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40화 (840/858)

번외 토자포 7

“좋구나.”

정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폐하, 신첩은 방금 사 마마가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뭐든 만전을 기하는 편이 좋겠지. 짐은 명쟁의 생명을 가지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소.”

정선제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침상 곁으로 다가섰다.

의정은 양왕의 상처를 싸맨 후 조심스럽게 들어 안고 문을 나섰다.

정 황후가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가자 일행들도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겁에 질린 조앵기가 일어나 어머니를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런데 사 마마가 뒤에서 옷깃을 잡아채고 조씨 부부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지난번에는 대사의 실수로 다른 사람을 데려갔네요. 댁의 셋째 따님을 데려갔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아… 그랬군요.”

조씨 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계약서를 바꿔 줄 사람이 올 거예요.”

말을 마친 사 마마는 조앵기를 끌고 가 버렸다.

“우아앙……!”

울며불며 버둥대는 조앵기는 부모를 보면서 자지러지게 울었다.

“어머니, 어머니……! 난 죽을 거예요… 떨어져 죽을 거예요……!”

조씨 부부는 그 참담한 비명 소리에 하얗게 질렸다.

“울긴 왜 울어! 떨어지기는 무슨! 가서 말 잘 듣거라. 너는 이제 가서 부자가 되는 거야.”

조씨댁이 매섭게 야단쳤다. 조앵기가 저렇게 울부짖다가 저쪽에서 물리자고 할까 겁이 덜컥 난 것이다!

겨우 지켜 낸 은자 5백 냥을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또, 조앵기는 부귀영화를 누리러 가는 것뿐이다! 이런 혼사라면 조춘연에게 주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조춘이라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일 속 썩이는 셋째를 데려간다니, 이후에 딸자식 덕에 영광을 누리기는 틀렸다 싶었다.

그래도 제 배로 낳은 아이인지라 조앵기가 끌려가며 처절하게 우짖는 소리를 듣자 조씨댁은 가슴이 턱 막히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저 어린것에게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없는데 이렇게 떠나보내게 되다니…….’

* * *

양왕은 족히 나흘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황궁에 돌아온 후였다.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 덮개가 보였다.

그런데 곁에서 따뜻한 무언가 느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무언가 불쑥 솟아 있었다. 이불에서 반쯤 쑥 나온 새까만 머리였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양왕이 이불을 젖혔다. 서너 살 된 조그만 여자아이가 그의 곁에서 얕은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누구냐?”

양왕이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전하.”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마마와 환관들이 바로 들어왔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전하. 어서 폐하께 알리고 의정을 불러오겠습니다.”

여 마마가 이리 말하니 뒤에 서 있던 궁인들이 알아서 뛰어나갔다.

여 마마는 이어 침상 위의 조앵기를 불렀다.

“어서 일어나세요, 왕비 마마.”

말소리에 이미 잠이 깬 조앵기가 눈을 비비며 황급히 침상에서 기어 내려오자, 여 마마가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누구더러 왕비라고 하는 거냐?”

양왕이 두 눈을 부라렸다.

“저…….”

양왕의 매서운 눈길에 여 마마는 주눅이 들어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분이 왕비 마마이십니다…….”

여 마마가 조앵기를 잡은 손을 놓았다.

이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정선제와 정 황후가 들어왔다.

“명쟁아.”

정선제는 깨어난 양왕을 보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침상에 앉아 양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바마마, 이 아이는 누구입니까?”

양왕은 인사도 하지 않고 여 마마 뒤에 숨은 아이를 가리켰다.

“명쟁, 네 부상이 다시 심해져서 짐과 황후가 네 부인을 얻어 액막이를 했다.”

정선제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양왕은 찬물이라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마음이 차게 식었다.

예전에 누이는 늘 아바마마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나중에 도성에 돌아오니 아바마마는 여러모로 자신을 아끼고 챙겨 줬고 직접 약을 먹여 주기까지 했다. 너무나 잘해 줬기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왕은 나이가 어리긴 해도 한 번 보면 무엇도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누님의 가르침, 했던 말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보았던 잡서의 내용까지도 무엇이든 잊어버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 민며느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여자를 왕비로 맞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정 황후가 붙여 준 여자이다! 좋은 마음으로 붙였을 리가 있는가. 그런데 아바마마 역시 찬성했다니… 양왕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저에게 거짓말을 하셨어요, 돌려보내고 액막이를 하지 않기로 저와 약속하셨잖아요!”

분노한 양왕이 소리쳤다.

“진정하거라. 짐이 너와 약속했었지.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조춘, 춘 뭐라고 하는 아이는 돌려보냈다! 그 아이로 액막이를 하지도 않았어. 벌써 다른 사람을 찾았단다. 게다가 이 아이는 네가 직접 고른 아이야.”

“그럼! 명쟁 네가 직접 방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낸 사람이잖니. 아바마마께서는 널 아끼신단다. 그러니 특별히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을 선택하신 거란다.”

정 황후도 뒤에서 웃으며 다독였으나 양왕은 몹시 어두운 얼굴로 정선제를 밀쳤다.

“말도 안 됩니다, 아바마마. 제가 저 애를 끌어냈지만… 저 아이와 혼인하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억지예요……!”

“명쟁! 명쟁아!”

