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15
위 마마가 조앵기에게 다가왔다. 우두커니 바닥에 앉아 있는 조앵기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흠뻑 젖어 있었다.
“왕비, 소인이 업어 드릴게요. 얼른 업히세요.”
위 마마가 황급히 몸을 숙였다.
궁녀 두 명이 조앵기를 일으켜 위 마마의 등에 업혔다.
양왕에게 마련해 준 처소에 도착하니 양왕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조앵기를 의자에 앉히고 나서야 나 의정이 짬을 내어 그녀를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마마께서도 다리를 크게 다쳤네요.”
“그래요?”
위 마마도 놀랐다.
나 의정이 조앵기의 바짓단을 걷어 올리니 왼쪽 발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떨어질 때 삐어서 그렇게 부은 것 같았다. 굉장히 아플 텐데 조앵기는 신음성조차 내지 않고 있으니 몹시 이상한 일이었다.
“마마, 발목이 아프지 않으신가요?”
위 마마의 물음에 조앵기는 그제야 발목이 아픈 게 느껴졌다.
“응.”
나 의정이 조앵기의 다리를 세세히 살펴보았다.
“괜찮습니다. 삐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잘 치료해 주세요, 의정.”
위 마마가 말했다.
나 의정이 조앵기의 다리를 치료하고 난 후, 정선제가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다.
조앵기는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명쟁아, 깨어났구나. 좀 어떠니?”
사람들 사이에서 정선제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양왕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 특유의 살짝 잠긴 듯한 목소리가 조앵기의 귀에 들어오자 그녀의 몸이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정말 그였다. 그의 목소리, 한 번 죽었다 깨어났다 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바마마, 궁으로 돌아가요.”
다시 양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 몸만 괜찮으면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정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왕이 괜찮다고 대꾸하니 정선제는 밖으로 나가 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고 명했다.
정선제는 돌아가는 동안 내내 양왕과 한 마차를 타고 그의 곁을 지켰다. 조앵기는 위 마마와 함께 원래 타고 왔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궁으로 돌아오자 정선제는 친히 목수궁까지 양왕을 데려다주고 침상에 눕혔다. 그러고는 곧 조정으로 돌아가 정무를 처리했다.
조앵기는 대청에만 머무르며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밉고 미웠다! 이편을 밀어 떨어뜨리게 놔둔, 그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위 마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먼저 침실로 가 양왕에게 알리고 다시 대청으로 와서 조앵기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반청에 가서 식사하세요.”
조앵기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마음속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이내 발소리가 들리더니 침실에서 나온 양왕이 반청의 입구에 서서 쌀쌀맞은 얼굴로 말을 붙였다.
“거기 앉아서 뭐 해? 와서 밥 먹어.”
고개를 든 조앵기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눈앞의 양왕은 이제 열네댓 살의 소년. 외양으로 성별을 확실히 구별하기는 아직 힘든 나이였다. 특히나 양왕처럼 절세미남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눈매는 아찔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애티가 남은 얼굴과 달리 눈빛은 검은 호수처럼 깊고 짙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조앵기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발을 삐었어요. 여기서 먹을래요.”
그녀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려뜨리고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소리여야 하는데 그 소리는 되레 점점 가까워졌다.
놀란 조앵기가 고개를 들려는데 그가 먼저 몸을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아앗……!”
당황한 조앵기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양왕은 조앵기를 안고 반청에 들어와 의자에 앉혀 놓고 자신도 그녀의 곁에 앉았다. 조앵기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다 새파래졌다.
한편에 서 있던 궁녀와 환관들은 이 낯선 광경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서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양왕은 국자를 들어 탕을 한 그릇 떠서 조앵기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
조앵기는 탕 그릇을 들고 조금씩 마셨다. 탕을 마시던 그녀는 갑자기 놀라서 손을 멈추고 곁눈질로 그를 보았다.
양왕이 그에게 탕을 떠 주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그는 종종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거의 스무 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리고 혈기왕성할 때의 그는 툭하면 그녀를 노려보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망신을 주기 일쑤였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그녀를 위해 소소한 배려를 해 주곤 했다.
그것을 깨닫자 조앵기는 원망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태자를 물에 빠뜨렸던 일이나 그와 함께 지내면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 모두, 태자와 정 황후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이었을 뿐이다. 자신이 태자에게 붙잡혀 성루에 끌려갔을 때 그가 그의 입으로 실은 단 한 번도 이편을 좋아한 적 없다고 밝혔듯이.
