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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연애만 할래요. (4/234)

04. 연애만 할래요.2020.12.13.

못 보낸다던 말이 무색하게 남작 부부는 엘로니아가 짐을 챙겨도 붙잡지 않았다. 다 팔려나가고 기껏해야 남은 옷 몇 벌을 챙겨 평생을 살던 남작저를 나온 엘로니아는 후련한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다그닥, 헤일튼가의 인장이 새겨진 커다란 마차는 달랑, 허름한 가방 하나만을 실은 채 공작저로 향했다. 메티카 감옥에서 올 때보다 마차의 크기가 큰 것을 보면 그녀의 짐을 옮기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듯했다. 카르벨은 가방을 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가져가도 괜찮은가.”

“원래 집에 제 물건은 많지 않았어요.”

“아니. 앞으로 그 드레스들은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어.”

그래, 그는 헤일튼가다 이건가. 반박이라도 싶었으나 앞에 앉은 그의 의복은 누가 보아도 비교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소재였다. 엘로니아가 비즈니스적으로 이를 꽉 물은 채 웃어 보이자 그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예상보다 연기를 태연하게 잘하더군.”

“다행이네요! 꿀벌이라고 불러서 안 받아주실까 봐 걱정했는데.”

“딱 그 꿀벌 빼고.”

단호하게 자르는 카르벨의 말에 그녀는 모른 척 답했다.

“꿀벌이 어때서요. 달콤하고 작고 귀엽잖아요.”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에 그녀는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나 카르벨은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되려 그 부분을 콕 집어 말했다.

“그럼 그대는 앞으로는 밖에서 꼭 꿀벌이라고 부르도록.”

“……네?”

“그대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부르라고 허락했거늘. 무슨 문제가 있지?”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 감동조차 없는 말투는 허락이라고 하기에는 명백한 거절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까닥,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부를 것을 종용했다.

“앞으로 이름으로 부르면 각오하는 게 좋겠어.”

엘로니아는 소름이 돋은 제 팔을 쓸어내리며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게 해주세요.”

한참 뒤 공작저에 마차가 멈추자마자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을 보니 전부 나온 듯싶었다. 단순히 새로운 손님을 환영한다고 하기에는 하나같이 그녀의 등장을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시종장은 카르벨의 손을 잡고 내리는 그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공작님…….”

“아련하게 부르는 꼴을 보니, 손님이 와 계시겠군.”

“그게, 제가 말씀을 드렸음에도 꼭 직접 뵙겠다 하여…….”

난감한 듯 고개를 숙이는 그의 행동에서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가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혹여 벌써부터 공작부인의 업무를 분담하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부탁한다면 어차피 일찍이 가문에서도 나왔겠다,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사서 일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카르벨은 시녀 하나를 불러낸 뒤, 엘로니아에게 말했다.

“에이미를 따라 먼저 가 있게. 손님을 접대한 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네, 알겠어요!”

카르벨은 주근깨가 가득한 시녀를 하나 두고는 곧장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미라 불린 시녀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님.”

“나 아직 결혼 전인데……?”

“공작님께서 곧 혼인하실 분이라고 하셨는데, 아닌가요?”

언제 또 소식을 전달했는지, 빠르기도 하다. 혼인식을 치르기도 전부터 마님 소리를 듣다니. 말이 없는 그녀를 오해했는지, 에이미는 정원을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수다를 이어 나갔다.

“갑자기 공작님께서 혼인할 분이 올 거라 하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동안 그렇게 혼담들을 거절하시더니, 다 이유가 있으셨나 봐요!”

궁금하기는 했다. 헤일튼 가문이라면 분명 황실에서도 탐낼 만한 명예와 권력, 재력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가문에서 혼담이 꽤 많이 들어올 터였다. 에이미의 뒤를 따라가던 그녀는 별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여태 왜 혼인을 안 하고 계셨대?”

“그게……. 호호, 그러게요. 워낙 전쟁터나 기사들과 지내시는 분이다 보니, 다들 꺼리셨나?”

어째서인지 에이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거의 경보에 가까워진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엘로니아도 뛸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저택의 기다란 복도까지 도달한 그들은 대화 하나 없이 어색하게 걷기만 했다. 데브니 남작저와는 달리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에 달큰한 향이 가득했다. 정원에 핀 꽃과는 향이 달랐다. 매사에 표현이라고는 없는 카르벨의 취향이 이런 달콤한 향이라니. 생각보다 독해 머리가 아팠다.

