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19
“정안후부?”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조앵기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정안후부! 흐윽, 연채! 연채!”
조앵기는 치맛자락을 잡고 뛰어 들어가다 말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가장자리에 비켜섰다. 선물을 든 손님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스무 살 정도 된 남자가 문 앞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앵기는 잠시 보고 있다가 특별히 부귀한 차림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순간 조앵기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에 바짝 붙어서 들어갔다. 그녀 역시 화려한 차림에 아름다운 외모였기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앵기는 정안후부에 들어오자 멍해졌다.
전에 주운환의 집도 제민의 집도 가 봤었다. 하지만, 너무너무 좋아했고 좋아하는 엽연채가 정안후부에 살았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와 본 적은 없었다.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조앵기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이리저리 숨었다.
“소저, 길을 잃어버리셨나요?”
근처에 있던 여종이 물었다.
“쉬잇! 연채를 찾고 있어!”
조앵기가 목소리를 낮추자 여종은 갸웃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 우리 큰아가씨를 찾고 계시군요. 저 앞에 보이는 석가산 근처에 계세요.”
여종은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알려 줬다.
조앵기는 치맛자락을 잡고 황급히 석가산으로 뛰어갔다.
‘연채! 아아, 죽기 전 연채를 보지 못했어!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된 거야!’
조앵기는 자신이 의지할 사람을 찾았단 생각에 헐레벌떡 뛰어갔다. 하지만 막상 석가산에 도착하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앵기는 가슴이 시큰시큰해졌고 뺨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언니, 여기서 뭐 해요?”
바로 그때, 뒤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선 조앵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채?”
붉은 해당화 치마를 입은 예닐곱 살 정도의 꼬마 아이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고리 모양으로 묶고 있었다.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에 커다란 두 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조그만 꼬마였지만 조앵기는 한눈에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연채? 아아……!”
조앵기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쩜 이렇게 작아……!”
연채는 언제나 단정하고 냉정하며 자신감 넘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어서 조앵기는 그녀가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렸던 것을 잊고 있었다.
지금 연채는 아직 꼬마 아가씨였다.
조앵기는 크게 상심했다. 술이 늘어진 공 모양 장신구를 든 엽연채가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언니, 왜 그래요?”
조앵기는 엽연채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연채… 아아.”
몸을 굽혀 엽연채를 안고 어루만졌다.
“으앙……!”
하나 영문을 모르는 엽연채는 화들짝 놀라 크게 울음을 터트렸고 그 뒤를 따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났다.
“연채야!”
소리가 난 곳에는 스무 살이 좀 넘은 아름다운 부인이 서 있었다. 온씨는 웬 낯선 여자아이가 엽연채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득달같이 달려왔다.
“우리 연채!”
온씨의 돌발 행동에 주변의 이목이 모두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무슨 일이야?”
조앵기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엽연채를 더 꼭 안았다.
“아아, 연채야… 나야……!”
작고 마른 조앵기가 끙끙대며 엽연채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곧 귀부인들에게 가로막혔고 놀라서 꽈당 하고 엽연채와 함께 넘어졌다.
“연채야!”
온씨와 채 마마는 기함하며 얼굴에 핏기가 다 사라졌다.
하지만 조앵기는 그들이 다가서기 전에 일어나 엽연채를 일으켰다. 조앵기가 엽연채를 데리고 달아나려고 뒤도는 찰나, 깜짝 놀라 다시 쿵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바로 양왕이었다.
“아……!”
조앵기가 창백한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양왕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온씨를 비롯한 모두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 그중 그를 알아본 귀부인들이 급히 인사를 올렸다.
“양왕 전하를 뵈옵니다.”
온씨와 채 마마도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됐으니 급히 몸을 숙였다.
“전하를 뵈옵니다.”
양왕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고 조앵기만 바라봤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조앵기는 창백한 얼굴로 엽연채만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단 듯이.
양왕의 수려한 얼굴은 얼음장 같았고 눈에서도 한기가 철철 흘렀다. 소매 아래 꽉 쥔 그의 주먹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리 와!”
양왕이 소리쳤다. 하나 바닥에 주저앉은 조앵기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에게 등을 진 채 다만 엽연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양왕의 눈빛이 훨씬 어두워졌고 목소리 또한 한층 차가워졌다.
“조앵기!”
그를 등지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호한 뒷모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양왕은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으나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조앵기, 본왕과 돌아가자.”
양왕은 그녀를 끌고 나갔다.
“으아악……!”
결국 무너져 버린 조앵기는 비명을 질렀다.
“싫어요! 연채와 같이 있을래요……! 당신은 싫어요! 당신, 필요 없다고요!”
양왕의 머릿속은 하얘지고 놀라움과 노여움이 교차했다.
“돌아가자니까!”
