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21
정오에 수업을 마친 양왕은 목수궁으로 돌아갔다. 침상에 누운 조앵기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깜짝 놀란 양왕이 얼른 뛰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숨결을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자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양왕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 시립해 있던 궁녀에게 물었다.
“왕비가 얼마나 잤지?”
“네, 전하. 마마께는 이각 전에 잠드셨습니다. 자기 전에 간식을 드셔서 점심은 드시지 않겠다고 하셨고, 지금은 낮잠 시간입니다.”
궁녀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양왕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는 밥도 먹기 싫다는 건가?
양왕은 침실로 돌아왔으나 조앵기를 깨우지 않고 그저 침상 곁에 앉았다.
반 시진 정도 낮잠을 잔 조앵기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침상 곁에 앉아 있는 양왕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
양왕은 그녀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조앵기는 반응이 없었다.
양왕이 밖을 향해 말했다.
“뭘 멀뚱히 있어?”
궁녀들이 뛰어나가더니 곧 세안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양왕이 잔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보고는 조앵기가 먼저 집어 들어 물을 머금고 입을 헹궜다.
“하, 가자.”
양왕이 반청까지 그녀를 안고 가서 식탁에 앉혔다.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조앵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오래 잤던가? 바깥에 있는 물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미시였다!
조앵기는 그제야 눈치챘다. 양왕과 같이 먹기 싫어서 미리 간식을 먹고 낮잠을 잤는데 그는 기어코 함께 먹으려고 이쪽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조앵기는 순식간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양왕은 새우 잣 볶음을 집어 조앵기의 그릇에 올려놨다.
눈을 굴리던 조앵기가 젓가락을 집어 들어 접시 위의 새우를 골라냈다.
옆에 선 궁녀들은 조앵기가 양왕이 집어 준 새우를 골라내는 것을 보자 낯빛이 싹 바뀌며 숨을 멈췄다.
그중 두어 명은 양왕이 불같이 화를 내길 오매불망 기다렸다.
하지만 양왕은 남은 새우 두 마리를 집어다 조앵기에게 주더니 다시 쏘가리를 집어 그녀의 그릇에 놓아 줬다.
조앵기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죽어도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건만, 양왕은 기어코 다가와서 사람을 괴롭혔다.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까지도 이쪽을 유혹하려 했다.
‘왜, 내가 바보같이 안기면 다시 죽이려고?’
그를 볼 때마다, 조금씩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양왕은 다시 갈비 한 덩어리를 집어 줬다. 조앵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미 밥을 먹었는데 나더러 체해서 죽으라는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침실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다.
주변에 있던 궁녀들 모두 숨을 멈추고 양왕을 봤다. 하지만 양왕은 아무런 표정도 아무 말도 없었다. 궁녀들은 깜짝 놀랐다. 왕비 마마가 전하에게 성질을 부리다니? 더구나 전하가 그걸 참다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양왕은 젓가락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조앵기가 자기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조앵기는 침상에 웅크리고 있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저녁도 거른 그녀는 지쳐 몽롱하게 잠에 빠졌다.
* * *
이튿날 아침.
양왕은 그녀를 일으켜 머리를 빗겨 주고 나갔다.
조앵기가 서차간에서 화본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간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앵기는 목을 빼고 바깥을 쳐다보다 곧 다시 책에 집중했다.
한참을 보다 흥미가 사라져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일순 멍해졌다.
예닐곱 살 된 여자아이 둘이 밖에서 놀고 있었다. 개중 붉은 해당화 치마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아이는 엽연채였다. 엽연채는 고개 숙여 가죽 공을 두들기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연채?”
믿을 수 없었던 조앵기는 얼른 뛰어나가 엽연채를 안았다.
“으아앙, 연채!”
“어어……!”
조앵기가 끌어안자 엽연채가 휘청거렸다.
“아이코, 연채야!”
일고여덟 살쯤 된 꼬마 아가씨가 놀라서 소리쳤다.
“왜 연채를 괴롭히는 거예요?”
“무엄하다!”
나지막한 호통 소리가 들려서 보니 위 마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앵기는 자기도 모르게 겁에 질려 엽연채를 데리고 일어섰다. 위 마마는 그 일고여덟 살짜리 꼬마를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이분은 양왕비 마마이시다!”
그 꼬마 아가씨는 놀라서 벌벌 떨며 몸을 숙였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조앵기는 그 꼬마를 제대로 보곤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반갑게 인사했다.
“영교 아니야?”
엽영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마, 소녀를 아십니까?”
조앵기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당연히 알지! 아, 연채. 그래도 네가 제일 좋아.”
조앵기는 다시 엽연채를 끌어안았다.
“작고 어려도 좋아.”
“으아앙……!”
엽연채는 그녀에게 안긴 채 울음을 터뜨렸다.
위 마마는 매일 우울해하던 조앵기가 드디어 말을 하자 안도했다.
“날씨가 차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마.”
조앵기는 활짝 웃으며 엽연채를 안은 팔을 풀고 엽영교를 불러 양손에 한 명씩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들어가자. 가서 사탕 줄게.”
