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18
황제 부부 사이에 정이 두터운 모습에 온씨와 엽영교를 비롯한 사람들이 기뻐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기뻐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손씨와 엽승신 부부, 엽이채. 이쪽은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특히 엽이채는 밤잠조차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주운환이 황제가 되었다! 하니 원래대로라면 자신도 황후가 되었어야 했다! 황후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엽연채만 좋은 일을 시킨 꼴이 되었다. 한껏 이리저리 재고 고른 결과가, 겨우 머저리 같은 장박원에게 시집온 것이라니.
처음에는 장박원에게 시집가면 그가 평생 과거에 붙지 못한다 해도 삼품 고관의 적장손이니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주운환과 비교하면 장박원은 그저 무능한 폐인에 불과했다!
엽이채는 갈수록 장박원이 꼴 보기 싫었고 매일매일을 후회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엽연채를 저주했다.
‘황후가 됐다고 행복할 줄 알아? 앞으로 꽃처럼 아름다운 후궁들이 총애를 받으려고 매일매일 엄청나게 경쟁할 것이다! 그래, 소 황후처럼 끝나 버려!’
그런데 갑자기 황제 부부의 정이 두터워서 주운환이 후궁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엽이채는 금방이라도 피를 토해 낼 것 같았다.
장박원은 이미 몇 달째 그녀의 처소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장박원의 후원에는 이낭이 다섯이나 들어왔고 서자와 서녀들이 연달아 태어났다. 둘째 서자가 태어나더니 곧 서녀가 태어났고, 지금은 이낭 둘이 아이를 가져 잔뜩 부른 배를 내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엽이채는 그 역겨운 모습을 참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손씨도 화를 참지 못하고 엽학문을 찾아갔다.
“연채는 총애를 받고 균이도 국공이 되었는데 친조부인 아버님은 작위 하나 없고 조정에서 관직도 하나 받지 못하고 있다니요. 전에 진서왕 시절에 관직을 하나 달라 청했더니 경엽제가 상관 가문 자리로 남겨 둔 것이라며 핑계를 댔죠? 그럼 지금은요? 즉위를 한 지금도 연채는 아버님에게 어떤 관직도 내리지 않았잖아요.”
엽학문도 엽연채에게 불만이 쌓여 있었지만, 손씨가 이렇게 이간질을 하자 어두워진 얼굴로 매섭게 호통쳤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할 일이 그렇게 없으면 영이나 잘 가르쳐라. 벌써 열여섯이나 된 녀석이 말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엽학문도 노여웠지만 엽연채는 저를 도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떨어질 게 있어야 난리도 칠 것 아닌가.
“아버님도 힘드신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연채는 이기적인 아이라서 믿을 수 없어요. 그때 우리 이채가 시집을 갔더라면 벌써 재상 자리를 아버님께 드렸을 거예요.”
엽학문이 눈을 부라렸다.
“말 한번 잘했구나! 그럼 당시 뭐 하러 빼앗아 갔느냐? 이제 와서 이채 이야기를 하면? 이채가 이혼이라도 하고 궁으로 재가하겠단 말이냐? 썩 나가거라!”
순간 손씨는 창피했다. 이채가 이혼을 하고 궁으로 시집을 간다, 그건 참 괜찮은 생각이다! 하지만 정말 이혼을 한다고 해도 주운환이 이채를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연채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보세요. 후궁을 들이지 못하게 연채가 폐하에게 우긴 것이 분명해요. 지금이야 연채가 젊고 예쁘니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에 폐하가 허락을 했겠지요. 하지만 몇 년 지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박원이를 좀 보세요. 옛날에 이채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몰래 도망까지 쳤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천한 것들을 총애하느라 이채는 내버려두고 있어요. 연채는 주변머리가 없으니 황제가 그 아이를 좋아할 때를 피해 몇 사람 더 집어넣으셔야 해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황후의 자리는 절대로 잃어서도 빼앗겨서도 안 돼요. 이채는 무리라도 우리에게는 미채가 있지 않아요? 아버님께서 얼른 계획을 세워 미채를 입궁시키시란 거죠. 자매가 한 부군을 모시면 서로 돕기도 좋지 않겠어요!”
실제로 사이가 좋은 자매 아니던가? 지금 집어넣으면 자매간의 우애도 깊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엽연채는 속이 뒤집어질 것이었다. 손씨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엽학문도 그녀의 말이 일리 있는 것 같아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어디서 같잖은 수작이야! 황제 폐하에게까지 감히 술수를 쓰려고!”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굳은 얼굴의 묘씨가 들어오고 있었다.
엽학문은 짜증이 났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아무 짓도 시작하지 않은 거겠지요.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잖아요.”
묘씨가 들어오더니 철썩! 손씨의 뺨을 올려붙였다.
“집안을 말아먹는 년!”
“아이쿠……!”
뺨을 맞은 손씨는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부인!”
엽학문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사람은 괜히 왜 때리는 거요?”
“집안을 말아먹으려 하는데 저걸 때리지 않으면 누굴 때려요? 당신을 때려요?”
묘씨가 냉소했다.
“이……!”
엽학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는 손씨를 예뻐하는 줄 아는가? 하지만 체면이 있지! 내 앞에서 사람을 때려?