정선제가 얼른 양왕의 손을 잡고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명쟁! 말 들어라. 짐은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짐이 어제 꿈에 네 어마마마를 보았다. 네 어마마마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황제의 매서운 목소리에 주위는 고요해졌다.

양왕은 큰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봐라, 지금은 활력이 넘치지 않느냐.”

정선제는 억울해하는 아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짐은 너를 위해서 한 일이다. 휴, 몸조리 잘하거라!”

정선제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나갔다. 정 황후는 씨익 웃으며 양왕을 흘깃 보고는 정선제를 따라 나갔다.

양왕의 준미한 눈이 무심코 조앵기를 향했다.

“힝……!”

놀라서 여 마마 뒤로 숨은 조앵기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부로 조앵기의 인생은 암흑에 먹혀 버렸다. 예를 들면 잠을 잘 때도 양왕이 그녀를 발로 차서 침상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구석을 가리키며 소리쳐 댔으니까.

“저기 서서 움직이지 마!”

조앵기는 구석에 서서 흐느끼며 그를 쳐다보다가 한밤중이 되었을 때 결국 견디지 못하고 구석에 주저앉아 잠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그녀는 끌려가 몸단장을 했다.

환복을 마친 양왕은 여 마마가 조앵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아직 네 살도 되지 않은 조앵기는 뽀얗고 귀여운 얼굴 위로 머리를 땋아 틀어 올렸다.

흔한 머리 모양이라 다른 여자들도 그렇게 하고 다녔지만, 어쩐지 조앵기 머리 위의 똬리는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양왕은 곧 코웃음을 쳤다. 아니, 만지고 싶지 않아!

양왕이 방에서 나오니 정원에 가마 한 대가 서 있었다. 양왕은 가마에 올라 곧장 출발했다.

조앵기를 데리고 나오던 여 마마는 계단 위에서 양왕이 먼저 떠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멍하니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쫓아가세요!”

그러더니 조앵기를 힘껏 밀었다.

넘어질 뻔한 조앵기가 고개를 드니 양왕의 가마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고 뒤에 선 여 마마는 나무라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 큰 궁궐 안에 그녀 혼자 남은 것 같았다.

조앵기는 죽을 둥 살 둥 양왕을 쫓아가 겨우 함께 봉의궁에 도착했다. 대전 안에는 정선제와 정 황후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뒤에는 열다섯 살 노왕과 열한 살 태자, 그리고 열두세 살이 된 공주 두 명이 서 있었다.

양왕은 이미 혼인을 했기에 이 자리는 어린 부부가 차를 올리는 예식 시간이었다.

사 마마가 차를 가져왔다. 양왕은 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차를 올렸다. 조앵기는 코를 훌쩍이며 차를 들어 정 황후 앞에 바쳤다.

정 황후는 조앵기의 한심한 모습이 재미있었지만,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왕비, 무슨 일인가? 어찌 우는 게야? 안색도 이렇게 초췌하고 말이야.”

조앵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전하가 잠을 못 자게 해요……. 발로 차서 떨어뜨리고… 엉엉…….”

정선제는 놀라서 얼굴을 찌푸리고 양왕을 보았다.

“명쟁아, 왜 사람을 못 자게 하느냐?”

“저 아이랑 자고 싶지 않아요.”

양왕이 굳은 얼굴로 반항했다. 정선제가 한숨을 내쉬며 그런 그를 달랬다.

“오래 할 필요 없다. 대사가 일 년이면 된다는구나.”

“일 년도 싫어요!”

“다 너를 위한 것이야! 너의 액을 막으려는 거란다. 봐라, 한 번 만에 네가 좋아지지 않았느냐. 떨어져 자면 부부의 모습이 아닌데 그러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니?”

정 황후도 안타깝다는 듯 말을 붙여 왔고 양왕은 조용히 정 황후를 훑어보았다. 그는 정 황후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누님을 죽인 원수였다!

멀쩡한 어마마마를 산 채로 미치게 만들어 결국… 그렇게 세상을 떠나게 한 여자.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동주로 사람을 보내 누님에게 궁으로 돌아가려면 이쪽을 해쳐야 한다고 이간질까지 한 여자!

그리고 이제는 저런 천한 여자를 자신에게 붙여 놓았다…….

양왕은 이제 겨우 여섯 살이지만 어제 하룻밤 사이에 굉장히 많은 일을 이해하고 깨달았다. 눈앞의 저 여자아이는 자신의 부인이고, 그건 평생을 좌지우지할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었다. 한데 그 존재가 어쩜 저리 비천하고 어리석은지!

“화내지 말고 우선 진정하거라.”

정선제는 몸을 숙여 양왕을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어휴, 눈치도 빠른 녀석. 이렇게 어린데도 제 부인이 모자란 걸 다 알고. 자, 아바마마와 같이 화원을 돌아보자꾸나.”

정선제가 양왕을 품에 안고 달래는 모습을 지켜보는 노왕과 태자는 속이 몹시 쓰렸다. 아바마마는 자신들에게 저렇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한편, 조앵기는 무슨 일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밤잠도 제대로 못 잔 탓에 너무 힘들어서 서 있기만 하는데도 작은 몸이 벌벌 떨려 왔다. 포도알같이 둥근 두 눈은 맑았지만 길을 잃은 듯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양왕은 자신을 발로 차고 잠을 재우지 않고 괴롭혔다……. 그런데 아바마마는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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