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25
조앵기는 손에 촉촉한 것이 느껴지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떨렸다.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녀 머리 위의 나뭇잎을 털어 냈다.
“조앵기, 이번 생에 넌 내 거야. 나도 너만의 것이고. 어때?”
놀란 조앵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부드러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양왕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평생 증명할게.”
그의 말을 들으면서 조앵기는 가슴속에 뭔가 꽉 뭉치는 것 같았다.
“황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안 해.”
양왕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주운환에게 줄 거야.”
“당신이 즉위하는 걸 본 것 같아요. 진짜 멋있었는데.”
조앵기의 이 말에 양왕은 깜짝 놀랐다.
“당신이 떠나자 평정소축에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텅 비었어요. 그리고 난 거기 앉아 있었죠. 그러더니 갑자기 등이 환하게 켜지면서 당신이 나를 데리러 와서 같이 가려고 했어요……. 정신은 없었지만 진짜 기뻤어요! 뭐가 꿈인지 모르겠어요.”
“그건 내 꿈이었는데… 정말 너였어?”
양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조앵기도 놀란 눈으로 양왕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게 본인이 죽은 후의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이쪽의 손을 잡고 황위에 오르던 것, 이쪽의 무덤 앞에 사흘 밤낮을 엎드려 있던 것, 황위를 버리고 수많은 화살에 맞아 죽었던 것…….
조앵기는 꿈과 현실을 이미 구분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게 실은 자신의 환상이 아니라 양왕의 꿈이란 말인가? 그가 정말 황위를 포기하고 주운환에게 줬다는 말인가?
조앵기는 자신에게는 오직 그녀뿐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라 그만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전하, 날 버리지 말아요…….”
그녀는 대성통곡했고 양왕은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안 그래, 다시는 그러지 않아.”
조앵기는 도망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죽던 그 순간까지도 오직 그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한 번 더 떨어지기밖에 더하겠는가.
만약 다음이 있다면 몸이 가루가 되고 마음이 찢어지고 영혼이 날아가더라도 더 이상은 이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 * *
양왕부의 공사는 두 달 후에 끝났다. 이듬해 초봄, 두 사람은 왕부로 거처를 옮겼다. 조앵기는 매일매일 엽연채를 볼 수 있어 기뻐했다.
“엽연채가 주운환과 혼인했으면 좋겠어?”
양왕이 물었다.
“네.”
조앵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그만 만나.”
엽연채가 매일매일 양왕부를 드나들면 권문세가를 많이 알게 될 것이니 엽학문도 나중에 셈을 따질 것이다. 엽연채도 엄청난 미녀로 자랄 것이니 다른 귀족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조앵기는 양왕의 말에 크게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 * *
조앵기가 열다섯이 되던 해, 화려하게 장식된 양왕부에서 두 사람은 예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합궁했다.
혼인 후 조앵기는 뭐든지 잘 먹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서부터는 어쩐 일인지 축 늘어져 뭘 먹으려 하지 않았다. 양왕이 맛난 간식을 가지고 구슬리자 조앵기는 눈물이 날 정도로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살 빼야 해요…….”
“무슨 살이 쪘다고?”
양왕의 물음에 조앵기는 칭얼거리며 배를 만졌다.
“배가, 배가 나왔어요…….”
웃음이 터진 양왕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많이 먹어야 쟤도 빨리 크지. 우리 아가야!”
“네?”
놀란 조앵기의 몸이 뻣뻣해졌다.
“아가?”
“세 달째야.”
“아……!”
조앵기는 온몸이 굳어 버렸고 얼굴도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겁내지 마, 괜찮아.”
양왕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자신들은 전생에 많은 아이를 가졌지만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다시는 임신을 원치 않게 됐다.
자신도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도 겁이 났다.
혼인 후 매일 그녀를 진맥했기에, 이미 세 달 전부터 그녀의 임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의 태아는 어머니의 감정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녀가 임신했단 사실을 알고 불안해하면 유산되기 십상이고 그러면… 또 놓칠지도 모른다.
‘또 전생처럼 아이를 지켜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임신 사실을 잠시 감추기로 했다.
그녀의 식욕이 줄자 태의는 위장이 좋지 않다며 자궁을 튼튼하게 해 주는 약을 위장약이라고 줬다.
월경이 끊어지자 태의는 약을 많이 먹어서 몸이 불안정해졌다며 몸조리를 잘하라고 했다.
그렇게 석 달을 속여 왔다. 하지만 배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벌써 세 달이야. 우리가 지킬 수 있으니까 겁내지 마.”
양왕의 위무에 조앵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기쁘기도 했다가 다시 슬퍼지곤 하면서 며칠 동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다행히 놀라움 속에서도 별 탈 없이 지내다 일곱 달 후에 조앵기는 드디어 딸을 낳았다. 양왕은 하얗고 보들보들한 딸을 보자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본 중에 제일 예쁜 아기야!”
