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12
황자들 등의 종실 사내아이들은 일찌감치 벽옥헌에 도착했고, 곧 공주들 등의 종실 여자아이들도 도착했다. 남자아이들은 왼쪽에, 여자아이들은 오른쪽에 앉았다.
잠시 후 정선제가 정 황후, 영 귀비와 함께 들어왔다.
종전까지는 월말 시험 때 정선제가 황자들을 가르치는 태부와 선생 몇 명만 데리고 왔었다. 하지만 이번 달은 여인들도 같이 살펴보기로 했기 때문에 정 황후와 영 귀비도 함께 재미 삼아 데려온 것이었다.
정선제와 정 황후, 영 귀비가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인사를 올렸다. 정선제는 남자아이들의 시험을 먼저 시작했다.
노왕은 열여섯, 태자는 열둘, 양왕은 여섯 살이었다. 노왕이 태자보다 나이가 많지만 태자는 총명하고 부지런해서 노왕과 같은 내용을 배웠다. 정선제는 태자의 영민함을 칭찬했다.
하나 양왕이 돌아온 후, 겨우 여섯 살인데도 불구하고 태자와 노왕 두 사람의 진도를 따라잡아 모두 혀를 내둘렀다.
더욱 놀라운 부분은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양왕의 성적이 늘 태자보다 뛰어나단 점이었다.
정선제는 칭찬이 절로 나왔다.
“명쟁이 영리하고 똑똑한 것이 소 황후와 닮았구나.”
하나 말끄트머리에는 한숨이 붙어 나왔다. 소 황후는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그녀를 보는 사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 안타깝게도 지혜는 깊지 않았지. 그리고 양왕은 그네를 닮았다.’
반대로 태자는 침착하고 인자했다. 특별히 눈에 띄지도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그는 속이 꽉 차고 매사에 신중했다.
황제는 아들들을 시험한 후 뿌듯해하며 공주들을 시험했다.
“득월, 미설은 요즘 뭘 배우고 있느냐?”
정선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바마마, 소녀는 『현녀칙賢女則』을 공부하고 있사옵니다! 외울 수도 있어요!”
일곱 살이 된 득월공주가 대답했다.
“오오, 짐에게 좀 들려다오.”
정선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득월공주가 책을 막힘없이 암송해 보이니 정선제와 정 황후가 활짝 웃었다.
“폐하, 공주들은 평소에 글자를 익히고 나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게 『열녀전』, 『여훈』, 『현녀칙』 같은 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이나 바둑, 서화 같은 재주도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정 황후의 이 말에 평소에 공주들이 무엇을 배우는가에 관심이 없던 정선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재주를 배웠다니 한번 보여 주렴.”
정선제가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여자아이들이 앉은 쪽을 돌아보았다. 함께 공부하는 공부 친구들까지 모두 스무 명 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각각 재주를 선보이면 즐겁게 시간이 금방 갈 것이다.
“들었지. 너희들이 잘하는 것을 하나씩 보여 드려라. 한 명씩 줄을 서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려면 저 뒤에 가서 써서 폐하께 보여 드리거라.”
정 황후의 말에 모두들 얼른 대답했다.
하나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 대부분이 뭘 해야 할 줄 몰랐다. 이렇다 할 특기가 없는 절반가량은 바로 뒤쪽에 있는 탁자로 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그럭저럭 지나갔다.
남아 있는 아이들 여덟아홉은 그나마 배짱이 있는 아이들이라 노래하거나 연주하려고 줄을 섰다.
득월공주는 비파를 연주하고 미설군주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조그만 꼬마가 금을 들고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자 옆에 앉아 있던 양왕이 조앵기를 보더니 차가운 눈으로 비웃었다. 저 바보 같은 토끼. 언제나 타조처럼 놀라기만 하던 게 지금 이 자리에서 연주를 하겠다니, 정말이지 간이 부었구나.
미설군주의 노래가 끝나자 정선제가 칭찬했다.
“잘했다, 잘했어. 다음에는 득월과 함께 해 보거라. 하나는 비파를 연주하고 하나는 노래를 하고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미설군주는 뿌듯해하며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자기 차례가 된 조앵기는 금을 가지고 중앙으로 걸어갔다.
정선제는 조앵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흠칫 놀랐다. 그는 조앵기도 같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아예 잊고 있었다. 정선제는 저 천한 신분의 며느리가 단 한 번도 눈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양왕도 저 아이를 싫어하니 더더욱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바마마… 며느리가 금을 연주해 보겠습니다.”
조앵기가 쭈뼛대며 정선제를 쳐다보았다.
“음. 해 보거라.”
정선제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앵기는 금 앞에 앉아 고개를 돌려 문 선생을 쳐다봤다. 문 선생은 응원하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조앵기는 용기를 내서 보름이 넘도록 연습한 「도화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나 충분히 연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음이 맞지 않아 곡이 엉망이 되었다.
“푸훕.”
득월공주와 미설군주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조앵기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고 문 선생도 깜짝 놀랐다.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양왕비이고 나이도 어리니 뭐라 하기도 곤란해 천천히 연주를 마치게 내버려 두었다.
음이 하나도 맞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계속 웃어 댔고, 그 조소 속에서 조앵기는 정신을 놓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앵기는 어찌어찌 끝까지 연주를 마쳤고, 곡이 끝나자 정선제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뗐다.
