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46화 (846/858)

번외 토자포 13

정선제와 정 황후가 놀라서 돌아보니 양왕은 몹시 심각한 얼굴로 조앵기의 손만 꼭 붙잡고 있었다. 놀란 조앵기는 울면서 빈손으로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양왕 전하가 태자 전하를 발로 차서 물에 빠뜨렸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들이 한 입으로 말했다.

“양왕… 어째서 정건을 물에 빠뜨린 거니?”

정 황후는 양왕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양왕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놀란 정선제가 양왕을 바라봤다.

“명쟁, 너…….”

“예, 제가 그랬습니다!”

정선제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양왕이 내뱉듯 시인했다.

“명쟁아, 왜 그런 거니?”

정선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양왕은 정색을 하고 말없이 조앵기의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조앵기는 이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저도 모르게 울음소리를 높였다.

“으아앙…….”

“명쟁아!”

정선제가 한층 엄한 목소리로 채근하니 양왕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남녀 사이에는 물건도 직접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태자 전하가 먼저 왕비의 머리를 만졌어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얼어붙었다. 양왕이 제 식구를 지킨 셈 아닌가.

반면 정선제는 어쩐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크게 웃었다.

“그래, 남녀 사이에는 예절을 지켜야 하지. 하지만 태자는 그저 저 아이의 머리를 한번 만져 본 것 아니냐. 그리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는데 양왕비는 이제 겨우 네 살 아니냐. 남녀라고나 할 수 있겠더냐.”

양왕은 훨씬 어두워진 얼굴로 따박따박 따졌다.

“하나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것은 보통 남자와 여자 사이의 규범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양왕비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이미 혼인한 부녀자이니 제일 먼저 부녀자의 덕을 지켜야지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랐다.

“그것도 맞다. 하지만… 부녀자의 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양왕비다.”

“저 멍청한 게 뭘 알겠어요. 하지만 태자 전하는 저 아이의 신분도 알고, 부녀자의 덕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알면서도 저 아이의 머리를 만졌습니다. 이건 명백히 잘못이 아닌가요?”

차가운 양왕의 말에 정선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했다.

“그렇지.”

황제가 태자를 돌아보았다.

“들었느냐? 양왕비는 네 살이라도 부군이 있는 부인이다. 명쟁이 너를 찬 것이 조금 과하긴 했지만, 너에게도 잘못이 있다. 아무튼 두 사람 모두 잘못했으니 이 정도로 하자. 자, 태자를 데리고 가라.”

태자는 정선제가 양왕을 편애하는 것 같아 너무나 못마땅했다. 정 황후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별말 없이 사람들에게 태자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정선제는 양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양왕의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딱딱해져 있었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구나?”

“아니에요.”

양왕이 차갑게 대답했다.

“하하, 이 녀석.”

정선제가 몸을 숙여 그를 안아 들었다.

“나이도 어린 것이 어쩌면 이렇게 똘똘하지? 하하하!”

양왕이 태자를 얼음물에 빠뜨렸는데도 황제는 양왕을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높이 안아 올렸다. 하나 자그마한 양왕은 그에게 안긴 채 눈을 번득일 따름이었다.

정선제는 양왕과 조앵기를 목수궁에 데려다주고 급히 태자의 처소로 갔다.

정선제가 떠나자 양왕은 조앵기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동그랗게 땋아 올린 머리를 콱 붙들었다.

“야 이 바보야!”

“으앙……!”

양왕이 괴롭히자 조앵기는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렇게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땋아 올린 그녀의 머리는 그의 것이라는 것, 오직 양왕만 잡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만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 * *

물에 빠진 태자는 한 달 넘게 앓아누워 정 황후를 걱정시켰다.

정 황후는 양왕이 죽도록 미웠지만, 정선제의 마음이 양왕에게 기울어 있으니 현재로서는 바득바득 이만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조앵기였다.

이튿날 수업을 받으러 갔더니 문 선생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결국 조앵기가 문 선생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문 선생은 이렇게만 이야기했다.

“전에는 제가 잘못 본 거예요. 사실 마마는 금에 소질이 없으니 앞으로도 연주는 하지 마세요!”

조앵기와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은 모두 조롱하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버려진 것 같은 마음에 조앵기는 머리가 윙윙 울렸다. 그 후로 그녀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조앵기는 이듬해 봄, 심하게 아파서 거의 한 달 동안 덕현궁에 나가지 못했다. 병이 낫고 나서도 풀이 죽은 채, 수업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공부하러 가지 않아도 다시 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목수궁의 궁녀와 환관들은 공손하게 조앵기를 대했지만 아무도 그녀와 놀아 주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조앵기는 자신과 놀 수밖에 없었다. 혼자 실뜨기를 하거나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놀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뭘 배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처음 금을 배울 때는 정선제가 다른 것을 배우라고 했다. 이후, 그녀가 그림을 배우자 양왕이 무섭게 쳐다봤다.

“닭이 발로 그려도 너보다는 잘하겠다.”

그녀가 바둑을 배우자 양왕이 직접 바둑알을 들고 그녀에게 가르쳐 줬다. 그렇지만 한 번 가르치니 할 줄 몰랐고, 두 번 가르쳐도, 세 번 가르쳐도 여전히 할 줄 몰랐다.

“가르쳐 줘도 따라 하지 못하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조앵기, 넌 정말 멍청하구나.”

