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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괜찮은 향 (5/234)

05. 괜찮은 향2020.12.17.

엘로니아는 커다란 의자를 힘겹게 제 앞에 끌어왔다. 카르벨의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만나고 온 이가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엘로니아는 그를 끌어다 앉혔다.

“일단 앉아요, 앉아.”

엘로니아는 큼, 목을 가다듬었다. 카르벨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옷을 갈아입고 씻으면서 연습했던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엘로니아는 그의 앞에 서서 진지하게 화두를 열었다.

“공작저에 있는 재산은 전부 공작님의 것이잖아요? 근데 만약에, 정말 만약인데요. 혹시 공작님의 물건은 아닌데, 우연히 여기에 있다면 그건 누구 것이 되나요?”

“……뭔가를 주웠나.”

“아뇨. 곧 주울 예정일지도 몰라서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르벨은 팔짱을 끼며 답했다.

“내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는?”

“에이미에게 물어봤는데, 공작저에서는 향이 독한 식물이나 물건은 구비하지 않는다고 하던걸요.”

이미 그가 오기 전에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 엘로니아는 혹여 그가 리아티코를 탐낼까 두려워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은 향 싫어하시잖아요. 그렇죠?”

카르벨의 잿빛 눈동자가 서늘했다. 에이미가 거짓말이라도 한 건가? 안 그래도 매 순간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해준 덕에 의심이 가던 차였다. 엘로니아는 긴장으로 땀이 차오르는 손을 드레스에 닦아 내며 말했다.

“제가 알아보니까 리아티코가 저택 어딘가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엘로니아는 검지를 세워 가며 그에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공작님은 싫어하는 향의 원인도 제거하시고, 저는 돈……이 아니라 원하는 걸 얻어서 좋고! 어때요?”

이쯤 하면 반응이 와야 하는데. 가만히 그의 응답을 기다렸으나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설마하니 자신의 것도 아닐 꽃에 대한 소유권이라도 주장하고 싶다는 걸까. 미동조차 없는 카르벨의 표정에 슬슬 불안감이 엄습했다. 생각해 보면, 리아티코를 찾기 위해 저택을 뒤지기는 해야 했다.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닌다면, 객식구인 그녀가 퍽 귀찮을 법도 했다. 엘로니아는 아쉬웠지만 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좋아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제 위주로 생각한 것 같으니까 찾으면 7대3 비율로 나눠요. 찾는 건 저니까 7 정도는 괜찮죠?”

카르벨의 고집스러운 입매는 여전했다. 엘로니아는 슬슬 인내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더 원하는 건가? 그 이상은 양보할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성큼 앉아 있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 보통은 돈에서 인심이 나온다던데 너무 팍팍하시네. 설마 발견도 제가 했는데 더 바라시는 건 아니죠?”

허리에 손을 얹은 엘로니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와 눈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공작님, 듣고 계세요?”

똑바로 시선을 맞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향수인가?”

뜬금없었지만 리아티코가 주로 향수로 많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도 많고, 당연히 재료 자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렸다. 비율대로 나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엘로니아는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생각에 입매가 절로 호선을 그렸다.

“아, 가공해서 팔아도 괜찮아요. 이 정도로 진하면 남들 3병 만들 때 우리는…… 어디 보자.”

힐끗, 옆에서 구경하던 닉스를 훔쳐봤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300병 정도?]

“그래요, 300병 만들 수 있대요!”

금화를 생각하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대충 돈이 된다는 생각은 했어도, 일반 리아티코의 100배라니.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준 카르벨이 이렇게나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저 냉랭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당장이라도 껴안고 뽀뽀라도 잔뜩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카르벨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예상과 달랐다.

“혹시 향수를 쓰고 있나?”

리아티코가 아닌 그녀에 대해 묻는 투였다. 엘로니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엥, 저요? 아뇨.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무슨 향수예요.”

“그럼 이건 무슨 향이지.”

카르벨은 작게 인상을 썼다. 엘로니아는 손목을 들어 제 몸의 향을 맡았다. 아무 냄새도 없었다. 그가 손님을 접대하는 사이 메티카에서 있던 흔적은 전부 지워낸 지 오래였다. 그가 말하는 향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향이요? 리아티코 말하는 거예요?”

