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토자포 5
“뭐라고? 그럼 혼례는?”
사 마마가 놀라서 되물었다.
황자의 병세가 위독해서 액막이를 하기로 한 것 아니었던가. 액막이가 좋은 일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니 액막이하러 시집오는 아가씨들은 모두 신분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 혼례는 벌써 준비가 끝났어요. 식장이나 붉은 비단 같은 건 벌써 준비가 끝나 신부만 있으면 되는데… 전하께서 회복하셨으니…….”
궁녀가 걱정스럽게 대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황후 마마는?”
“목수궁沐壽宫에 계세요.”
“자, 우선 아이를 데리고 봉의궁으로 돌아가라.”
사 마마는 조춘이를 궁녀에게 넘기고 고개 숙여 아이에게 말했다.
“춘이야, 일단 이 언니를 따라가렴.”
궁에 온 조춘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황궁을 보자 진작에 정신이 팔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 마마가 낯선 사람에게 저를 맡기는데도 고개만 끄덕였다.
궁녀가 조춘이를 데리고 떠났고 사 마마는 얼른 목수궁으로 갔다.
목수궁은 황제의 궁침과 봉의궁을 제외하면 후궁에서 제일 좋은 궁전으로, 과거 운하 적장공주가 지내던 곳이었다. 양왕이 도성에 돌아온 후 황제는 목수궁을 양왕에게 내줬다.
사 마마가 목수궁에 들어가니 입구부터 진한 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가 걸음을 더욱 재촉해 본채에 들어가자 침실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정 황후, 열네 살인 노왕, 열한 살인 태자, 그리고 열서너 살 먹은 공주와 후궁에서 지위가 높은 비빈 두 명이 찾아와 방 안이 꽉 차 있었다.
정선제는 침상에 앉아 자신에게 등을 기댄 양왕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곁에 선 나 의정은 양왕이 약을 남김없이 다 먹고 토해 내지도 않자 안도했다.
“의정, 약을 얼마나 더 먹어야 하는가?”
“예, 폐하. 전하의 병세를 보아하니 사흘 정도 더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온기를 보하는 약방으로 바꿔 보름 정도 천천히 보양하시면 됩니다.”
나 의정의 대답에 정선제가 웃었다.
“잘됐구나.”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정말입니다.”
두 후비가 경쟁이라도 하듯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래요! 잘 버텨 냈습니다.”
정 황후도 웃으며 동조했지만, 속으로는 울컥 치미는 화를 꾹 참느라 고역이었다. 그렇게 심한 부상에도 살아남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더욱이 저리 빨리 회복을 하고 있으니 액막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더 문제였다.
‘목숨을 부지했으니 비천한 왕비라도 꼭 맺어 줘야 한다!’
“어머나, 사 마마 아니에요? 왜 기웃거려요, 급히 아뢸 말이라도 있어요?”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떨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배가 살짝 나온 젊은 부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몇 년 전에 입궁한 영 귀비는 이제 겨우 열일곱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단 일 년 만에 말단 채녀에서 비까지 올라가더니 지난달 회임 소식을 알리자 황제에게 곧바로 귀비로 책봉받은, 후궁의 실세였다.
침상에 앉아 있던 정선제가 눈길을 돌렸다.
바깥에 있던 사 마마의 얼굴이 굳었다. 정 황후와 먼저 상의할 생각이었는데 정선제가 자신을 보아 버릴 줄이야. 사 마마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들어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후 마마, 그리고 마마, 전하를 뵈옵니다.”
사 마마는 정 황후의 사람 중에서도 지위가 있는 측근인지라 황제도 그녀의 체면을 차려 주느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사 마마로군.”
“사 마마, 이렇게 금방 돌아온 것을 보니 분명 사람을 찾은 거겠지요?”
영 귀비가 아름답고 요염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선제는 잠시 멈칫하더니 사 마마가 양왕의 액막이를 위한 민며느리를 찾으러 출궁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사 마마가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액막이에 대한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진전될까 걱정되었다. 어떻게든 잘 포장해 황제가 액막이를 계속 진행하도록 해야 했다.
“쯧쯧, 그런데 이제 어쩌죠? 양왕의 병세가 위중해서 액막이를 해 보려던 건데, 상태가 호전되었는데도 이걸 계속해야 하나요?”
영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렇군…….”
정선제가 망설이는 기색을 비치자 정 황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폐하. 사 마마는 닷새 전에 이미 액막이를 할 아이를 찾아서 도성에 데려온 것입니다. 양왕은 그때부터 호전되기 시작했으니 그 아이가 좋은 기운을 가지고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사 마마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으나 영 귀비는 눈썹을 까닥이더니 몸을 돌려 정선제를 잡고 애교를 부렸다.
“어머나. 폐하, 나 의정이 고생스럽게 용한 약을 찾아왔는데 결국 공은 황후 마마의 것이 되는 겁니까? 황후 마마, 어찌 의정과 공을 다투시나요?”
