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17
주운환은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다가가 보니 화려한 보라색 비단옷을 입은 열예닐곱 정도 된 소년이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주운환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시죠?”
양왕은 그저 묘비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분은 내 누님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주운환은 놀란 눈으로 양왕을 보았다. 그는 운 이낭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그런 곳으로 팔려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년은 보자마자 대단한 부자이거나 신분이 높은 귀족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소년이 운 이낭이 자신의 누님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양왕은 일어서서 주운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본왕은 현 황제 폐하의 넷째 아들 모명쟁이라 한다. 이분은…….”
그는 살짝 솟아오른 무덤을 가리켰다.
“본왕의 친누님이자 적녀인 운하 장공주, 모항慕姮이라고 한다.”
전생의 자신은 모든 짐을 지고 복수와 황위를 위한 인생을 살았다. 하니 이번 생에서는 오직 그녀에게 인생을 바치고 싶었다.
복수와 황위는 지난 생에서 이미 이루었다. 이번 생에는 그 모든 것을 주운환에게 맡길 것이다.
* * *
양왕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마차를 타고 떠났다. 마차는 성문을 지나 대명가를 거쳐 궁에 도착했고, 마침내 동화문에서 멈췄다.
곧 위 마마가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뒤로 조앵기가 폴짝폴짝 따라오고 있었다.
“왕비 마마.”
걸음을 멈춘 위 마마가 조앵기를 향해 돌아섰다.
조앵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앞에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다. 위 마마가 신호를 하자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휘장 안에서 손이 쑥 나오더니 조앵기를 잡고 마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양왕의 부축을 받아 조앵기는 낑낑대며 올라가 그의 품에 안겼다. 조앵기는 한참 후에야 그에게서 벗어나 창가에 달라붙어 창밖의 야경을 구경하며 신이 나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매년 구월 초아흐레면 양왕은 늘 그녀를 데리고 도성 밖으로 성묘를 갔었다. 누구의 묘인지는 조앵기도 몰랐다. 그저 꽃을 꺾어 화환을 만들고 뛰어다닐 뿐이었다.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날. 그녀는 해마다 그날을 기다렸다.
이날도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양왕은 혼자 나가 버리더니 어두워진 후에야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마차는 도성을 벗어났지만 밖이 깜깜해 그녀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조앵기는 차창에 달라붙어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풀숲에서는 여우 비슷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앵기는 겁이 나면서도 신이 났다.
‘히히, 나는 마차 안에 있으니 못 물겠지! 못 물지!’
“하.”
그를 등지고 차창에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동그란 머리채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자 양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앵기는 한창 바깥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찍!
풀숲에서 갑자기 커다란 들쥐가 튀어나와 시퍼런 눈을 하고 울었다.
“으악……!”
놀란 조앵기가 마차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양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앵기, 이리 와! 너 때문에 마차가 부서지겠어.”
조앵기는 얌전히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일각 정도 흐른 후 마차가 드디어 멈췄다.
양왕이 먼저 내려 조앵기를 안아 내려 줬다.
마차에서 내린 조앵기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웬 호수 앞에 서 있었다. 어두운 밤, 저 멀리서 마을의 등불이 환하게 빛나고 호수에는 밝은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조앵기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는 어디예요? 성묘하러 안 가요?”
양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성묘 안 해. 가자.”
그는 그녀를 데리고 호숫가로 향했다.
호숫가에는 배 한 척이 서 있었다.
구월은 선선하고 상쾌한 계절이었다. 가을바람이 불자 수면에 비친 달빛이 찰랑거렸다.
개구리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오고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조앵기는 그를 따라갔다.
“전하, 전에는 늘 성묘하러 갔었는데 올해는 정말 안 가요?”
“그렇게 가고 싶어?”
양왕이 물었다.
힐끗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만약 좋아한다 하면 그는 분명 다음부터 그녀를 데리고 다니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전… 그냥 물어본 거예요.”
양왕이 피식 웃고 돌아섰다. 그녀가 화려한 치마를 들고 배에 오르자 그가 한 손을 뻗어 부축했다.
갑판에 올라선 조앵기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한쪽에는 작은 원탁이 놓여 있었다.
“앉자.”
양왕이 원탁 앞에 그녀를 앉히고 그도 옆에 앉았다.
“전하, 음식을 준비할까요?”
위 마마가 말했다.
“그래.”
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 이야기에 조앵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조앵기의 배는 벌써부터 꼬르륵거리고 있었다.
위 마마와 사람들이 금세 음식을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차렸다.
어송당민연자, 어육양산약, 청증즉어, 속자민리어, 소어두, 황화어탕……. 아홉 가지 요리와 탕 하나가 모두 생선이었다.
음식을 보자 조앵기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생선, 생선이다! 그녀는 생선을 좋아했다!
하지만 양왕은 그녀에게 생선을 못 먹게 했었다. 생선을 먹을 때면 늘 목에 가시가 걸렸기 때문이다.
전에는 너무 먹고 싶어 양왕이 아무리 인상을 써도 모른 체 생선을 집어 든 적도 있었다. 결국 그가 화를 내며 그녀의 젓가락을 막고는 가시를 발라낸 생선을 그녀의 그릇에 놔 주었다.
