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49화 (849/858)

번외 토자포 16

이튿날 아침, 그의 품속에서 깨어난 조앵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침상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이자마자 다리가 찌르는 듯 아파 소리를 지르며 그의 옆에 쓰려졌다.

“아윽……!”

“음…….”

눈을 뜬 양왕이 그녀를 보았다.

“뭐 해?”

조앵기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넘어졌어요.”

조앵기는 말을 하면서도 일어나려고 팔을 버둥거렸다.

양왕은 몸을 일으켜 그녀를 잡았다. 하늘이 빙글 돌더니 조앵기는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가 미처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양왕이 차갑게 웃으며 그녀를 단단히 감아 안았다.

“움직이지 마.”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을 보자 조앵기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을 의심할 수 있으니 평소와 너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평소처럼 지내다 기회가 생기면 탈출해야 한다! 조앵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양왕은 그녀를 흘깃 보더니 역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의심하지 않도록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 평소처럼 지내면서 조금씩 그녀의 가시를 어루만져 다시 자신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 부부는 평온했고, 속으로는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전하?”

밖에서 위 마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마마.”

양왕이 차갑게 대답했다.

“네.”

문을 열고 위 마마가 들어왔고, 그 뒤로 두 줄로 늘어선 궁녀들이 따라왔다.

궁녀들은 대야, 양치할 소금물과 버드나무 가지 같은 세안 도구를 들고 왔다.

위 마마와 궁녀들은 양왕이 조앵기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자 흠칫 놀랐다.

학당에 가야 하는 양왕은 늘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서 세수를 했었다. 가끔 쉬는 날이면 조앵기와 함께 씻을 때도 있었지만 늘 나란히 앉아서 각자 씻었다.

그런데 오늘은 저런 모습으로…….

위 마마는 잠자코 소금물이 든 잔을 건넸다.

양왕은 그걸 받아 조앵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리 와.”

조앵기는 훌쩍이며 소금물을 입에 머금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흥! 우선은 져 줄 거지만, 나중에 기회를 봐서 반드시 도망칠 거야.’

위 마마와 궁녀들은 그들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눈치가 아주 빨랐는데, 오늘 조앵기를 대하는 양왕의 태도가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설마…….

위 마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 세안을 마친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반청으로 갔다.

위 마마는 침상으로 다가가 혹시나 하는 눈으로 이불을 살폈다. 한참 살펴봐도 의심스러운 핏자국이나 얼룩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위 마마는 양왕이 조앵기를 어떻게 한 건 아닌지 걱정했다. 양왕은 이제 몇 달 후면 열다섯이 된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폭발하고 사랑에 눈을 뜰 나이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지만 두 사람은 부부이니 그런 남녀의 유별을 따질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양왕의 유모였던 위 마마는 양왕이 그런 쪽에는 조금이라도 늦게 눈을 떴으면 했다. 일찍 알아 봐야 몸에 좋을 것도 없으니까.

위 마마가 반청에 들어오니 양왕과 조앵기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궁녀들이 음식을 차리는 동안, 양왕은 조앵기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앵기는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후 고리 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아서 분홍색 비단 끈으로 묶은 모습이었다.

“머리를 왜 올리지 않았어?”

양왕이 차가운 투로 묻자 조앵기는 눈길을 돌리더니 역시 차갑게 대답했다.

“컸으니까요. 이제는 땋아 올리지 않을 거예요.”

양왕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 뭐 하는 거예요?”

조앵기는 그 바람에 몸이 휘청했다.

양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위 마마를 비롯한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침실로 따라 들어가니 양왕이 조앵기를 의자에 앉혀 놓고 그녀의 머리를 풀고 있었다.

“아아……!”

조앵기가 버둥대는데도 양왕은 그녀를 잡고 금방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틀어 올렸다.

조앵기는 억울함을 참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양왕은 만족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열다섯 살까지는 이렇게 해.”

조앵기는 화가 치밀었다. 머리 모양까지 자기가 하란 대로 해야 하다니. 하지만 탈출 계획을 위해서는 일단 참아야 했다.

인내심을 발휘해 식사까지 마친 조앵기는 절뚝절뚝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녀가 이불을 덮자 등 뒤에서 양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놀란 조앵기가 뒤를 돌아보자 양왕이 겉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와 그녀를 당겨 안았다. 조앵기가 몸을 뺐다.

“잘 거예요.”

“나도 잘 거야.”

그녀 머리 위에서 양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당 안 가요?”

조앵기가 물었다.

“난 다쳐서 오늘은 쉬어야겠어.”

조앵기는 벗어나려 고개를 흔들었다. 어딜 다쳤다는 거지? 저렇게 멀쩡한데!

양왕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속옷을 잡아당기자, 조앵기는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그가 조금 변한 것 같아 이상했는데, 불현듯 그가 이제 겨우 열네댓이란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양왕 머릿속은 온통 자신의 옷을 벗겨 볼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던 그 바보가 아니었다. 전생에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부였기에 그의 몸에 점이 몇 개가 있는지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앗……!”

