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8
“하하. 자, 어화원으로 가자.”
정선제가 양왕을 안고 일어나 바깥으로 갔다.
“이따 목수궁으로 돌아가 밥을 먹을 테냐?”
“밥도 저 아이랑 같이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양왕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대사가 꼭 그래야 한다더구나. 그래 봤자 고작 일 년 아니더냐.”
“싫어요! 저 아이를 보세요, 죽어도 같이 못 먹어요.”
양왕이 번득이는 눈으로 조앵기를 노려봤다.
태자를 비롯한 모두가 정선제를 따라나서는데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조앵기는 손가락만 배배 꼬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면… 점심은 같이 먹고 저녁은 짐에게 와서 함께 먹자꾸나.”
정선제는 그를 안고 나가면서 이야기했다.
“음, 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바깥에서 잡다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조앵기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여 마마가 와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목수궁으로 돌아가시죠.”
* * *
목수궁으로 돌아온 조앵기는 복도의 주홍색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여 마마는 그녀를 데려다 놓고 바로 나갔다. 주변의 궁녀와 환관들은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겁에 질린 조앵기는 방에 들어가서 놀 생각도 못 했다.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집에 가고 싶었다. 집이 그리웠다…….
조앵기의 치마폭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조앵기가 그렇게 앉아 있는데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조앵기가 그쪽을 돌아보더니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양왕이 손에 연꽃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한 무리의 궁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천천히 가십시오, 전하.”
양왕은 이미 조앵기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연꽃을 내동댕이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앗……!”
혼비백산한 조앵기가 의자에서 내려와 내빼려고 했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양왕이 험악하게 웃으며 돌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앵기는 바닥에 쓰러져 양왕 손에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이 나쁜 계집! 알고 보니 고자질쟁이였구나!”
조앵기가 정선제 앞에서 그가 발로 찬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아악! 엉엉……!”
조앵기는 발에 차여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양왕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번엔 조앵기의 머리채를 쥐고 잡아당겼다.
“전하, 전하, 제발 멈추십시오……!”
“저리 비켜!”
“으아앙……!”
“전하, 왕비는 그렇다 쳐도 전하의 상처는 이제 겨우 아물었습니다!”
“전하,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왕비 마마께서 아프다고 울고 있지 않습니까.”
“울면 뭐 어때서! 저 아이가 야옹야옹 울 때까지 때릴 테다!”
“야옹야옹……!”
조앵기의 소리에 양왕은 숨을 멈췄다.
“이 멍청한 게……!”
이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양왕은 상처가 아파 더는 견디지 못할 즈음에서야 손을 멈췄다. 그새 온몸이 엉망이 된 조앵기는 머리를 감싸 쥐고 목 놓아 울었다.
“흥! 바보 같은 것!”
양왕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조앵기를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본왕이 아프게 됐잖아. 쓰읍……! 오늘은 여기서 봐주마.”
상처 부위가 영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조앵기를 한바탕 괴롭혔고 저 머리채도 만져 봤으니 나쁘지 않았다.
양왕이 돌아서 떠나고 남겨진 조앵기는 땋은 머리를 붙잡고 흐느꼈다.
주변 사람들은 일제히 양왕의 뒤를 쫓아갔으니 조앵기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양왕이 있는 방에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주변에 다른 방들도 즐비했지만 그중 그녀의 공간은 없었다. 하여 조앵기는 그냥 구석에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여 마마가 다가와 그녀를 끌고 갔다.
“이렇게 엉망이 되시면 어떻게 해요.”
여 마마는 조앵기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혀 머리를 빗겼다. 조앵기는 입을 불퉁하니 내민 채였지만, 그녀가 꾸며 주는 대로 가만있었다.
여 마마는 머리를 다 정리하고 나서 조앵기를 반청으로 데려갔다. 반청 중앙에는 둥그런 배나무 식탁 위에 여러 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양왕은 벌써 상석에 앉아 있었다.
여 마마가 조앵기를 슬쩍 밀었다.
“왕비 마마,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양왕이 자신을 흘깃 쳐다보자 조앵기는 또 겁이 났지만,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조심스럽게 다가가 의자에 올라앉았다.
식탁 위에는 병중인 양왕이 먹을 수 있는 담백한 음식들만 있었다.
조앵기는 음식을 둘러본 다음 살짝 양왕을 훔쳐봤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흥!”
양왕은 조앵기와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바마마에게 알려지면 결국 고집을 꺾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리될 건데 용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 또 상처가 아직 아파서 많이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양왕은 점잖게 젓가락을 들어 산약초육편山葯炒肉片(마 고기 볶음)을 먹었다.
조앵기는 양왕이 먹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겨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반찬은 건드리지 못하고 쌀밥만 퍼먹었다.
이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식사를 마친 양왕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조앵기를 보고 짜증을 내며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
“아직도 먹어!”
조앵기는 소스라치며 ‘탁’ 하고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놀란 그녀가 젓가락을 집으려 몸을 숙이는 찰나, 양왕은 더욱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를 홱 잡아끌었다.
