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악어의 눈물2020.12.20.
엘로니아는 놀란 심장을 속으로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정령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닉스를 보았을 때처럼 쉽게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또다시 섣부르게 정령을 언급했다가는 곤혹만 치를 게 뻔했다. 엘로니아는 멀찍이 서 있는 헤일튼가의 시종들과 카르벨을 한 번 본 뒤 다짐했다.
‘좋아. 나중에 아무도 없는 밤에 다시 찾아와야지.’
그러나 그녀의 한계를 시험하듯 정령은 테이블 주변을 빙빙 돌며 툭 건드리기를 반복했다. 포크를 밟고 서 있던 정령은 급기야 엘로니아의 눈에 얼굴을 들이대기까지 했다. 불쑥 시야에 들어온 앳된 녹색빛 정령의 모습에 그녀는 흡, 숨을 참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소리라도 질렀을지 모른다. 엘로니아는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시선을 카르벨에게 집중하기 위해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정작 주위에 정령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카르벨은 태연한 어투로 질문을 건넸다.
“……케이크를 그렇게 좋아했던가?”
“비싼 건 다 좋아해요.”
“유의하지. 케이크를 못 먹게 해서 약혼녀의 포크에 위협당했다는 소문이 나고 싶지는 않으니.”
잿빛 눈동자가 눈짓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포크를 가리켰다. 교양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에서 보일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엘로니아가 슬그머니 예절을 갖췄으나 수습하기엔 늦은 뒤였다. 카르벨은 단호히 말했다.
“살롱에서 일하며 배운 예법과 사교는 잊어. 오늘부터 새로 가르칠 만한 사람이 올 테니까.”
“네, 알겠……. 잠깐만요.”
정령에 홀려 아무 생각 없이 답을 하던 엘로니아는 질문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살롱에서 일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한 번도 어디에서 일했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확신하고 있었다. 빠르게 되물으니 그의 얼굴에 의외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엘로니아가 그 부분을 눈치챌 거라고 생각조차 못 한 듯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대답 대신 눈이 접힐 정도로 친절히 웃어 보였다. 카르벨의 옆을 알짱거리는 정령조차도 그 미소에 뒤덮여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겉으로만 보자면 완벽했다. 우아하고 흠집 하나 없이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거짓말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엘로니아는 그의 검은 속내를 단숨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뒷조사로 알아냈구나!’
잘난 외모를 회피용으로 사용하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영애가 봤다면 그대로 넘어갈 법한 처세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 서 있던 시녀들은 대단한 사랑꾼이라도 본 사람들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 이런 것을 진정한 사기꾼이라고 하는 거 아닐까. 이렇게 두 눈 뜨고 사람 코도 베어 가는 사람도 있는데, 정작 진짜인 자신은 사칭범으로 수감되었다니.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아무런 정보 없이 그녀에게 혼인을 제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숨길 생각조차 안 하고 언급할 줄은 또 몰랐지만 말이다. 엘로니아는 의무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글쎄. 아마도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디까지 생각했을 줄 알고?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잔뜩 비웃어 줄 생각으로 엘로니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은밀한 점 위치까지는 모르실걸요?”
그녀는 이겼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아무리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헤일튼 공작이라도 이런 부분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게 반박했다.
“아, 엄지발가락 사이에 있는 점 말인가.”
그의 입매가 비뚜름히 기울며 얕은 장난기를 내비쳤다. 그의 저 여유로운 가짜 미소가 흐트러지는 일이 있기는 한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카르벨은 의자에 기댄 채 얕게 고개를 까닥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등허리에 있는 점?”
기다렸다는 듯 이어 나오는 답에 엘로니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점의 위치는 데브니 남작 부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이게 단순한 권력 남용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란 말인가? 그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카르벨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가 굳이 말을 안 꺼냈다면 나도 잊고 있을 내용이었어. 이렇게 상기시켜 줘서 고맙군.”
“그냥 잊어 주시면 안 될까요?”
“발가락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허리 쪽?”
“둘 다요.”
엘로니아는 마지막 어절을 강조해서 발음했다. 언젠가 그 정보가 쓰인 서류라도 발견한다면 반드시 화형식을 거행할 거라는 다짐을 담아, 아주 단호하게. 그녀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여태 의자에 반듯하게 기대어 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어 카르벨은 느긋하게 두 팔을 테이블 위에 기대며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슬쩍 앞으로 고개를 내민 그는 마치 그녀보고 가까이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니아는 잔뜩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 그녀에게 협박이라도 할까 싶었다.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녹색빛의 정령이 자신을 봐 달라는 듯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엘로니아는 가뿐히 무시했다.
‘좋아, 검은 없고…….’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 서 있던 시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급하게 뒤를 돌았다.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그거 아니야!’
차라리 카르벨이 허튼짓을 할 수 없게 보는 눈이라도 많기를 바랐으나, 헤일튼가의 시종들은 주인 내외의 사생활을 너무도 철저하게 지켜 주는 배려를 보였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카르벨은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본 채로 작게 속삭였다.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여유가 넘치는 것을 보니, 오후부터 있을 역사 수업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군.”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으나 그 내용은 대수로웠다.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오후 일정부터가 그러했다. 그러나 카르벨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일주일 정도면 전부 외울 수 있겠지, 엘로니아?”