셈을 마친 조앵기가 갑자기 놀란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양왕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 그의 왼팔은 자신의 목을 감싸고 오른팔은 자신의 허리를 감아 꼭 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자신의 머리 위에 기대어 있었다.

순간 양왕의 체온과 특유의 은은한 체취가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어느새 몸이 달아오르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계속 그녀의 머리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조앵기, 후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조앵기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양왕이 꽉 껴안고 있었고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망가고 싶어 울고 싶었다. 정말이지,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조앵기는 발버둥 쳐 보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깬 그녀가 낑낑거리며 일어나 대청의 평상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길게 빼고 창밖을 보니 양왕이 정원에 앉아 가끔씩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흡……!”

조앵기는 깜짝 놀라 움츠렸다. 이제는 그가 목을 졸라 죽일지도 모르니 잠도 편히 잘 수 없게 됐다.

* * *

그날의 추락 사고 이후 양왕은 자신의 궁전에서 쉬면서 근학전에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족히 한 달은 쉬었다.

어느 날, 정선제가 양왕을 보러 목수궁에 들렀다. 양왕은 원탁에 앉아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양왕의 말에 정선제가 살짝 한숨을 지었다.

“명쟁이는 총명해서 배워야 할 것들을 미리 공부했지. 짐은 네가 너무 서두르다 오히려 잘못될까 봐 걱정했단다. 당분간은 한가하게 지내는 것도 좋겠지. 몸조리하면서 시간이 나면 금을 연주하든지 그림이나 그리면서 편히 지내거라.”

“네.”

양왕은 여전히 창밖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정원, 한편의 나무 아래에는 분홍색 그림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양쪽으로 틀어 올린 검은 머리만 보였다. 그녀는 작은 나뭇가지를 쥐고 바닥에 무언가 낙서를 하고 있었다.

“폐하.”

채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선제에게 다가왔다.

“응성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정선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가시더니 양왕에게 말했다.

“명쟁아, 몸조리 잘하렴. 짐은 이만 가 봐야겠다.”

정선제는 황급히 돌아갔다.

정선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양왕은 눈길을 떨궜다.

요즘 서노는 걸핏하면 응성을 침범했고 얼마 못 가 주씨 가문은 패전한다.

석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주씨 가문의 거듭된 판단 착오로 응성이 함락되어 주씨 가문의 쟁쟁한 영웅들과 십만 병사는 그곳에 뼈를 묻는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오직 주정과 주비양뿐.

다행히 제때 도착하는 강왕과 풍씨 가문의 군사, 그리고 남아 있는 주씨 집안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길을 터 준 덕택에 간신히 응성은 지킬 수 있으리라.

주씨 가문 노태야는 전사한 병사들의 유가족을 위해 문중 가산 대부분을 팔아 치운다. 주씨 가문은 가세가 크게 기울어 함께 살던 식솔들도 뿔뿔이 흩어진다.

응성 전투 때문에 응성뿐 아니라 도성까지 황폐해진다.

* * *

구월 아흐레, 중양절이었다.

성문을 나온 낡은 마차 한 대가 천천히 좁은 길을 지나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풀밭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여덟아홉 살쯤 된 남자아이가 내려섰다. 허옇게 바랜 옷도 아이의 보름달처럼 훤한 용모를 가릴 수 없었다. 바로 주씨 가문에서 제일 눈에 띄지 않는 서자, 주운환이었다.

주운환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이낭에게 향을 올리러 왔다.

보통은 서자라도 가문의 주인 신분이니 이낭은 그보다 신분이 낮았다. 그리고 주인이 이낭에게 제를 올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씨 집안 안주인 진씨는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었다.

“이낭이라도 어쨌든 너를 낳아 준 사람 아니냐. 네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딱하기도 하지. 나도 인정이 있는 사람이다. 청명, 중원 그리고 중양절마다 가서 절을 올리도록 해라.”

주운환은 마음이 몹시 평온했다.

그는 집안의 서자였고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생모는 심지어 기루 출신이었다. 그러니 다른 서자들보다도 더 비천한 신분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생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예전에는 대장군을 꿈꾸었다. 어른이 되면 응성으로 향해 먼저 가 있는 형제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세는 한순간에 기울었고, 이젠 그곳에 갈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졌다. 아버지는 늘 그에게 글공부를 하라며 닦달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주운환을 예뻐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관의 길을 버렸을 뿐.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하는 서자는 아무나 마음껏 짓밟을 수 있는 진흙처럼 하찮은 사람이 되었다.

하여 주운환은 잠자코 참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해야 다른 사람들이 그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지 않을 테니까.

진씨가 운 이낭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 역시 일부러 그녀의 출신을 언급해서 그를 모욕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벌써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무시당하면 또 어떤가. 이낭에게 제사를 올리는 그 시간 동안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데.

가녀린 아홉 살 소년은 바구니를 들고 무덤을 향하다가 멈칫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저 멀리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이 그를 등지고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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