“아아악……! 싫어!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왜 가야 해요? 나를 죽일 거야……! 떨어뜨려 죽일 거잖아요… 엉엉……!”
순간 양왕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는 힘껏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던 엽연채를 끌어내 온씨 쪽으로 밀었다.
“어머니… 으아앙……!”
놀란 엽연채가 울면서 온씨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울지 마, 뚝.”
온씨가 엽연채를 안고 달래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앵기의 눈에서 쉴 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꼭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연채… 흐윽…….”
양왕은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아아……! 연채! 연채야!”
조앵기는 양왕의 어깨너머로 울고 있는 엽연채를 보며 한껏 발버둥 쳤다.
“그냥 여기서 죽으면 안 돼요? 몇 년 후에 죽이지 말고요……! 데리고 있다 버리지 마요……! 지금 죽을래요! 으아앙……!”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원망스러운 마음에 그의 어깨를 힘껏 물었다.
“아니, 차라리 물어뜯을 거야! 당신을 물어서 죽여 버릴 거야! 우우……!”
양왕은 어깨가 어릿어릿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비수가 되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기에, 어깨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투둑, 바닥에 선혈이 떨어졌다. 그를 따라온 궁인들과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러 댔다.
“전하, 피가 납니다!”
엽학문이 비집고 들어와 환심을 사려는 듯 이리 말했으나 양왕은 서늘한 눈으로 쏘아보며 그를 내쫓았다.
“꺼져라!”
망신만 당한 엽학문은 양왕이 조앵기를 안고 성큼성큼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화원을 떠나자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야?”
“방금 그 사람 양왕비 같은데!”
“정안후부 세자 부인과 아는 사이인가 보지.”
사람들이 온씨를 둘러쌌다. 창백한 얼굴의 온씨가 엽연채를 안고 말했다.
“우리 아이가 많이 놀라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화원을 나와 수화문에 도착한 양왕은 조앵기를 마차에 태웠다.
조앵기는 하염없이 울었다. 입 안에 가득한 비릿한 피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가 아프고 시렸다.
양왕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이 아프지? 입 열어 봐.”
“아…….”
조앵기는 훌쩍거리면서도 고분고분 입을 열어 보여 줬다. 하지만 곧 양왕을 밀쳤다.
“아, 저리 가요!”
그녀는 구석에 웅크려 바들바들 떨었다.
양왕은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보자 산 채로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다가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조앵기는 하마터면 또다시 울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도리어 몸에선 절로 힘이 풀렸다. 끝내 그녀는 다만 눈을 감은 채 울지도, 발버둥 치지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양왕은 더욱 두려워져 그녀를 바짝 그러안았다. 하지만 아무리 꼭 껴안아도 그녀는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너도 그날 절에서 기억난 거지? 나도… 생각이 났어.”
양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앵기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입술을 꽉 깨문 그녀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 사람은 나를 죽였던 남자야. 무서워! 너무너무 두렵다고!’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도, 그와 함께 있고 싶지도, 아니, 아예 그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조앵기는 마차 구석에 웅크려 두 무릎을 감싸 안았다.
양왕은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 속에 그의 숨결이 가득했다.
“미안해. 널 잃을 수 없어서… 그래서 돌아온 거야.”
양왕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조앵기는 놀랐지만 조금도 감동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양왕이 환생한 것과 그의 음모를 알아챘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이쪽을 달래고 속이려는 것뿐이다!
그 차디찬 불신의 눈빛에 양왕은 가슴이 에이는 듯 고통스러웠다.
양왕이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조앵기는 그 손이 그저 차갑게 그녀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믿어 줘.”
양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전생의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고, 조앵기는 크게 심호흡했다. 냉정해야 한다.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제대로 생각하려 애썼다. 잠시 생각하다 용기를 짜냈다.
“안, 안심해요. 황후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 우, 우리도 헤어져요……. 그러면… 흐윽…….”
조앵기는 말을 하다 말고 무서워서 마차 구석에 다시 웅크렸다.
검은 늪 같은 양왕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앵기는 울음이 터졌다. 두려움이 극에 달하자 도리어 화가 났고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울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요? 당신 계획이 뭔지 다 알아요! 나에게 잘해 주는 척하면서 그 사람들을 속일 거잖아요.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는 걸 보여 주려고 나를 떠밀어 죽일 거잖아요. 20년 동안 당신이 당한 모욕을 돌려주려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난 이제 당신의 계획을 알아요! 아직, 아직 내가 필요하잖아요……! 흐앙……! 고분고분 따르라고요? 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요?
그래요,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바보 같아도… 난 살고 싶어요! 이대로 달라지는 게 없다면… 황후에게 가서 당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고 말할 거예요. 또 당신과 주운환이 한패라고도…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