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23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온씨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황실 사람들 마음에 들면 며칠은 물론이고 몇 년을 붙들고 있는대도 어쩔 수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양왕도 말하지 않았던가? 왕비의 벗이라고. 그건 곧 공부 친구라는 말이었다. 황실의 공주나 군주가 그런 친구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앵기는 왕비이고 나이도 어리니 벗이나 공부 친구를 원하는 것도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양왕비가 친구를 찾는 거였군요?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잖아요, 그러니 어마마마도 오해하신 거죠.”
태자비가 서둘러 정 황후를 두둔했다.
“그래도 양왕비 또래 친구를 찾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나이가 많든 적든 저 사람이 좋아하면 그만입니다.”
이 한마디로 태자비를 조용히 만든 양왕이 이번엔 묘씨와 온씨를 향해 말했다.
“엽씨 가문 두 소저가 궁에 남아 2년 동안 왕비의 벗이 되어 줬으면 합니다. 두 부인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묘씨와 온씨는 그 서릿발 같은 눈빛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그들은 절대로 딸을 궁에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별 묘안이 없었다.
지금만 해도 정 황후가 양왕비를 혼쭐내려다가 결국 이렇게 됐고, 또한 양왕은 황제의 독보적인 총애를 받는 자식이었다. 자신들이 양왕의 부탁을 거절하고 황후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 준다 하더라도, 양왕이 정선제에게 말해 성지가 내려오면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궁에 남아서 왕비의 벗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저 아이들의 복입니다.”
묘씨가 창백한 얼굴로 선웃음을 지으며 이리 대답했다.
“저… 저는 친구 필요 없어요. 연채를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이때, 조앵기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녀는 엽연채를 보내기 싫었지만, 엽연채가 집을 그리워했다! 엽연채를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깜짝 놀라 순간 멍해졌던 온씨가 감격하며 사의를 표했다.
“조앵기!”
양왕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으나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양왕은 작은 새처럼 겁에 질린 그녀를 보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엽연채가 있는 동안 자신들 사이가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으니……. 돌려보낸 후엔 어찌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이제 보니 왕비가 저 두 친구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나 보군?”
양왕이 말을 고르는 사이, 정 황후가 끼어들었다.
“네, 맞습니다.”
조앵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거라! 나이도 어리니 부모가 그리울 거야.”
정 황후가 웃으며 상황을 정리하자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엽연채와 엽영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어서 돌아가!”
“감사합니다, 마마.”
머뭇거리던 엽연채가 한마디를 남기고 온씨에게 달려가 안겼다.
“어머니.”
“어마마마,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앵기가 말했다.
“그래.”
정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고 조앵기는 그대로 돌아서 나왔다.
양왕은 주먹을 불끈 쥐고 조앵기를 따라 나왔다.
봉의궁에서 나온 조앵기는 목수궁으로 돌아갔고, 양왕은 정선제의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응성의 일로 밤낮 골치를 썩이고 있는 정선제는 후궁에 걸음도 하지 않았고 황자와 공주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정선제가 장계를 보고 있는데 환관이 뛰어 들어왔다.
“폐하, 양왕 전하가 뵙기를 청합니다.”
“응?”
정선제가 장계를 내려놓았다.
“들라 해라.”
환관이 달려나간 후 곧 양왕이 들어왔다.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일어나라.”
정선제가 크게 웃었다.
“요즈음 짐이 바빠 너희를 볼 시간이 없었다.”
“아바마마께 긴히 청할 일이 있사옵니다.”
“오, 말해 봐라.”
“소자도 이제 열다섯이 되었으니 궁을 떠나고자 하옵니다.”
“응? 이렇게 일찍? 황자들은 대개 열여덟, 열아홉에 혼인을 하고 궁을 나가지 않느냐.”
정선제가 살짝 놀랐다.
“아바마마, 소자는 벌써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반박하는 양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선제는 양왕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조앵기는 양왕이 그리는 진정한 부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건 측비를 얻어 달라는 무언의 신호가 아닐까?
정선제는 그제야 양왕의 뜻을 깨달았다! 게다가 어제 이미 채결을 불러 양왕에게 시첩을 준비시켜 둔 뒤였다.
정선제는 껄껄 웃으며 허했다.
“명쟁도 다 컸구나! 짐이 곧 알아서 준비하마.”
양왕의 왕부는 이미 태자부와 가까운 정륭가에 골라 두었다. 조금만 매만지면 금방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아바마마, 왕부는 반드시 소자가 원하는 대로 직접 단장하고 싶습니다.”
“허허, 그래.”
정선제는 이번에도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네가 나중에 공부에 가서 직접 상의해라.”
“고맙습니다, 아바마마.”
양왕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궁은 제약이 너무 심하니 어서 나가야 한다.’ 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 * *
한편, 목수궁에 돌아온 조앵기는 정원의 나무 아래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
“왕비 마마, 저녁 후식으로 장미로를 드시겠어요, 아니면 계화로를 드시겠어요?”