“저택에 따로 향이라도 피우는 건가?”

“아뇨. 공작님께서 향을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따로 지시가 있지 않은 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이 향은 뭐지?”

“햐, 향이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복도를 걸을수록 향이 진해졌다. 어디서 맡아 본 향이지만 익숙한 듯 낯설었다. 원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자 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향이 제법 독했는지 자그마한 미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닉스는 바로 엘로니아의 옆에 붙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나타나자 아프던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닉스는 그녀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말했다.

[리아티코 꽃향기인가? 진해서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네.]

“보통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디 또 할 짓 없는 마법사 놈들이 개량했나.]

닉스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리아티코는 마법으로 변형된 식물로, 미미하지만 상대를 유혹할 수 있는 향이 나는 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마법 작물인 만큼 가격도 상당했다. 하지만 사악한 가격에 비해 그 효과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주로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의 인테리어나 귀족들의 향수로 쓰이는 게 다였다. 본능적으로 금액을 재보던 엘로니아는 리아티코가 제 반년 치 주급에 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어차피 나중에 진짜 정령사로 인정을 받게 될 날이 올 텐데. 이혼하면 돈이 필요할 거 아냐?’

가져온 지참금도 없기에 이혼을 해도 엘로니아는 땡전 한 푼도 받아서 나올 수 없었다. 언젠가 혼자 살아갈 날을 위해 지금부터 미리 돈을 모으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엘로니아는 넌지시 닉스에게 물었다.

“이렇게 진한 리아티코는 더 비싸려나?”

[몰라.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있다면 엄청나기는 하겠네.]

앞서가던 에이미가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엘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질문을 건넸다.

“에이미, 혹시 공작저에서 리아티코를 키우거나 하지는 않지?”

“그,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카르벨의 재산은 아니다, 이거지…….”

씨익, 웃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금화가 아른거렸다.

  * * * 달칵, 헤일튼가의 응접실 문이 열리자 훅, 달콤한 향이 몰려들었다. 카르벨은 후각이 마비되는 듯한 향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창가의 정원을 구경하고 있는 여자는 뒤를 돌지 않았다. 카르벨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응시했다. 누군가 마신 흔적조차 없는 홍차는 그대로 식어 가고 있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시나 봅니다, 아셀리 전하.”

화려한 금발이 물결치며 뒤를 돌았다. 자줏빛 눈동자에 불쾌함이 서린 것과는 다르게 입매는 호선을 그렸다. 카르벨은 소파에 등을 기대앉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은 무례하군요.”

카르벨의 노골적인 축객령에도 아셀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재밌는 소문을 들어서요.”

“소문이라 하신다면.”

무뚝뚝한 답변에 그녀의 얼굴이 일순간 움찔,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아셀리의 자주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카르벨을 향했다. 그런 것과는 달리 그녀는 상냥한 말투로 되묻고 있었다.

“공작이 내게 할 말은 그것뿐인가요?”

“어떤 말을 원하시는지 말씀을 주셔야 답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아셀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움직일수록 독한 향은 점점 응접실을 잠식해 갔다. 카르벨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애써 무시했다. 그녀가 제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졌을 혼인 소식에 바로 달려올 정도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아셀리는 상냥하게 되물었다.

“저와의 혼담이 제법 호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인가요?”

“보통 일방적인 서신이 온 것을 진행이라 표현하진 않습니다만.”

아셀리 에스피디 제1 황녀. 사교계의 선망이자 신이 내린 축복이라 불리는 외모로 에스피디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람이자 유일한 황녀.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혈통이었다. 몸이 약한 황후가 죽고 뒤를 이은 자는 무희 출신으로, 아셀리를 임신해 황실에 들어왔다. 아셀리는 차기 황위를 이을 만한 유일한 황손이었지만, 무희 태생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은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덕분에 고루한 계보에 목숨을 거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차기 황제 자리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다 한들, 하나 있던 황후 태생의 황태자는 어릴 적, 황실 서고의 화재에서 사망한 뒤이기에 별다른 적임자가 없는 상태였다. 이럴 때, 군사권을 장악한 헤일튼 가문은 그녀에게 정통성과 권력을 동시에 쥐여 줄 수 있는 매력적인 트로피였다. 그러나 이는 아셀리의 일방적인 입장이었다.

