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33화 (833/858)

번외 1-19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계절은 어느새 팔월이었다. 팔월 열닷새가 되자 엽연채는 각 가문에 중추절 선물을 보냈다.

시월이 되어 원남옥이 아기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온씨도 딸이라고 싫어하기는커녕 크게 기뻐했다.

엽연채도 조카에게 잔뜩 선물을 보냈다.

엽연채는 이미 다섯 달째라 꽤 배가 나왔는데, 의정이 맥을 짚어 보더니 웃었다. 이번에는 둘이 들었다고 했다!

엽연채는 기뻐하며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금방 새해가 되고 이월 초하루가 되었다. 이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무려 3년에 한 번 열리는 춘시가 거행되는 날이니!

전국의 모든 서생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자 미소 지었다.

“3년 전, 부군도 이렇게 회시에 참가했었지.”

그리고 그날 도성 모든 사람들이 주씨 집안에 셋째 주운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원 급제를 차지한 소년의 이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는가!

장박원은 이번 회시에도 참가했다! 다만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장찬이 시켜서 온 것이었다. 장찬은 손자가 무능한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줘 보고 싶었다.

물론 장박원은 이번에도 떨어졌다.

장박원 역시 예상한 바였다. 공명을 얻겠다는 포부는 버린 지 오래였다. 포기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장원이 되면 무엇 하나. 정말 장원 급제를 한들 후야가 되고 황제가 될 수 있겠는가?

자신은 평생토록 주운환을 넘어설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망신까지 당해야 하나? 정말 장원 급제를 한다 해도 주운환 밑에서 일을 하고 그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 그건 죽어도 싫었다!

‘무엇 때문에…….’

장박원은 주운환이 주씨 가문 사람들을 책봉하던 연회에서 주운환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아내는 남편을 성공시키는 여인이거든!”

장박원의 머릿속에 ‘남편을 성공시키는 여인’이라는 글자가 맴돌다 결국 빵! 터져 버렸다. 알딸딸하게 취한 그는 엽이채의 처소로 달려가 욕을 해 댔다.

“당신을 부인으로 맞이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재수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오!”

엽이채는 우당탕 뛰어나와 계단에 서서 그를 비웃었다.

“재수가 꼬였다고요? 나야말로 전생에 엄청난 죄를 지어서 당신에게 시집온 것이 분명해요! 그게 아니라면 왜 내가 눈이 멀어 이런 머저리에게 시집을 왔겠어요!”

“눈이 멀어? 퉤! 먼저 꼬드긴 게 누군데! 당신이 나를 유혹했잖소!”

장박원이 이를 악물며 침을 뱉어 대자 엽이채는 새빨간 눈을 부릅떴다.

“내가 유혹했다고요? 하하하, 이제까지 살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 제일 우스운 말이네! 내가 유혹을 했다고 해도 당신 눈이 멀지 않았으면 내 유혹에 넘어갔겠어요?”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주변의 여종과 어멈들이 모여들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 꼴을 봐요. 고귀한 집안 귀공자는 무슨, 이게 무슨 소년 수재란 말이야, 퉤! 평생 과거나 준비하는 한량 주제에! 다른 사람들 머리털만큼도 못 쫓아가면서!”

“다른 사람 누구? 주운환? 그렇게 그 사람이 좋으면 당장 나가서 그에게 시집가면 될 거 아니야! 내 집에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장박원은 길길이 날뛰었고 엽이채 또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게 다 몰염치한 당신 때문이야! 그때 산에서 발을 삐었을 때 왜 쫓아와서 날 부축한 거예요? 염치도 없지! 저질! 당신이 처제를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을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왜 당신하고 혼인을 했겠어요.”

“이 못된 것이!”

장박원은 더 이상 못 참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뺨을 때렸다. 엽이채는 지지 않고 달라붙어 그를 할퀴며 붙잡고 몸싸움을 시작했다.

“내가 처제를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고? 형부의 침상에 들어오려고 마음을 먹은 건 당신이야! 아니면 난 엽연채를 부인으로 맞았겠지! 엽연채는 남편이 잘되게 해 준다던데 당신은? 매일 죽을상을 하고 걸핏하면 울기나 하질 않았소? 부모가 죽기라도 했소? 당신은 남편을 잡아먹을 상이지!”