양왕이 비웃으면서 조앵기의 땋은 머리를 꽉 쥐었다.

조앵기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궁녀들 사이에서는 제기차기 놀이가 한창 유행이었다.

조앵기는 다른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멀리서 보다 재미있어 보여 목수궁에 돌아가 마마에게 제기를 하나 구해 오라고 했다. 그리고 혼자 정원에서 제기를 차며 놀았다.

그녀는 제기차기를 정말 좋아해서 금계의 화려한 깃털을 가져오라고 특별히 주방에 부탁을 해 제 취향에 맞게 다시 만들었다.

회랑을 지나던 양왕이 그걸 보고는 비웃었다.

“너는 세 번도 못 찰걸.”

조앵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양왕을 보았다. 이미 회랑 끝까지 걸어간 양왕은 끼익하고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 책을 보았다.

그녀는 순간 울컥했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제기 차는 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왕이 서재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조앵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전하! 전하아……!”

짜증이 잔뜩 난 양왕이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게 뭐야?”

“전하, 저 세 번 찰 수 있어요.”

신이 난 조앵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세 번이면 뭐? 저리 가!”

양왕이 차갑게 말했다.

밖이 잠시 조용하다 다시 큰 소리가 들렸다.

“전하! 전하! 전하아……! 저언하!”

양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을 던져두고 뛰어나와 계단 위에 섰다. 조앵기가 제기를 들고 있었다.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삐죽이며 그를 보고 있었다.

양왕은 잔뜩 화가 났다.

“소리 지르지 말고 차 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제기를 차기 시작했다. 탁, 탁, 탁, 결국 세 번을 차고는 활짝 웃으며 그를 보았다.

“보세요.”

그녀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양왕은 그녀를 비웃으며 심술궂은 얼굴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한 손으로 조앵기가 들고 있던 제기를 빼앗아 화단에 자리를 잡고 제기를 차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 쉰, 쉰하나…….

놀란 조앵기가 겸연쩍은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양왕은 충격을 받은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짙은 눈썹과 붉은 입술을 움직여 씩 웃었다.

“고작 세 번 찬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말끝에 양왕은 있는 힘껏 제기를 차서 처마 위로 날려 버리고는 곧바로 서재로 돌아갔다.

“어어어……!”

조앵기는 고개를 들어 처마 위의 제기를 보며 속상해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저쪽에 바닥을 쓸고 있는 환관이 하나 보였다.

환관은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느꼈지만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바닥만 쓸었다. 그 역시 조앵기를 업신여기고 있었기에 그녀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양왕이 처마 위로 차 버린 것이니 조앵기가 대놓고 가져오라고 말한다고 해도 양왕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 있었다.

결국 조앵기가 직접 방에 들어가 의자를 끌고 나오자 양왕이 나왔다.

“올라가지 마.”

조앵기는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비까지 와서 조앵기는 창가에 기대서 자신이 사랑하는 제기가 비에 젖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햇빛에 마르는 것도. 그러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처마 위에서 썩어 버렸다.

조앵기는 열심히 노력해서 신분에 걸맞은 사람이,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손을 대는 것마다 망치기 일쑤였다. 가르쳐 줘도 배우지 못했고, 제대로 하는 일도 하나 없었다.

‘어쩌면 양왕의 말처럼 나는 태어나기를 그렇게 멍청하게 태어난 것인지도.’

* * *

창밖에는 토독, 토독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앵기는 창턱에 엎드려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양왕이 흰 중의中衣를 입고 들어왔다. 방금 목욕을 마쳐 아직 물기가 있는 몸으로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엎드려 있는 조앵기를 보고 무섭게 웃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잡아 일으켰다.

“뭘 봐? 자, 자러 가자.”

“아…….”

조앵기는 정색을 하며 버텨 봤지만 양왕에 의해 침상에 던져졌다.

조앵기는 요즘 그가 많이 무서웠다!

예전에는 그녀를 멀리멀리 밀어냈는데 요즘은 그녀를 끌어안고 속옷을 젖히곤 해서 조앵기는 잔뜩 겁이 났다.

그녀는 침상 구석에 한껏 웅크렸다.

“전하… 침상이 너무 작아요……. 오른쪽 곁채가 비어 있으니 저, 저는 거기 가서 잘게요.”

양왕이 냉랭하게 웃었다.

“오, 이제 다른 데서 자고 싶어? 예전에는 내가 침상에서 떨어뜨려도 한밤중에 몰래 침상에 올라오더니! 아무리 발로 차도 다시 올라왔으면서! 이제는 너 혼자 잘 수 있다는 거야?”

조앵기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조앵기는 얌전히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위 마마가 머리를 양쪽으로 동그랗게 땋아 올리고 한쪽에는 벚꽃 머리 장신구를 꽂아 주었다.

그렇게 조앵기는 항주 비단으로 만든 흰색 윗옷과 분홍색 치마를 입고 동주東珠가 달린 꽃신을 신고 방을 나섰다. 복도에 서 있던 양왕은 멀리서 그녀를 보더니 피식 웃고 밖으로 나갔다.

조앵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치마를 살짝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오늘은 정선제와 정 황후, 태자와 황자들, 지위가 높은 비빈들이 함께 법화사에 기도를 올리러 가는 날이었다.

일행은 마차에 올라 금위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도성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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