‘황후가 헤일튼가 출신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뻔뻔하군.’

카르벨은 마주 앉은 아셀리를 덤덤히 응시했다. 현 황비이자 아셀리의 모친인 벨 에스피디가 황실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는 생을 달리했다. 물론 황태자를 낳은 직후부터 건강이 급격히 좋지 않았던 터라, 그녀의 죽음이 반드시 황비의 탓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병상에서 정부의 임신 소식을 들어야만 하는 충격은 있었겠지만 말이다. 카르벨의 입장에서 얼굴도 모르는 고모에게 가진 감정이라고는 적당한 안타까움이 전부였다. 그가 아셀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카르벨은 여전히 웃는 얼굴을 고수하는 그녀를 응시했다. 아셀리는 다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제가 정령사와 혼인하신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만 했나요?”

“굳이 말씀드릴 이유 또한 없습니다.”

“아직 황실에는 정식으로 정령사를 임명한 바가 없다고 하던데.”

“곧 받을 터. 전하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닌 듯합니다.”

독한 향 때문인지, 멋대로 혼인을 추진해 놓고 맡겨 둔 양 구는 아셀리 때문인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어지간한 가문의 영애라면 황위 계승권이 있는 그녀가 알아서 해결했을 터. 가문도,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정령사라는 변수에 아셀리 역시 약이 잔뜩 오른 분위기였다. 아셀리는 정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여태 본 적도 없는 정령을 믿느니, 차라리 황실의 힘을 믿겠습니다.”

카르벨도 마찬가지였으나 입을 다물었다. 아셀리는 직접 확인을 하러 온 것이 전부였는지, 몸을 일으키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같은 처지끼리 너무 날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카르벨은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어김없이 그 주제를 가지고 그를 옥죄었다. 그녀는 명확하게 카르벨을 아래로 보고 있었다. 태연하게 일어선 아셀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은 알까 모르겠어요. 그렇게 신봉해 마지않는 헤일튼 공작이 사실은 그들이 그렇게 멸시하는 평민 출신의 입양아라…….”

“증거도 없는 말을 내뱉는 이 역시 귀족들에게 신뢰를 얻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전 공작부인께서 임신한 모습을 아무도 본 적 없다는 사실은…….”

“친정인 라티에 왕국에 가 있으셨기 때문이죠.”

카르벨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10년 전, 황실 서고의 화재로 불타 사라진 혈통집을 아셀리는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혈통집에는 전대 헤일튼 공작이 평민 고아를 입양한 사실이 적혀 있다고 했다. 그 책을 본 이는 단둘. 화재로 사망한 로엘 황태자와 그녀뿐이었다. 정말 그녀가 책을 봤는지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아셀리가 당시 화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잠시 입을 다문 아셀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말 아쉽네요. 그 책을 본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이 나 하나인 것이.”

그녀는 평생 그를 손에 올려두고 배경으로 쓸 생각뿐이었다. 결혼으로 아셀리의 트로피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르벨은 비즈니스적인 웃음을 띤 채 친절히 답했다.

“정령사가 나타났으니, 곧 그 책의 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정령사라는 말에 아셀리의 입매가 굳게 닫혔다. 미미한 불쾌함이 서린 붉은 눈동자는 그를 훑고는 곧장 휙, 몸을 돌렸다. 누군가 봤다면 매력적이라고 했을 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럼.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받을 날을 기다려 보지요.”

탕, 닫힌 문을 보며 카르벨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셀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독한 향만이 남았다. 카르벨은 최근 들어 유독 심해진 고통을 짓누르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있는 척은.”

잠시 숨을 고른 카르벨은 몸을 일으켰다. 아셀리가 정령사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으니 완벽해야만 했다. 황실에 임명을 받기 전까지 미리 숙지시켜야 할 일이 많았으나, 응접실을 비롯해 헤일튼 공작저에 꽉 들어찬 독한 향기는 생각을 방해했다. 아셀리를 만날 때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두통만 나날이 늘어갔다. 카르벨은 사전에 지시해 둔 엘로니아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눈짓하자 시종은 알아서 그의 방문을 알렸다.

“공작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네!”

우당탕, 두꺼운 문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곧 기다렸다는 듯 벌컥, 문이 열렸다.

“공작님,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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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훅, 청량한 기운이 내내 들러붙었던 독한 향을 몰아냈다. 순간 거짓말처럼 지독하게 따라오던 두통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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