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14
법화사에 도착하자 정선제와 사람들은 모두 정전에서 기도를 올린 후 인천보전으로 갔다.
인천보전은 정선제가 특별히 명령해서 지은 전각이었다.
인천보전은 소 황후의 위패를 모셔 둔 대전이었다. 매 시진마다, 즉 하루 열두 번씩 고승이 소 황후를 위해 왕생경往生經을 외우고 법화사 부처님의 광명으로 감싸고 있으니 정선제는 소 황후가 극락왕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인천보전으로 들어간 정선제는 금탁자에 놓인 위패를 보며 한숨 쉬더니 양왕을 돌아보았다.
“명쟁아, 네 어마마마에게 절을 올려라.”
“네.”
양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앵기를 데리고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방석에 앉아 합장을 하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양왕은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얼음만큼 차가웠다.
‘극락왕생? 그럴 리가! 황제는 꿈도 야무지지. 저렇게 위패를 두고 스님이 매일 불경을 올린다고 어마마마가 자기를 용서할 것 같은가? 하하. 그럴 리가.
어마마마, 어마마마의 혼령이 있다면 누님이 살아 있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정씨 모자가 합당한 벌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개 같은 황제가 제일 총애하고 믿었던 정씨 모자에게 배신을 당하게 도와주세요!’
양왕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단호하고 차가운 눈으로 위패를 바라보았다.
그때, 별안간 발밑이 흔들렸다. 양왕과 조앵기가 미처 어찌하기도 전에 바닥이 밑으로 꺼지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앗……!”
조앵기가 비명을 지르며 양왕과 함께 떨어졌다.
“명쟁아!”
정선제와 사람들은 눈앞에서 갑자기 바닥이 꺼지고 양왕과 조앵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정 황후도 놀라서 소리를 질렀으나 태자만은 어딘지 흥분한 얼굴이었다.
“명쟁! 명쟁아!”
정선제는 움푹 꺼진 구멍을 향해 뛰어갔지만 시꺼먼 구멍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정선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주지!”
* * *
주변에는 습기가 가득했고 톡톡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조앵기는 정신이 몽롱하고 아득했다.
‘여긴 어디지……? 아, 맞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자신이 있는 이 장소는 인천보전, 소 황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자신들은 매년 여기서 그녀의 넋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여기는 인천보전 밑의 동굴이었다.
산 위에 지어진 법화사가 있는 곳은 마침 지층이 얇고 그 밑에 동굴이 있었다. 하필 제사를 올릴 때 땅이 꺼져 자신들은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자신은 당연히 이런 일을 몰라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견할 수 있었다!
떨어진 후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구출되고 다시 눈을 뜨면 침상 위일 것이다. 자신은 자신들을 살펴보러 온 아바마마가 동굴 이야기를 해서 사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몸조리를 하는데, 양왕은 금방 나아 보름도 되지 않아 침상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한 달 동안 누워 있을 것이다.
나은 후라고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궁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무시할 것이고, 양왕은 계속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괴롭힐 것이다. 자신은 멍하니 있거나 그네를 타고, 아니면 나비 따위를 쫓아 뛰어다닐 것이다.
하지만 조용하고 답답한 일상에 풋풋한 달콤함도 함께할 것이다.
그해 가을, 자신은 본채에서 내보내 곁채로 옮겨 갈 것이다. 그리고 아바마마는 꽃처럼 아름다운 궁녀를 목수궁에 붙여 줄 것이다.
어리바리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자신이라도 그 궁녀가 평범한 궁녀가 아닌 건 느낄 수 있을 터였다.
그날 저녁 자신은 양왕과 함께 저녁을 먹지 않고 곁채에서 혼자 먹을 것이다.
그날은 드디어 양왕의 감시를 받지 않고 마음껏 먹는 행복한 날이었다. 잠자리를 가리는 자신이지만 그날은 일찍 잠들 것이다.
그런데 자시 무렵에 ‘쿵’ 하고 문이 열려 눈을 뜰 것이다.
자신이 무서워해도 그는 자신을 품에 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이 양왕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자신의 것이라고. 아프면서 달콤하고, 눈물이 흐르지만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상쾌하다.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지난날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던 다른 사람의 시선, 주변의 조롱에서 벗어나는 날이 마침내 찾아오는 것이다. 이제 자신에겐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앞으론 풋풋하고 달콤한 산들바람만 불어오는 편안한 날들일 것이다.
그네를 타고 높이 날아올라 행복하게 웃는 자신의 머리 위에 나비가 앉아 있고 양왕은 멀찍이 서서 조용히 이편을 바라보는 날.
하지만 오후에는 그 여유로운 행복이 모두 산산조각 난다.
정선제가 양왕에게 다섯 명의 시첩侍妾을 내려 줄 것이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멍하니 바라만 볼 것이다. 그날 저녁, 그저 그를 안고 하늘이 무너진 듯 울 것이다.