궁녀가 물었다.
“뭐가 더 신선해?”
“당연히 계화로죠. 장미는 말린 꽃으로 만드는걸요.”
“그래. 그럼 계화로로 줘.”
조앵기는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곧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굉장히 낯익은 말이었다. 자신은 전생에서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너무나도 평범한 대화였지만, 평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이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이 기분 좋게 계화로를 먹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고 채결이 아름다운 궁녀 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었다.
그날 이후 자신은 고통 속에서 살았다.
양왕은 그때 그 궁녀들을 취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방에 들어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빼어난 미모의 시첩들은 계속 늘어났다. 비통한 마음에 그녀들에게 달려들어 싸우고 가슴이 찢어질 듯 울부짖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마, 왜 그러세요?”
조앵기의 넋 나간 모습에 궁녀가 놀라며 물었다. 조앵기가 머리를 휘휘 내둘렀다. 이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데… 왜 울고 계세요?”
궁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걱정스러워했다. 조앵기가 울었단 소식이 양왕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자신들을 고이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조앵기가 눈물을 닦았다. 그녀도 그제야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알았다.
“괜찮으니 나가 봐. 가서 먹을 것을 좀 가져다줘.”
조앵기가 그녀를 내보내자 궁녀는 난처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조앵기는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나중에는 육 측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양왕부에 다 데리고 있지도 못할 만큼 미녀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이미 익숙했다.
한데 다시 겪는 것뿐인데… 왜 아직도 가슴이 아프고 힘든 걸까.
도대체 왜 다시 태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엽연채를 만나고 나서야 엽연채를 만나고 토자포를 먹기 위해 환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엽연채와 토자포도 더 이상 벌어진 상처를 치료해 주지 못했다.
궁녀는 곧 마떡과 연꽃 전병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와서 석탁에 올려 두었다.
조앵기는 마떡을 집어 들었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입에 맞지 않으세요?”
멍한 조앵기의 얼굴을 본 궁녀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 생각이 없네. 주방에 가서 저녁에 송화단 냉채를 준비하라고 해 줘.”
“네.”
궁녀가 나갔다.
저녁이 되자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이고 송화단 냉채를 먹었다. 양왕은 우울한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토자포 하나를 집어 건넸다.
“한 달 후에 밖으로 나갈 거야. 그러면 매일 그 아이들을 불러다 놀아도 돼.”
궁을 벗어나면 제약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매일 엽연채와 엽영교를 불러 놀다가 오후에 데려다주면 된다. 모두 만족스러울 것이다.
조앵기는 그릇에 담긴 토자포를 보자 너무나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입을 뗐다.
“말했잖아요. 난 그 아이들 안 좋아한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마.”
양왕은 이리 대꾸하며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고, 조앵기는 모르는 척하며 송화단을 집어 들어 크게 베어 물었다.
평소에 송화단을 먹지 않던 조앵기가 오늘은 주방에 송화단을 준비하라고 하고 반 넘게 먹는 게 몹시 이상했던 양왕은 그녀가 더 먹지 못하게 남은 송화단 몇 개를 자기 그릇에 담았다.
조앵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청으로 갔다. 양왕은 차가운 물에 빠진 것처럼 싸늘해졌다. 그는 천천히 식사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목구멍으로 도통 넘어가지 않았다.
양왕도 수저를 내려놓고 대청으로 향했다. 주렴을 걷자 작은 의자에 까치발을 딛고 서서 선반의 물건을 향해 손을 뻗은 조앵기가 보였다.
“조앵기?”
양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자 깜짝 놀라 뛰어 들어왔다.
“아……!”
그의 목소리에 놀란 조앵기가 작은 청화 도자기를 손에 들고 떨어질 듯 휘청거리자 양왕이 얼른 다가가 그녀를 받아 안았다.
쨍그랑! 그녀가 들고 있던 도자기가 떨어져 조각조각 나며 검은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달콤한 냄새가 물씬 피어올랐다.
“이게 뭐지?”
양왕이 물었다.
“설탕물이 먹고 싶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조앵기가 굳은 얼굴로 대꾸하는 순간, 양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흑설탕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위를 보해서 여자들에게 좋은 음식이라 여인들이 애용하는 보양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독성이 있게 마련이다.
전생에서 그들이 왕부로 출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궁에 사고가 생겼었다. 갓 궁에 들어온 애첩이 갑자기 무언가에 중독된 것이다. 한참을 조사한 후에야 뭘 잘못 먹었는지 드러났다. 그 애첩은 저녁에 송화단을 먹고 흑설탕 생강차를 마셨는데, 송화단과 흑설탕 생강차는 상극이라 중독된 것이었다.
그때 조앵기는 놀라서 한동안 흑설탕 물도 마시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밤 그녀는 송화단 한 접시를 다 먹고 흑설탕 물도 먹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