여상한 얼굴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나지막한 힘이 실려 있었다. 실은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역사는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정령사는 자연과 물건으로부터 과거를 읽는 자. 가짜 정령사가 진짜인 척을 하려면 적어도 세세한 과거를 알 필요가 있었다. 일전에 카르벨이 언질을 주기도 했거니와, 닉스가 말을 듣지 않으니 과거를 암기해야 하는 일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었다. 적어도 진짜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버텨야 하지 않겠는가. 엘로니아는 자꾸만 손바닥으로 그녀의 볼을 찰싹찰싹 건드리는 녹색 정령을 애써 흐린 눈으로 넘기며 물었다.
“분량이 얼마나 되죠?”
“충분히 할 만한 정도야.”
짤막한 텀을 둔 뒤, 카르벨의 낮은 음성이 작게 속삭였다.
“모르는 부분은 언제든지 내게 물어보도록.”
예상치 못한 호의에 엘로니아는 생경한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 한마디가 조금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 * * 헤일튼 공작저에 들어온 지 약 일주일이 지날 무렵. 엘로니아는 확신했다. 카르벨은 ‘충분히’라는 단어의 뜻을 모른다. 아니면 일주일이 7일이라는 사실을 잊었거나.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역사는 물론이요, 교양, 황실 예법, 춤 등으로 그녀의 일정은 빼곡했다. 덕분에 주변 눈을 피해 정원의 정령을 보러 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미소가 악어의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녹색빛 정령은 불규칙적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닉스는 그녀를 숲의 정령인 님프라고 설명했다. 작은 다섯 살 난 여자아이의 모습이었으나 처음부터 말이 많던 닉스와 달리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님프는 심심하면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다. 대표적으로는 그녀의 머리 리본을 자꾸 삐뚤게 만들었다.
“이상하다. 왜 자꾸 리본이 삐뚤어질까요?”
이를 모르는 에이미가 몇 번이고 고쳐 주었으나, 님프는 꺄르륵 웃으며 다시 리본을 자그마한 손으로 기울였다. 하필 사람이 많을 때만 그랬다. 혼자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 님프는 자취를 감췄다. 닉스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그는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정령이 정령사를 좋아하는 게 무슨 문제지?]
“그 방식이 문제인데.”
[피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정령사의 숙명이야. 받아들여.]
그래서 닉스가 이렇게 말을 안 들었구나. 엘로니아는 해탈한 듯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애매한 애정 표현도 일주일이 되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엘로니아의 일정이 너무 바쁜 탓이 컸다. 오전부터 이뤄진 교양 수업에도 어김없이 님프와 함께였다. 엘로니아는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할 때마다 자꾸 손으로 실 끝을 막아 버리는 님프의 작은 손을 보며 인내심을 다졌다.
‘메티카 감옥에 가지 말자, 메티카 감옥에 가지 말자…….’
그녀는 힐끔,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마렌 자작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교양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시범으로 보일 자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엘로니아는 멀찍이 있는 닉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떻게 좀 해 봐, 닉스.”
[자수 재미도 없는 거, 그냥 대충해.]
닉스는 이미 높이 쌓인 역사책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의 손톱만 한 손바닥이 신기한 듯 책을 건드렸다.
[제국론, 헤일튼가의 계보, 먼 왕국 이웃 왕국……. 정말 이걸 다 외울 수 있는 거야?]
“파랗고 작은 누군가가 부탁만 제대로 들어주면 다 해결될 문제이기는 해.”
[오, 꼭 나를 말하는 것 같네.]
“너야.”
그녀의 답이 끝나기 무섭게 마렌 자작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때요.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네, 덕분에요.”
그녀가 말을 걸자 님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의 근처로 날아갔다. 엘로니아는 이 틈을 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님프가 돌아오기 전에 전부 끝내 버리겠다는 각오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마렌 자작 부인이 놀라운 듯 말했다.
“속도가 엄청나시네요, 엘로니아 양.”
정신을 차리고 나니 화려한 꽃 모양 자수가 손수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화려한지, 닉스도 옆에서 한마디를 얹었다.
[천이 자수로 뒤덮여서 안 보이는데?]
빼곡하게 들어찬 꽃송이들은 본래 원단을 반도 남기지 않고 가려 버렸다. 덕분에 손수건이 과하게 뻣뻣했다. 그러나 마렌 자작 부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쩜, 제가 가르칠 게 없을 정도네요. 이전에 배우셨던가요?”
“아뇨. 처음이에요.”
샬롱에서 일할 때 작은 바느질 정도는 일상이었다. 특히나 비싼 드레스와 장신구가 주 품목이 되는 곳에서 잘못 바늘이라도 찔렀다가는 그대로 제 목이 잘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를 모르는 마렌 자작 부인은 그저 기쁜 듯 제안했다.
“공작님께서 받으시면 기뻐하시겠어요.”
“더 예쁘고 좋은 손수건도 많을 텐데요. 굳이 제 것을요.”
줄 생각은 닉스 눈물만큼도 없지만 엘로니아는 적당히 쑥스러운 척 웃었다. 카르벨도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꽃향기도 싫어하는 그가 꽃이 놓인 자수라니.
‘차라리 괴롭게 향수라도 뿌려서 선물해 봐?’
생각하기 무섭게 마렌 자작 부인은 그녀의 말을 부인했다.
“그럴 리가요. 꼭 전해 드려 보세요. 좋아하실 거예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할게요, 부인.”
잔뜩 찌그러질 카르벨의 얼굴을 떠올리며 엘로니아는 적당한 미소로 답을 건넸다. 자수를 마무리 짓고, 교양 수업이 끝나 갈 무렵. 똑똑, 작은 노크와 함께 카르벨이 들어왔다.
“수업이 끝나가는 시간에 맞췄는데. 너무 이르게 도착한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