“전하,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말아요! 저하고만 있으면 안 돼요?”
양왕은 진절머리를 치며 저를 밀치고 나가 버릴 것이다.
자신도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가 떠나는 게 싫었다.
그때 처음으로 몸이 아픈 것은 아픈 게 아니고, 마음의 고통이 진정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시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 목 놓아 울며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한참을 울다가 다시 휘청거리며 뛰어나가 그와 시첩이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뾰족한 손톱으로 그 시첩의 얼굴을 크게 할퀼 것이다.
그런 힘과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미친 사람처럼 그 시첩과 몸싸움을 벌인다. 그 장면에는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만 남아 있었다.
“저 사람은 내 거야! 내 거라고! 건드리지 마……! 안 돼……!”
쥐어뜯고, 발버둥 치고, 울부짖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의 조롱 섞인 차가운 목소리다.
“조앵기, 넌 내 거야. 하지만 본왕은 네 것이 아니야.”
양왕이 힘껏 자신을 밀칠 것이다.
그의 차가운 말에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고 산 채로 얼음 굴에 묻혀 버린 것만 같은 바로 그때, 어찌 된 일인지 아랫도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하나 자신은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한기 속에서 의식을 잃을 것이다.
깨어난 후엔 밖에서 궁녀들이 목소리를 낮춰 하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
“쯧쯧, 타고난 팔자가 천한데 어떻게 그런 복이 있겠어.”
위 마마가 들어와 자신을 조용히 부를 것이다.
“왕비 마마.”
자신은 침상에 누워 멍하니 묻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위 마마가 대답한다.
자신은 웅크린 채 안쪽을 향해 누워 있다. 위 마마의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고 그저 겁이 날 뿐이다.
그 후로는 풀 죽어 지낼 것이다. 어쩌면 그날 시첩과 다툴 때 평생의 힘을 다 끌어 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수확도 없었다.
그의 시첩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나중에 정선제는 양왕에게 고귀한 신분의 측비도 내려 줄 것이다. 측비를 맞이하기 위해 정선제는 양왕부를 하사하고 혼례를 그곳에서 올리게 할 것이다.
자신은 화려하게 단장한 양왕부에 울려 퍼지는 폭죽 소리와 음악 소리 속에서, 그가 혼례복을 입은 측비를 맞이하는 경사스러운 광경을 가장자리에서 지켜볼 것이다.
자신은 이방인이 된 것처럼 난처하고 어색해 도리어 자신이 훼방꾼이 된 것만 같아 할 것이었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은 그의 인생에 나타나서는 안 됐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마음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가 매일 저와 같이 밥을 먹는 시간이 그 희망이었다. 저가 넘어질 때마다 그가 다가와 안아 주는 것이 그 희망이었다. 그가 왕부로 돌아올 때마다 저를 꽉 붙잡는 그 시간이 그 희망이었다.
‘어쩌면…….’
하지만 그 마지막 망상은 결국 저 높은 곳에서 추락해 박살이 나 버렸다.
톡, 톡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조앵기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누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열너댓 살 정도의 소년이 곁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유독 창백해 보였다. 동굴의 물방울에 적셔진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으음…….”
조앵기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애를 쓰고 나서야 일어나 앉았다.
“후우, 후…….”
그녀는 축축한 돌에 몸을 기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뻗어 그의 오른팔을 발로 밀어서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벼랑이다. 저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아주 아주 깊다는 것밖에.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조금씩 그를 밀었다.
드디어 그를 벼랑 끝까지 밀었다. 한 번만 더 하면 그를 떨어뜨릴 수 있는데, 그녀는 어째서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목 놓아 울었다.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못된 것 같죠……?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뜨려 죽일 것 같죠……?”
그녀는 축축하고 차가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떠나가라 울었다.
벼랑 끝에 누워 있는 양왕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다만 소매 속 꼭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어, 찾았습니다……!”
이때, 위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밧줄로 만든 사다리가 내려오고 환관 몇 명이 내려왔다.
“아이쿠, 전하!”
그들은 떨어질락 말락 한 양왕을 보자 혼비백산해서 뛰어와 그를 둘러업고 올라갔다. 조앵기는 웅크린 채, 침착하게 그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 기척도 내지 않았다.
위에서 한동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난 후에야 누군가 내려왔다.
“왕비 마마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를 업고 올라갔다.
땅 위로 올라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양왕을 둘러싸고 있었다. 조앵기는 조용히 그편을 바라만 보고 있다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저편에 선 커다란 불상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떨어져 죽었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다시 그 새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어떤가, 의정?”
한편, 정선제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심하십시오, 폐하. 전하는 떨어져서 잠시 기절하신 것입니다.”
나 의정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정선제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어서, 방으로 모셔라.”
정 황후의 분부에 사람들이 양왕을 받쳐 들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