“아니.”

카르벨의 상체가 서서히 움직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엘로니아의 주황빛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넘기며 말했다.

“이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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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목덜미를 지나가는 가느다란 숨결이 간지러워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바스락, 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정원에 있는 꽃조차도 옅은 향을 지닌 것으로만 심을 정도로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 것치고 카르벨의 행동은 마치 조금이라도 더 향을 맡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엘로니아는 눈을 굴리다 어색하게 물었다.

“그…… 향은 싫어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는데, 이 향은 머리가 덜 아파지는군.”

메티카 감옥에서부터 날이 서 있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진 듯 들렸다. 엘로니아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헤일튼 저택 복도를 걸을 때, 닉스가 다가온 순간. 그녀 역시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엘로니아는 눈만 굴려 그를 찾았다. 바로 옆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구경하던 닉스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었으나, 엘로니아의 두통이 줄어들었던 순간과 꼭 비슷한 상황이었다. 카르벨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낸 엘로니아는 그를 마주 보며 외쳤다.

“닉스예요!”

“……뭐?”

“저도 리아티코 향을 맡고 처음에는 어지러웠거든요! 근데 닉스가 오고 난 뒤로는 괜찮아졌어요. 공작님도 닉스와 같이 있으니까 분명 효과를 보신 거예요!”

이렇게 하면 보이지 않아도 입증할 수 있다. 엘로니아는 환희에 가득 차, 커다란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지금 공작님 근처에 닉스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카르벨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훑었다. 닉스가 있는 곳도 분명히 응시했으나,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역시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대충 본 카르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내리깔린 눈이 다시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을 때는 평소와 같은 그로 돌아온 뒤였다. 카르벨은 작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냥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아니에요. 닉스의 능력이라니까요.”

카르벨은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그래.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러 왔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공작님처럼요?”

엘로니아는 부루퉁한 어투로 반박했다. 여태 입으로 말하기를 제외하고는 썩 도움이 되지 못했던 닉스가 간만에 정령다운 일을 해냈는데, 전혀 인정받고 있지 못했다. 이 사실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더군다나 카르벨은 직접 바로 옆에서 느껴놓고 존재를 부정하니 더 얄미웠다. 대놓고 표출하는 불만을 그는 간단하게 넘겼다.

“사람을 믿게 하려면 우선 겉부터 신뢰가 가도록 해야지.”

“공작님, 외모에 편견 있고 그런 분이셨어요?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협소하시네.”

“그럼 방도 협소한 곳으로 다시 옮기는 게 좋겠군.”

엘로니아는 시종을 부르기 위해 몸을 트는 그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엘로니아의 방은 넓기도 넓었지만 화려하기까지 했다. 탁 트인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헤일튼 공작가의 정원과 그녀가 네 바퀴를 굴러도 떨어질 수 없는 침대, 그리고 금으로 장식된 화장대까지. 그가 손님을 상대하는 동안 몰래 깨물어 봤더니 진짜 금이었다. 그녀의 삶에 있어서 이런 호화스러운 방에서 살아 볼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돈 쓰는 사람이 우선이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수긍했다.

“맞죠. 공작님이 다 맞는데요, 제 말은 속이 알차면 겉으로 티가 나게 되어 있다, 뭐 이런…….”

“그래서 메티카 감옥에 갔나.”

“우리 감옥 얘기는 빼면 안 될까요? 제가 메티카 명칭만 들어도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기분이라.”

“그러니까 황실에 들어가기 전 준비할 것이 많다는 뜻이야.”

카르벨은 퍽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녀라고 몰라서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그가 앉았던 의자에 대충 앉아 제 기다란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참 부끄럽지만 그럴 만한 돈이 없는데…….”

“그대에게 부담하라고 한 적은 없다만.”

번쩍 고개가 절로 들렸다. 카르벨은 건성으로 그녀를 한 번 훑고는 기대어 있던 방문을 열며 말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가겠다 해 두었으니, 그 안에 끝내주면 좋겠어.”