조앵기는 괴로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드시옵니다.”
양왕이 조앵기를 데리고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아바마마.”
“명쟁아, 좀 괜찮아졌느냐?”
정선제가 재빨리 다가와 양왕을 부축했다. 양왕은 싸늘한 눈빛으로 정선제를 흘깃하곤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앵기를 돌아봤다.
“양왕비는 다리도 다쳤으니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가 쉬어라.”
조앵기는 간절한 눈으로 정선제를 보며 청을 올렸다.
“아바마마… 다리를 다쳐서 곁채에서 자고 싶습니다.”
정선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나에게 고한다고? 그가 멍멍해 있는 사이, 계속 조앵기를 주시하고 있던 양왕이 얼른 말했다.
“무슨 말이야? 내가 너를 다치게 하기라도 할 거란 거냐? 어릴 때 다리를 다쳐 누워 있을 때, 나는 네가 누르고 얼굴을 핥아도 가만히 있었어.”
조앵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토자포 꿈을 꾼 탓에 그의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어 놨었다. 이튿날 아침 야옹야옹 고양이 흉내를 낼 때까지 단단히 혼났었고.
정선제가 헛기침을 했다.
“그런 일도 있었더냐?”
“위 마마.”
양왕의 부름에 위 마마가 다가와 조앵기를 부축해 나갔다.
양왕이 그녀를 돌아보고는 정선제와 함께 대청으로 갔다.
“아바마마, 가시죠.”
조앵기는 목욕을 마친 후 침상에 들어가 잔뜩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물기 어린 몸으로 들어온 양왕은 번데기처럼 침상에 웅크린 조앵기를 이불까지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이리 와.”
“왜 그래요?”
조앵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양왕이 이불을 걷자 조앵기가 버둥거렸다.
“아아… 뭐 하는 거예요?”
“호 해 줄게.”
양왕은 그녀의 상체를 당겨 안았다.
“불어 주는 거 싫다고요!”
조앵기가 짜증을 내자 양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원래 좋아했잖아? 아무 데나 다치기만 하면 울면서 호 불어 달라고 내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잖아. 안 해 주면 울었으면서.”
눈을 감은 조앵기가 삐죽거렸다.
“아, 그랬나요? 지금은 필요 없어요. 그건 애들을 속이는 거예요! 아무런 효과도 없다구요. 앗……!”
양왕이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조앵기가 비명을 질렀다.
“효과가 없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날 귀찮게 한 거야?”
조앵기는 더 화가 났다. 전에는 효과가 있었다. 그건 진짜였다.
넘어지든 어쩌든 다치면 그때마다 입김을 불어 달라고 그를 붙잡았었다. 그가 호호 불어 주기만 해도 아프지 않았다. 다치면 그에게 불어 달라고 할 수 있어서 내심 기분 좋기도 했다.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모두 그의 연기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한, 그리고 스스로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기였다.
“그때는 어려서 효과가 있는 줄 알았어요. 이제는 저도 다 컸으니 필요 없어요…….”
조앵기가 훌쩍이며 힘없이 말했다.
그녀의 손을 누르고 있는 양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앵기는 그를 밀치며 버둥댔다. 하나 그는 몸을 숙여 다친 그녀의 다리에 호호하고 입김을 불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자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시큰해져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
양왕이 몸을 일으키자 조앵기는 그에게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양왕은 조금 어두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침상 안쪽으로 옮겨 주었다.
“자.”
조앵기는 이불을 턱 끝까지 당겨 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떠나고 싶었다.
밖에서 거지가 되더라도 그의 곁에는 있고 싶지 않았다. 굶주리고 다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몸이 아무리 아파도 마음이 아픈 것에는 비할 수 없으니까.
성루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았지만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음속의 고통 때문에 몸의 통증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잠을 못 이루던 조앵기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곁에 누운 이의 숨소리가 잠잠해지자 양왕은 그제야 돌아누워 조용히 다가가더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쉬며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여기 있다! 드디어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까 떨어졌을 때 지난 생의 모든 일들이 기억났다.
그가 얼마나 기뻤는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녀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면 마음껏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녀에게 보상해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앵기가 아닐까?’
양왕은 고통스럽고 또 다행스러워 그녀를 더욱 꼭 그러안았다.
“조앵기……. 넌 내 거야. 영원히 도망칠 생각하지 마……. 다시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을 거야.”
“음… 으음…….”
잠에 빠진 조앵기는 그의 품에서 얕은 신음 소리를 냈다. 양왕은 힘을 뺐지만 손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