안으로 들어온 조앵기가 두 사람을 주인 자리에 앉히려 하자 계속 따라오던 채 마마가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들, 예의를 지키세요.”
조앵기가 머리를 갸웃거리는 사이, 엽연채는 엽영교를 끌고 채 마마에게 갔다.
“연채.”
조앵기는 엽연채가 멀어지자 크게 상심했다.
“어서, 마마께 인사를 올려요.”
“괜찮아, 필요 없어.”
조앵기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궁에 들어가면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조앵기는 엽연채의 어른스러운 말에 깜짝 놀랐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첫 만남에는 반드시 큰절을 올려야 한다.
조앵기는 엽연채와 엽영교가 예를 행하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날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전생에서 그녀와 엽연채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양왕 서재에 딸린 화원에서 만났고 나중에는 여러 연회에서 만나며 늘 벗으로 지냈다.
“어서 일어나.”
조앵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궁녀들이 두 아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연채야, 어쩐 일로 온 거야?”
조앵기가 묻자 채 마마는 이상하다는 듯이 위 마마를 돌아봤다. 위 마마는 싸늘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엽연채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마께서 첩자를 보내 소녀와 고모를 궁으로 부른 게 아니었나요?”
조앵기가 멈칫했다. 첩자를 보냈다고? 언제……?
그러고는 곧 멍해졌다. 누가 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조앵기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미웠지만, 자신이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이 연채인 것도 사실이다.
하나 전생에도 이생에도 왕비의 신분으로 누군가에게 첩자를 보내 정식으로 초대해 본 적이 없으니 이럴 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그럼에도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연채가 여기 있으니까.
“연채야, 어서 이리 와.”
조앵기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엽연채가 다가오자 조앵기는 그녀를 안아 자기가 앉은 의자에 앉히고는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연채, 후훗.”
“어어……?”
엽연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끙끙거렸다.
“전하.”
이때, 밖에서 궁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앵기는 가슴이 답답해져 엽연채를 꼭 안았다. 채 마마는 얼른 엽영교를 데리고 한쪽에 섰다.
발소리와 함께 검붉은 망포를 입은 미소년이 들어와 곧바로 조앵기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한상 반대쪽이 아니라 조앵기 곁에 있는 수돈에 앉았다. 물론 조앵기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전하를 뵈옵니다.”
채 마마가 얼른 엽영교를 데리고 인사했다.
양왕은 그들에게 아랑곳 않고 조앵기 귓가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살짝 웃었다.
“연채가 보러 오니까 좋아?”
조앵기는 귀가 먹기라도 한 양, 고개를 숙인 채 엽연채의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양왕도 그녀를 탓하지 않고 다만 고개를 돌려 위 마마에게 말했다.
“식사 준비해.”
“알겠습니다.”
위 마마가 나가고 곧 반청에 음식이 준비되었다. 양왕은 조앵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가자.”
조앵기는 엽연채 앞에서 양왕과 싸울 수는 없어 묵묵히 따라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같이 식탁에 앉았다.
조앵기는 하는 수 없이 양왕이 집어 주는 음식을 먹었고, 양왕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식사를 마치고 양왕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저녁이 되자 엽연채와 엽영교를 돌려보내기 서운했던 조앵기는 그들을 곁채에서 자고 가게 했다.
* * *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지만 조앵기는 아직도 그녀들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온씨와 묘씨는 애가 타서 입술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중간급 귀족인 정안후부는 황실 일가와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왕비가 불러서 궁에 들어갔더니 며칠이나 묵고 있는 것이다.
아직 어린 자식들과 떨어져서 불안하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엽학문은 그게 기회라며 화를 냈다. 기회! 인신매매범에게 잡혀간 것도 아니고 궁에 들어간 것인데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거다.
애가 타는 건 온씨와 묘씨뿐이 아니었다. 엽연채와 엽영교도 집에 가고 싶었다. 조앵기가 두 사람과 함께 서차간에서 실뜨기를 하는데 엽연채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연채야, 왜 그래?”
조앵기는 놀라서 그녀를 안고 달랬다.
“울지 마.”
“마마,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엽연채의 대답에 조앵기도 실망하고 슬퍼져서 눈물이 났다.
“왕비, 왜 우세요?”
엽영교가 물으니 조앵기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연채를 보내기 싫어서. 연채야, 궁에서 살면 안 돼?”
태후나 황후, 총애를 받는 귀비들도 그들이 좋아하는 친척이나 귀족 딸들을 불러다 며칠씩, 어떤 경우에는 몇 년씩도 머물게 했다. 그러니 어쩌면 자신도 그리할 수 있지 않을까…….
“왜요?”
조앵기가 상념에 잠겨 있는데, 엽연채가 이리 물어 왔다.
“나는 연채를 제일 좋아하니까,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연채뿐이거든.”
조앵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에요! 마마에게 제일 잘해 주는 사람은 전하예요.”
엽연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박했고, 조앵기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