“노력은 해 볼게요.”

“리아티코를 설명하던 열정과는 차이가 나는군. 또다시 가짜로 판명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겠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슬프게도 카르벨의 말이 사실이었다. 황제라면 대대로 건국할 당시의 선조와 정령사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중간하게 정령사인 척했다가는 다시 감옥으로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카르벨은 만족스러운 듯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직전. 작은 틈으로 그는 짧은 말을 전했다.

“아, 그리고 리아티코는 저택에 없으니 헛수고하지 말고. 손님이 뿌린 향수를 착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탕. 닫힌 문을 보며 엘로니아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헤일튼 공작저의 복도에는 약이 잔뜩 오른 엘로니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 * * 따사로운 햇볕과 어우러진 헤일튼 공작저의 정원은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 카르벨 공작이 약혼녀와 티타임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종들은 멀찍이서 희귀한 광경을 보고 수군거릴 뿐이었다.

“공작님께서 정말 좋아하시나 봐.”

“그러게. 그렇게 향을 싫어하시는데도 정원에서 차를 다 드시고.”

“역시, 아셀리 황녀님의 혼담을 거절할 때는 다 이유가 있으신 거라니까.”

그들은 부러운 듯 엘로니아를 응시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다.

“공작님으로 하면 안 돼요?”

“그대로 해.”

케이크를 먹던 포크를 움켜쥔 엘로니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요. 공작님이 제게 반해서 쫓아다닌 쪽이 훨씬 미담 같지 않을까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원래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공작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앞뒤가 손가락 맞물리듯이 다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니까요.”

카르벨의 이맛살이 짧게 우그러졌다. 정령을 믿지 못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는 조금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잔뜩 찌푸린 인상이 정원의 햇빛을 받아 더욱 험악해 보였다. 엘로니아는 말이 없는 그를 보며 남은 케이크를 한입에 집어넣었다. 분명 시작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폭신한 침대가 이렇게도 벗어나기 싫을 수 없었다. 일정 시간만 되면 자동으로 떠지던 눈도 오늘만큼은 예외일 줄 알았다. 조찬을 물리기가 무섭게 재봉사가 들이닥쳤다. 그녀의 전신을 낱낱이 재보던 그가 나가자 곧장 카르벨이 들어왔다. 카르벨은 과거부터 꼼꼼하게 설계를 해야 한다며 그와 그녀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떠한 연애를 거쳐 왔는지를 대략 설명했다. 황실 무도회도 참석한 적이 없는 그녀와 황실을 제외하고는 갈 일이 없는 카르벨의 접점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누가 먼저 반했는지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합의가 안 되고 있을 때 에이미가 다가왔다.

“케이크를 더 내올까요.”

카르벨은 텅 빈 플레이트 위를 훑으며 짧게 답했다.

“……어떻게, 더 들어갈 곳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한 조각만 더 먹을래요!”

엘로니아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자 카르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한 번에 먹을 만큼 얘기해. 벌써 에이미가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르겠군.”

“먹는 게 제일 사랑스럽다고 하셨잖아요.”

엘로니아는 능청스럽게 눈을 끔뻑였다. 그제야 카르벨의 입매가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곧 그의 입에서 상냥한 답이 나왔다.

“그래. 그러니까 괜히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말라는 뜻이었어.”

“어머, 다정해라.”

대화를 듣던 에이미는 눈치껏 알아듣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같은 것으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카르벨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미한 미소도 금세 자취를 감췄다. 이 말도 안 되는 사기 결혼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엘로니아는 빈 그릇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저택 내에서까지 연인인 척을 해야 해요?”

“원래 소문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가는 법이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는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가신까지 조심할 정도라면 그가 믿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미는 새 케이크를 가져왔다. 그때까지도 카르벨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너무 많이 먹는다고 눈치라도 주는가 싶어 절반도 채 먹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엘로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르벨의 옆에 보이는 자그마한 아이. 닉스와 비슷하게 생긴 정령이 카르벨의 옆에서 수줍은 듯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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