“이 바보야, 가시에 걸려서 죽을 게 걱정되지만 않았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래서 그녀는 생선을 먹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그야말로 생선 잔치였다.
조앵기는 생선을 먹을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양왕이 자신을 노려보며 ‘보기만 해, 먹지 마!’라고 말할까 봐 걱정도 됐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조앵기는 속으로 크게 상심했다. 그는 진짜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왜 그래?”
양왕은 고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 속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몽실몽실한 그녀를 보니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싶었다.
“먹어도 돼요?”
조앵기는 조심스러운 눈길을 그에게 향해 이리 물었고 양왕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
“먹지도 못하는 걸 뭐 하러 차려 놨겠어?”
조앵기는 희희낙락 젓가락을 들어 잉어부터 한 점 집어 들었다. 그런데 ‘탁’ 하고 양왕의 젓가락이 그녀를 막았다.
“어송하고 생선살만 먹어. 다른 건 집지 마.”
양왕의 매서운 눈길이 그녀에게 멈췄다.
조앵기는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짜증이 났다. 어송도 좋지만 신선한 생선이 훨씬 좋은데! 하지만 생선을 먹으면 목에 가시가 걸리고 그러면 또 힘들어질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조앵기는 잠자코 그의 말대로 생선 살을 집었다. 양왕은 그녀에게 어탕을 떠 주고 붕어를 한 점 집어 가시를 발라내어 그녀 그릇에 놓아 줬다. 그러고는 숟가락으로 어탕 국물을 떠서 생선 살을 부드럽게 적셔도 주었다.
조앵기는 좋아라 하며 숟가락으로 한참 먹고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전하, 더 주세요!”
양왕의 기분이 매우 좋은 날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런 날은 애교를 부려도 된다. 달라붙어 칭얼거리면 그는 많은 것을 주곤 했다.
양왕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황화어를 발라 줬다. 조앵기는 황화어를 먹고 잉어도 먹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나고 밤은 점점 깊어졌다. 하지만 양왕은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배 가장자리에 앉아 야경을 감상했고 양왕은 그녀 가까이에서 금을 연주했다. 배에 기대 보는 야경은 고요하고 아름다웠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 역시 사람을 취하게 할 만큼 훌륭했다.
한참 곡을 듣다가 피곤해진 그녀가 하품을 했다. 그때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며 오색찬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우와……!”
조앵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꼼짝도 하지 않고 구경했다. 궁에서도 기념일마다 불꽃놀이를 하니 전에 많이 봤었다. 하지만 오늘 궁이 아니라 조용한 야외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꽃불이 평소보다 훨씬 찬란했다.
양왕이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때, 멋있지?”
고개를 끄덕이던 조앵기가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아……!”
배는 호숫가로 향하고 있었다. 호숫가에 삐죽삐죽 솟아 나온 나뭇가지가 동그랗게 땋아 올린 머리에 파고들면서 조앵기가 아파했다.
양왕은 얼른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꺾고 조심스럽게 머리에서 남은 나뭇가지를 빼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조앵기는 자연스레 그의 앞에 앉아 머리를 빗겨 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양왕은 빗을 들고 그녀 뒤에 앉아 익숙한 손짓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정리를 마친 후,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고개 숙여 그녀의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다른 식으로도 안고 싶었다. 하지만 조앵기는 오늘 밤이 지나야 겨우 열세 살이었다. 양왕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살짝 웃었다.
“토자포, 너무 어리니까 2년은 더 키워야겠다.”
전생에서는 아무것도 몰라 너무 어린 나이에 합궁을 했다. 그때 그녀는 바로 회임을 했지만, 결국…….
그 아이들을 떠올리자 양왕은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한편, 이마에 촉촉하고 따뜻한 것이 느껴지자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그를 밀쳤다. 양왕은 그녀가 거부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옥죄어 왔다.
“날 왜 밀어?”
흠칫 놀란 조앵기가 그의 품을 밀어내려 하며 변명했다.
“더워요.”
“오늘 밤은 시원한데. 자, 자러 가자.”
양왕이 말했다.
이야기하면서 그녀를 선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 조앵기를 다시 품에 안았다.
등불은 벌써 꺼졌다. 배에서 자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배는 멈춰 있었지만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서늘한 날씨, 흔들리는 선실, 따뜻한 품속. 조앵기는 그의 숨결 속에서 숨 쉬면서 점차 편안해졌고 따라서 눈도 가늘어졌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양왕을 계속 밀어내고 있었다.
‘절대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양왕부에서 생활하게 되면, 즉시 도망갈 테다! 양왕부 동각문 근처 허름한 담장 풀숲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까 거기로 빠져나갈 수 있어.’
그녀는 속다짐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서 열세 살이 되던 가을도 이런 날씨였다! 정선제가 그에게 미인을 하사했고… 자신은 심장을 찔린 듯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듬해 원소절이던가, 정선제가 그에게 육 측비와 연을 맺게 했다. 그리고 여름에 자신들은 양왕부로 출궁했다…….
‘지금 내가 몇 살이더라?’
조앵기는 생각에 잠겼다. 구월 초열흘, 그녀의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