“남편을 잡아먹을 상? 하하하!”

엽이채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눈물 고인 내 눈을 제일 사랑한다고 한 게 누군데? 당신! 당신이야! 내 얼굴이 남편 잡아먹을 상이라면 당신은 바로 그런 남편 잡아먹는 얼굴을 좋아한 거라고!”

그러면서 장박원의 얼굴을 할퀴었다.

“아아악……! 내 얼굴!”

“나더러 남편 잡아먹는 상이라고 하고 엽연채는 남편 잘 풀리게 하는 사람이라니. 무슨 뜻이야? 애초에 엽연채와 혼인했으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당신일 거라는 말이야? 응? 우스워 죽겠네, 하하하……!”

“아아악! 악독한 것! 이 천한 것!”

“머저리! 등신!”

부부가 서로에게 욕을 하면서 뒤엉켜 싸우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못 볼 꼴이었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 중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소리 내어 웃는 사람까지 있었다.

두 연놈이 처음에는 얼마나 서로 죽고 못 살았던가!

사랑의 도피까지 감행했으니 그들은 염치와 체면 같은 것은 진작에 내던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미워하고 헐뜯다 못해 주먹질까지 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서로를 탓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하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이 떠올랐다. 유유상종!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구나!

소란을 듣고 나온 장찬과 맹씨, 장굉은 그 광경을 보더니 숨이 턱 막혔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미치광이가 된 양 막말을 쉬지 않고 쏟아 내고 있었다.

엽연채와 혼인했더라면 황좌는 장박원의 것일지도 모른다! 장박원과 혼인하지 않았더라면 엽이채는 진작 황후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을 듣자 장찬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온몸의 털이 곤두서서 불호령을 쳤다.

“뭘 기다리느냐! 어서 저 둘을 끌어내 묶고 입을 막아라!”

하인들이 뛰어나가 두 사람을 묶었다. 아직 입을 막기 전에 장박원이 고함쳤다.

“할아버지, 저 여자를 내쫓겠습니다! 쫓아낼 겁니다!”

“쫓아내! 쫓아내 봐! 나도 겁나지 않아. 아니지, 이건 쫓아내는 게 아니라 이혼이지! 나는 이혼할 거야!”

엽이채는 이혼이 무섭지 않았다.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엽연채가 저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황후의 여동생이니 좋은 집안으로 다시 시집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주운환도 한때 정혼자였던 나에게 특별한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조용히 하지 못해!”

장찬이 크게 소리치며 장박원을 노려보았다.

“감히 처를 내쫓아! 어디 해 보거라! 그럼 내가 네놈 물건을 잘라 줄 터이니.”

장박원에게는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엽이채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엽이채가 어떤 사람이든, 장박원과 잘 지내든 말든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엽이채가 있어야 장찬이 주운환과 친척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주운환과 엽연채 모두 엽이채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그 끈만큼은 절대로 놓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저 제정신이 아닌 두 사람을 저대로 내버려두면 장씨 가문 전체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장찬은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을 고향인 칭주로 함께 보낸 것이다. 오직 새해에만 도성에 돌아올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엽이채와 장박원은 그렇게 고향 집에 사실상 갇혀 지내게 되었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어도 결코 헤어질 수는 없는 운명! 과연 그들이 수해 전 서로에게 맹세했던 바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영원히 함께하자.”

“영원히 함께해요.”

* * *

삼월 초하루, 전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주운환은 황좌에 앉아 아래에서 답지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3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도 그때 저기에 앉아 시험을 봤다. 곁에 앉은 엽연채도 그때 생각이 났는지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붙였다.

“부군도 전에 여기서 모두를 놀라게 했지요?”

주운환이 조용히 웃었다.

“네, 그래서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발자취를 그녀에게 하나씩 보여 주고 싶었다.

전시가 끝나자 주운환은 공생貢生(각 지역 1차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진사로 발표했다. 이번에도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이 몇 있었다. 장원과 방안은 서른이 좀 넘은 사람이었고, 탐화는 겨우 스물두 살짜리 청년이었다.

