위기였다.
‘12살? 10살? 그쯤 된 건가.’
저 당시의 카르벨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하게 걸린 미소와 적당한 매너는 어린아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말끔했다.
‘저 약 오르는 미소까지 지금이랑 똑같은데?’
헤일튼 전대 공작은 카르벨을 닮은 흑발이었다. 그러나 전대 공작부인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한 백금발이었다. 기억에 보이는 시간대는 낮의 정원. 태양 빛을 받자 그 대비가 더욱더 또렷했다. 어린 카르벨이 보이고, 그가 입을 열기 직전.
“이제 일정도 꽤 익숙해졌나 보지.”
순식간에 떠오르던 기억은 사라졌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테라스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르벨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