“이 바보 같은 것, 기본적인 법도도 모르냐!”
양왕은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의와 법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궁 안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배워야 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배웠다. 누님이 어려서부터 태자의 품행을 익힐 수 있도록 가르친 결과였다.
조앵기를 붙잡고 있는 양왕의 눈길은 저만치 떨어진 여 마마에게 가서 멈췄다.
“거기서 멍하니 뭘 하는 거냐?”
여 마마가 놀라서 얼른 몸을 숙이고 다가왔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전하. 막 오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몸을 굽혀 떨어진 젓가락을 집어 들어 뒤에 서 있던 궁녀에게 주었다.
양왕은 조앵기를 흘겨보며 나무랐다.
“또 한 번 법도도 모르고 예의 없이 행동해 봐라. 다시는 밥을 못 먹게 할 거다.”
그러더니 조앵기를 밀치고 나가 버렸다.
조앵기는 하얗게 변한 얼굴로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알지 못하니 다만 덩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여 마마가 그녀를 다그쳤다.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내려오세요!”
조앵기는 아직 배가 고파서 더 먹고 싶었다. 하지만 양왕이 먹지 않으면 그녀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 * *
양왕은 정선제의 궁전에서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정 황후와 태자도 자리에 함께였다.
양왕은 몹시 기분이 나빠져 목수궁으로 돌아왔다. 불편한 심기로 저녁에 잠을 청하려는데 마마가 조앵기를 침상에 데려다 놓는 게 아닌가. 양왕은 그녀를 발로 차 쫓아냈다.
“저기 구석에 가서 서 있어, 움직이지 말고!”
조앵기는 그대로 구석에 움츠려서 움직이지 못했다.
문가에 서 있는 여 마마와 사람들은 양왕이 조앵기를 괴롭히는 줄 알았지만, 감히 끼어들 수 없었기에 다들 모르는 척했다.
양왕은 곧 잠에 빠졌다. 구석에 서 있던 조앵기는 춥고 힘들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훌쩍이며 눈물만 훔쳤다.
한밤중이 되자 조앵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몽롱한 정신에 더듬더듬 침상 발치로 기어올라 웅크리고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양왕은 발에 따뜻하고 축축한 덩어리가 느껴져 훌렁 이불을 젖히자 조앵기가 그의 발을 안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발에 침까지 흘리면서. 짜증이 난 양왕은 단숨에 그녀를 아래로 차 버렸다.
“아악……!”
조앵기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바닥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 후로도 매일 밤 양왕은 조앵기를 제 침상에서 재우지 않았다. 그래도 한밤중이면 그녀는 조용히 침상에 기어올라 함께 잠이 들었다.
조앵기가 포기를 모르니 양왕도 점점 떨어뜨리는 일이 귀찮아졌다. 게다가 날씨도 점점 추워졌다. 홀로 잠드는 초저녁에는 추위를 느꼈으나 밤이 깊어지면 아늑해지니, 조앵기가 품속을 파고드는 게 점차 싫지만은 않았다.
매일 아침 양왕은 묘시卯時(아침 5시~7시) 일각에 일어나 근학전勤學殿에서 공부를 했다. 반 시진의 아침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함께 글공부를 하는 형제들과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오시 일각까지 수업을 받은 후에 목수궁에 돌아와 조앵기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조앵기는 이제 반찬을 집을 수 있을 만큼 간이 커졌다. 그래도 마음대로 먹지는 못했다.
양왕이 편식이 심했기 때문이다. 양왕이 무를 먹지 않으니 그녀도 무를 먹을 수 없었고, 양왕이 닭이나 오리, 거위 같은 날개 달린 것들을 싫어하니 그녀도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지 않더라도 상에는 늘 이런 음식들이 있었다. 그는 그게 법도라고 했다.
조앵기는 너무나 허기졌다. 한 그릇을 먹고도 더 먹고 싶었지만 양왕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양왕보다 많이 먹어서는 안 됐다.
식사를 마치면 양왕은 정선제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술시戌時(오후 7시~9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조앵기는 굶었다.
이러한 날들이 반복되면서 조앵기는 하루에 한 끼밖에 먹을 수 없게 됐다. 처음 이곳에 온 며칠 동안은 아침, 저녁을 양왕과 함께 먹지 않아도 궁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양왕이 조앵기를 싫어하고 차갑게 대하니 궁녀와 환관들도 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러 괴롭히기도 했다.
아침에는 만두 하나에 물 한 대접만 주기도 했다. 저녁에는 대충 점심에 먹다 남은 음식들을 내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대충 챙겨 준 것이지만, 나중에는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고 놀리느라 상한 음식을 가져다줬다.
조앵기도 천치는 아니니 당연히 상한 음식은 먹지 않았다.
물론 목수궁에서는 언제나 양왕을 위한 간식과 과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낮까지는 양왕이 거의 목수궁에 있지 않으니 환관과 궁녀들은 양왕이 돌아오는 점심때만 잠시 간식을 차려 두었다가 양왕이 가자마자 치워 버렸다.
환관과 궁녀들은 조앵기가 가엽게 굶주리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