“오, 어린 나이에 연주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수고했다. 하지만 짐 생각에는 앞으로 다른 재주를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조앵기가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양왕은 조앵기가 한 소리 듣는 것을 보며 비웃었다.
바보, 영원히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사랑을 받지도 못할 거다.
조앵기는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 지금 시간이 어찌 됐소?”
“벌써 오시입니다.”
정 황후가 정선제에게 대답했다.
“하하,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정선제는 손가락을 만지며 웃었다.
“식사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정 황후가 웃으며 이리 대꾸하니 사 마마가 나가고 곧 궁녀와 환관들이 음식을 내왔다.
식사를 마친 후 정선제는 아이들에게 밖으로 나가 놀라고 했다.
조앵기는 밖으로 나왔다.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득월공주와 미설군주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은 조앵기를 보곤 업신여기듯 쳐다보며 서로 귓속말로 깔깔거렸다.
조앵기는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앵기는 조용히 정원을 지나 호숫가로 가서 턱을 괴고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물속의 물고기를 보고 있었다.
저만치서 웃음소리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노왕과 태자, 열두세 살 정도 된 종실 세자 몇 명이 이야기를 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태자 전하, 아까 춘매春梅시를 잘 써서 폐하가 계속 칭찬하시던데요.”
어떤 세자가 말했다.
“글씨만 반듯하게 잘 쓴 게 아니라 시의 내용도 대단했어.”
노왕이 희미하게 웃으며 따라 칭찬했다.
“과찬이야. 그래도 넷째 동생의 화려하고 세심한 글보다는 못한걸.”
태자는 웃으면서 겸양의 말을 했다.
“양왕 전하도 대단하지만 태자 전하만큼 성숙하고 중후하진 않아요.”
다른 세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태자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태자는 눈을 휘며 웃었다.
“어, 저기 넷째의 부인 아니야?”
이때 일행 중 누군가가 저 멀리 호숫가에 앉아 있는 뽀얗고 조그만 사람을 발견했다. 다들 그쪽으로 눈길을 향하니 과연 머리를 양쪽으로 동그랗게 땋아 올린 여자아이 하나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앵두 같은 입술을 쑥 내민 채, 포도알처럼 둥글고 촉촉한 눈을 반쯤 감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
조앵기의 예쁜 외모 때문에 그녀가 울고 있든 축 처져 있든, 모두들 그녀를 한번 안아 보고 그 머리를 만져 보고 싶어 했다.
태자가 다가가 몸을 숙이고 말을 걸었다.
“제수, 여기서 뭐 해?”
화들짝 놀란 조앵기가 일어나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물고기 구경이요.”
“왜 득월이나 다른 아이들이랑 놀지 않아? 아, 알았다. 아까 연주가 잘 안 돼서 속상해서 그러는 거지?”
노왕이 상냥하게 말했다.
“속상해하지 마, 다음에 잘하면 되지. 못하는 게 있으면 나에게 물어봐,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
태자가 말했다.
“그래.”
태자 뒤에 서 있던 세자들도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하나 조앵기는 태자의 친절한 미소를 보자 오히려 꺼려졌다.
그 마음을 모르는 태자는 고개를 숙여 조앵기를 내려다보았다. 그 예쁘고 조그마한 모습을 보자 불쌍하면서도 귀여워 그의 마음이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진 태자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만졌다. 그래, 전부터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
“아아아…….”
조앵기는 당황해 손을 뻗어 머리를 감쌌다.
“하하하.”
태자가 한참 신이 나려는 순간, 어디선가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태자는 ‘풍덩’ 소리를 내며 호수에 빠졌다.
노왕과 세자들이 깜짝 놀라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태자가 서 있던 곳에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양왕이 서 있었다. 그의 손은 조앵기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으아앗……!”
세자들이 놀라서 계속 소리쳤다.
“태자 전하가 물에 빠졌다!”
주변에 있던 환관과 궁녀들이 달려와 호수에 뛰어들었다.
“살려 줘, 살려 줘……!”
태자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연신 비명을 질렀다.
한겨울인 지금 호수의 물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얼음장 같은 물에 빠진 태자는 벌써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살려, 줘… 꼬르륵……!”
얼어붙은 그의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던 그때, 환관 몇 명이 태자 곁으로 헤엄쳐 가 그를 끌어냈다.
“무슨 일이냐?”
매서운 호통 소리가 들렸다.
정선제와 정 황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물에 빠진 태자를 본 정선제의 낯빛이 변했다.
“어서 구해라! 무슨 일이냐? 응?”
호숫가의 환관들이 대나무 장대를 가져와서 대나무에 기댄 태자를 뭍으로 끌어냈다.
“정건, 정건아!”
정 황후는 득달같이 달려가서 추위도 아랑곳 않고 태자를 꼭 끌어안았다. 사 마마도 황급히 자신의 겉옷을 벗어 태자에게 덮어 주었다.
“어서, 어서 전하를 안으로 모셔라.”
바로 이때, 태자가 정 황후를 꼭 붙들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아바마마… 넷째예요! 넷째가 가만히 있는 저를 물에 빠뜨렸어요… 엉엉……!”
태자가 암만 어른스럽대도 이제 고작 열한 살이었다. 한참 성질을 부릴 나이 말이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어떻게 참고 넘어갈 수 있겠나. 태자는 울며불며 양왕이 한 짓을 일러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