정 황후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자네도 참 별말을 다 하는군. 하나 양왕은 원후原后 소씨의 아들이니 아주 귀한 사람이야! 힘들게 회복한 건 물론 의정의 공이라지만, 신과 운명 같은 건 안 믿을 수도 없잖나. 만약 이대로 돌려보냈다가 혹여나 양왕이… 자네가 그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정 황후가 책임을 운운하니 아름다운 영 귀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양왕의 상태가 좋아 보이긴 하지만 누가 건강을 장담할 수 있겠나.
한편, ‘소씨’가 거론되니 정선제는 가슴이 떨렸다.
“황후 말대로 혼사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지. 뭐든 안 해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정 황후는 환하게 웃으며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정선제 품속에 있던 양왕이 갑자기 힘겹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바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선제는 기침을 하는 아이를 보자 깜짝 놀랐다.
“명쟁아, 네가 나은 것은 모두 네 어마마마가 배필을 찾아 액막이를 했기 때문이란다. 그 아이가 이미 저 밖에 와 있다. 사 마마, 데려와 보게. 짐이 그 아이를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사 마마가 밖으로 나갔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양왕은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꼭 한평생인 양, 아주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야말로 완전한 인생을 한 번 살았던 느낌이었고, 꿈속에서 여러 복잡한 감정이 몰려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다만 꿈을 꾸는 도중에는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하나 곧 꿈에서 깨어났고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몹시 괴로웠던 감정만 남아 있었다.
더구나 일어나 누님을 찾으니 누님은 적을 따돌리려다 실종되었다는 게 아닌가. 조급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니 정선제는 이미 수만 명의 도성 병영과 금위군이 출동해서 찾고 있으니 걱정 말고 몸조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온통 누님의 일에 쏠려 있었지만 어쩐지 막연하게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리고 사 마마가 도로 들어왔다. 대여섯 살 된 여자아이가 사 마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사 마마가 정성껏 꾸며 놓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외모였다.
“자, 폐하께 인사 올리거라. 그리고 황후 마마와 귀인들께도 인사드려라.”
사 마마가 아이에게 인사를 시켰다.
조춘이는 황궁으로 오는 동안 예절을 조금 배웠다. 낯선 사람들이 모두 저만 보고 있으니 덜컥 겁이 났지만 바들거리면서도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정선제는 살짝 한숨 쉬었다. 이 아이는… 아들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정선제는 양왕을 무척 아꼈다. 자신과 소씨의 아이……. 아마도 이젠 자신들 사이의 유일한 핏줄이다. 하니 양왕을 아끼고 사랑해 주고 제일 좋은 것만을 줘야 한다.
정선제는 당연히 이 며느리가 너무나 눈에 차지 않고 못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은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어나라.”
조춘이는 그 말을 듣고서야 일어났다.
그런데 조춘이가 일어서자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침상의 양왕이 그녀의 발치를 향해 도침陶枕을 집어 던진 것이다. 조춘이는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바마마, 저 아이랑 혼인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싫습니다! 싫어요!”
양왕이 조춘이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정선제는 어린 양왕이 혼인이 뭔지 아는 눈치인 데 깜짝 놀란 채로 다급히 그를 달랬다.
“명쟁아, 다 너를 위한 일이란다.”
“싫습니다, 절대 싫어요!”
양왕이 정선제를 밀어내며 침상에서 뛰어 내리자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아! 명쟁아, 움직이지 말거라!”
정선제가 화들짝 놀라 새하얘진 얼굴로 양왕을 부축했다.
“폐하, 이러면 안 됩니다. 이제야 겨우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전하도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자극을 받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 의정이 황급히 말했다.
“폐하… 민며느리를 들이는 이유가 양왕 전하의 건강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양왕 전하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입니까? 만약 이 때문에 양왕의 병세가 위독해지면… 득보다 실이 클 것입니다.”
영 귀비가 또다시 훼방을 놓자 정 황후와 사 마마가 남몰래 그녀를 향해 곁눈을 흘겼다.
“폐하… 이 일은 만전을 기해야 하옵니다.”
정 황후가 말했다.
“폐하, 양왕의 상처를 좀 보십시오.”
영 귀비가 말했다.
“폐하, 환자의 감정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나 의정이 말했다.
“아아… 아픕니다…….”
양왕은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침상에 누워 이를 악물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정선제의 옷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이런……!”
정선제는 너무 놀라 반쯤 혼이 나갔다. 아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염라대왕의 손에서 힘들게 되찾아 온 아들이다!
“그래그래, 들이지 않으마!”
정선제가 얼른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양왕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짐이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정선제는 상처를 누르고 있던 양왕의 손을 잡아뗐다.
“하나… 못 믿겠습니다…….”
양왕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저 아이를 돌려보내 주세요. 보고 싶지 않아요……! 저 애가 아니에요! 싫어요……!”
“그래그래, 돌려보내마. 사 마마, 데리고 나가게.”
정선제가 아이의 비위를 맞추니 사 마마와 정 황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납빛으로 변했다. 정 황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마, 우선 데리고 나가게…….”
“아니요, 데리고 나가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려보내세요. 속이려고 하지 말아요…….”
양왕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