모두들 자기 딸이니 제 눈에만 예뻐 보이는 거라며 웃었다. 하나 직접 다가가서 보니 다른 집 아이들은 쪼글쪼글한데 이 아이는 보드레하고 뽀얀 것이 주름도 하나 없는 정말 어여쁜 아이였다!
부부는 동글동글 정말 귀여운 딸아이에게 모원원이란 이름을 붙여 주고 아명은 토끼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튿날 양왕은 궁에 들어가 장녀에게 군주의 작위를 받아왔다.
* * *
4년 후, 두 부부의 큰아들 모경풍이 태어났다.
그동안 양왕은 그녀와 함께 신나게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
예를 들면, 엽이채와 한창 깊은 사이인 장박원에게 한바탕 매질을 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엽이채와 장박원이 밀회를 할 때 밖에 불을 질러 두 사람이 정분난 것을 들키게도 했다.
소문이 전해진 그날, 온씨는 엽연채와 장박원의 혼례를 취소했다.
장씨 가문도 엽이채를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을 통한 엽이채가 임신을 한 데다 장박원이 반대하면 목을 매겠다느니 뛰어내리겠다느니 하고 있으니… 결국 엽이채를 첩실로 들였다.
손씨는 너무나도 화가 났다. 만약 두 사람이 엽연채의 혼롓날까지 발각되지 않고 만나다가 아예 도망을 갔으면 엽연채가 다른 곳으로 시집갔을 것이고, 그러면 엽이채와 장박원을 정식 부부로 맺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경이 되다니!
손씨는 딸만 신세를 망쳤단 생각에 분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엽연채도 끌어내리고야 말겠단 일념에 ‘이래서는 도무지 주씨 집안을 대할 면목이 없어요.’라며 엽학문에게 엽연채를 주운환과 맺어 주라고 부추겼다.
엽연채가 지체 높은 가문으로 시집을 가면 은정랑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되었던 엽승덕이 옆에서 거들었고, 결국 엽학문은 그 말대로 하기로 했다.
도성의 일들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결국 정선제와 태자, 정 황후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주운환이 즉위하여 엽연채는 황후가 되었다.
양왕은 병부 영패를 가지고 조앵기와 함께 응성으로 떠나 대량의 요충지를 수호했다.
한편 조앵기는 아무리 가르쳐 줘도 말을 타지 못했다. 별수 없이 양왕은 결국 매일 그녀를 앞에 태운 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광활한 대지를 누볐다.
* * *
전생과 현생, 양왕은 요연대사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었다.
전생에서 그가 물었다.
“본왕이 즉위할 수 있겠소?”
“전하는 제왕의 고귀한 운명을 타고나셨습니다. 하지만 안정을 도모하려면 두 명을 죽여야 합니다.”
“누구를 말하는 건가?”
“주씨 가문 셋째 아들인 주운환입니다.”
“안 돼! 본왕의 외조카다. 게다가 왜 죽여야 한다는 건가?”
“그 또한 제왕의 고귀한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하나 그러면 뒤의 사람은 전하가 죽이지 않아도 죽어야 합니다.”
“누구를 말하는 건가?”
“전하와 한 이불을 덮는 사람입니다.”
“누구?”
양왕이 냉소했다. 한 이불 덮는 사람이 그에게는 너무 많았다.
“양왕비?”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안 되네.”
“왜입니까?”
“어리석은 여인일 뿐인데 왜 죽여야 한단 말인가! 후에 거사에 바치는 제물이 돼야 하는 여자다.”
“왕비는 황후가 될 운명이 아닙니다.”
요연대사의 이 대답에 양왕은 언짢아했다.
“동문서답이로군. 본왕이 황후가 아닌 제물로 쓴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정씨가 본왕에게 붙인 사람인데 황후의 운명이 있을 리가.”
말은 그렇게 해도 황후의 운명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져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죽이지 않으면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전하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전하의 생명을 앗아 갈 겁니다.”
“그래서 제물이라 한 거요. 하하, 뭣보다 저 어리석은 여자가 본왕의 거사를 방해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요연대사는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휴, 죽이지 않으려면 죽이지 마십시오. 지금 보니 이미 늦었습니다.”
“빌어먹을 땡중, 요사스러운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구나!”
하지만 결국 요연대사의 말대로 그녀는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녀가 바로 그의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양왕도 벌써부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누구도 그녀의 머리를 만져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금을 배우려고 했을 때, ‘만약 연주를 잘해서 다른 사람이 데려가면 어쩌지?’ 하고 자신은 전전긍긍했다.
어리석고 바보 같고 매일 울기만 하는데, 어쩌다 그녀를 좋아하게 됐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 * *
환생한 후에 양왕은 다시 요연대사를 찾아가 물었다.
“이번 생에서 왜 몇 년 더 일찍 깨어나게 해 주지 않았는가. 그랬더라면 누님도 고생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요연대사가 대답했다.
“전하께서 이번 생에서 이미 선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소무제가 태어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는 그런 신분과 상황 속에서만 이 대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인생이란 언제나 파란만장하고, 맑음과 흐림, 차고 모자람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 번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