주운환은 준수한 탐화랑을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도 급제한 사람에게 중매를 서 줘야 하나?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오래된 사람은 떠나야 했다. 주운환은 또 한 번 인사이동을 발표했다.

그의 기수에서는 장원이 황제가 되었고 방안 조범수는 아직 한림원에 있었다. 탐화 진지항은 벌써 육부에 들어가 제일 젊은 시랑이 되어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전려 초빙풍이 있었지!’

경엽제도 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주운환도 즉위 후에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재상의 손녀사위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림원에 있었다.

이번에는 이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야 했다.

조범수는 일은 못하고 교묘한 수단으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라 중용할 수 없었다. 하여 주운환은 그에게 도서를 관리하는 육품 비서소사를 맡겼다! 초빙풍은 재능은 있었지만, 성격이 모났기에 짧은 고민 끝에 다른 진사들 몇 명과 함께 도성 밖으로 보내 각 지역의 지현知縣으로 임명했다.

초빙풍은 대전에 서서 주운환을 보자 속이 쓰렸다.

처음 유 재상의 손녀사위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제일 잘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제민의 일로 유씨 가문은 저를 버렸다! 유곡요는 아들 둘을 낳자 아예 둘째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제민은 나중에 현주가 되고 엽연채와도 가까이 지냈다. 지금 엽연채는 존귀한 황후이다…….

‘만약 내가 유씨 가문에 기대지 않고 제민과 혼인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둘 다 놓쳤다! 이제는 도성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칠품 현령이 되었다! 실적이 뛰어나지 않으면 영영 승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긴 초빙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바람을 타고 올라가 푸른 하늘에서 밝은 달을 쫓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반쯤 날아갔을 때 날개가 꺾여 추락한 끝에 구덩이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초빙풍이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다음 해 가을, 제민이 탐화랑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 주운환은 제민을 의남매처럼 생각해서 공주의 혼례에 준하여 의례를 치러 주었다.

초빙풍은 그녀의 혼인 소식을 듣자 마음 한편이 푹 파인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그의 실적도 지지부진하여 초빙풍은 언제까지고 지현에 머물러 있었다.

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먼 훗날의 이야기였지만.

* * *

전시가 끝난 후 삼월 열엿새, 엽연채의 배에 소식이 왔다!

주운환과 온씨, 엽영교가 밖에서 애태우며 서성이고 있었다.

밤새도록 진통한 끝에 드디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흥분한 주운환이 산방에 들어가니 땀에 흠뻑 젖은 엽연채가 베개에 기대 있었다.

“부인. 괜찮아요?”

주운환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니 깨어 있던 엽연채가 희미하게 웃었다.

“철단이보다 훨씬 쉬웠어요.”

방금 들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떠올리자 주운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게 훨씬 쉬운 거라니?

그때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혜연과 청유가 강보를 하나씩 안고 다가왔다.

주운환은 쪼글쪼글하고 불그스름한 아기들을 보자 어찌할 줄 몰라 하면서도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우리 당이.”

혜연과 청유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혜연이 아쉬운 듯 말했다.

“폐하, 당이는 없습니다.”

옆에 있던 산파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축하드립니다, 마마! 두 분 모두 황자님이십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속이 상해 눈물까지 찔끔 나올 뻔했다!

공주가 태어날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고, 쌍둥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 기대는 더욱 커졌다. 둘 중 하나는 딸이겠지 했는데, 둘 다 아들이라니!

반면 온씨와 묘씨, 엽영교는 희색이 가득했다. 아들 셋이 있으면 엽연채의 지위가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황제에게 후궁을 들이라느니, 자식이 많을수록 다복하다고 권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대신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엽연채를 주시하던 사람들은 남몰래 탄식했다. 엽연채는 정말 팔자도 좋지!

주운환 부부는 쌍둥이 중 둘째의 이름은 주훤, 셋째의 이름은 주만이라고 지었다.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주요는 두 살이었다. 주요를 제대로 된 일국의 군주로 키우고 싶었던 주운환은 그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 후, 엽연채와 주운환의 기다림 속에서 드디어 그들의 공주가 태어났다. 공주의 이름은 주교교, 아명은 당이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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