“거꾸로 됐군. 이 집의 주인이 누구요?”
“나리시죠!”
묘씨는 비웃으며 한마디 덧댔다.
“됐어요. 이 집은 나리가 잘 관리해 보세요! 나는 오늘 영안후부로 이사 가서 균이와 살 거예요.”
주운환이 즉위한 후 국구 엽균을 영안후에 봉했다. 엽균은 엽씨 집안에서 나와 영안후부로 들어가며 온씨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엽학문도 영안후부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싶었지만 엽균이 온씨를 데리고 들어갔다 하니, 자신이 가기는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엽균이 직접 와서 함께 살자 청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 수밖에!
이 판국에서 엽학문은 묘씨가 엽씨 집안을 나가 엽균에게 가겠다는 이야기를 듣자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났다. 이렇게 다 가 버리면 자신은 어쩐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 모두 부귀영화를 얻고 혼자만 그대로인 것 같았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요!”
“저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나리가 이 집안을 말아먹는 물건도 때리지 못하게 하시잖아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겠어요.”
묘씨가 다가와 천천히 평상에 앉았다. 출세한 사위를 둔 묘씨도 이젠 엽학문을 겁내지 않았다.
“나리,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네? 주씨 집안 적통들을 좀 봐요. 폐하의 적모인 태후 같은 신분도 도성에서 쫓겨났는데, 나리는 대체 자기 능력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하나는 전신이 마비되고 하나는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진씨와 주묘서! 그 모녀의 이야기를 듣자 엽학문의 몸이 절로 떨렸다.
“나리, 이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편안히 말년을 즐기세요! 일흔이 코앞인 사람이 그런 공명과 이익을 탐해서 뭘 하려 그래요? 장찬이나 유 재상 같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능력이 출중해서 그런 거예요. 나리도 그들 못지않으셨다면 수십 년 동안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서고 관리나 했겠어요? 그조차도 결국은 해직되었지요.
그러니까, 나리는 관리로 출세할 팔자가 아니신 거예요. 손녀사위가 황제가 됐으니 편법을 쓰면 높은 자리에 앉을 수야 있겠지요. 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렇게 하면 대단해 보일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나리 능력을 모를 것 같아요? 괜히 나중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나 되지 마세요.”
엽학문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화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 자네…….”
“자네 뭐요?”
묘씨가 눈을 번득이며 계속 쏘아댔다.
“연채가 나리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으니 미채를 궁으로 들여보내겠다고요? 폐하에게 베갯머리송사를 하게 해 높은 자리를 받아 내려고요?
아이고야, 우스워 죽겠네! 어느 세월에 미채가 총애를 받을 수 있을 줄 알고요? 그러면 나리는 정말 칠순은 될 텐데 자리를 준다 해도 제대로 앉아 있을 수나 있겠어요? 그리고 미채가 궁에 들어간다고 연채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도 저도 다 잃지 말아요. 엽씨 집안에 딸이라고는 이제 둘밖에 남지 않았잖아요. 연채가 황후가 되어 집안에 좋은 기운이 돌고 가문이 귀해졌단 걸 잊으신 거예요? 믿을 구석이 있을 때 미채를 명문대가의 정실부인으로 시집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궁으로 들여보내 연채를 함정에 빠뜨리겠다고요?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엽학문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지만 부끄러움은 도리어 노여움으로 변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하겠다고 했소! 나는 그저 연채 혼자 궁에 있어 언젠가는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될 테니 미채를…….”
“지난번 이 시랑이 후궁 이야기를 꺼냈다가 관직을 잃었는데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바깥사람이 황제의 후원에 참견한단 건 얼토당토않은 얘기예요!”
묘씨의 냉소에 엽학문은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묘씨는 고개를 홱 돌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손씨를 쳐다보았다.
“너희는 정말 하루라도 수작을 부리지 않으면 간지러워 죽겠니? 여기저기 이간질이나 하고 다니는구나. 애초에 제 눈이 멀어 장박원 같은 머저리를 빼앗느라 주씨 집안을 버린 것 아니야? 황제 폐하와 연채가 잘나가니 이제 와서 눈알이 벌게지는 병에 걸린 거지. 이제 나리까지 꼬드겨서 연채를 괴롭히려고? 하핫!”
참담한 손씨의 얼굴색이 변했다.
“저는 그냥… 그저…….”
묘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여봐라, 둘째의 말본새가 천박하니 끌어다 뺨을 서른 대 쳐라.”
밖에서 마마 두 명이 얼른 뛰어 들어와 손씨를 끌고 나갔다.
수치스러워하는 엽학문에게 묘씨가 차갑게 일렀다.
“미채 혼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시면 돼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누가 연을 맺고 누가 혼인을 하는지 일일이 신경 쓰면 되나요.”
엽학문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손씨는 한바탕 매를 맞고 나니 화는 나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묘씨는 둘째 식구들을 전부 고향으로 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엽승덕과 은정랑이 고향 집에서 ‘아끼고 사랑하며’ 지내고 있었다! 둘째 식구들까지 그곳으로 쫓아 보내면 못난 것들이 의기투합해서 정말 무슨 못된 짓을 꾸밀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째 집안 식구들은 매번 입을 잘못 놀리긴 해도 죽을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눈앞에 두고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