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29화 (829/858)

번외 1-15

“아. 처음 나리께서 집에 그분을 들일 때는 혈혈단신으로 오셨었지요. 나중에 나리께서 소인에게 그분을 보살펴 드리게 하셨어요.”

교 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운하공주의 이야기를 묻는 것을 보니 주운환이 그녀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스스로 말을 이어 갔다.

“공주 마마는 그때 아이를 가진 채로 도성에 돌아오셨지만, 나리께서 공주 마마의 처소에 들르시는 일은 몹시 드물었지요. 그러다 응성으로 가시고 나서는 더 이상 공주 마마를 만나러 오실 수 없었고요.

공주 마마는 미모 때문에 주씨 집안에 들어오고 난 후 시샘도 많이 받으셨어요. 하지만 공주 마마는 이낭들과 한 번도 다투신 적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속을 긁어 대도 그저 웃으실 뿐, 신경 쓰시지 않았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낭들도 공주 마마를 괴롭히지 않았고요.

이렇듯 항상 국화같이 평온하며 침착하고 얌전한 모습이셨지만, 남들 따라 웃고 있어도 눈에는 우울함이 가득했었어요. 행복해 보이지 않으셨답니다.”

교 마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운환의 눈에 깊은 슬픔이 어렸다. 교 마마는 주운환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작게 한숨 지었다. 주운환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운환은 모든 것을 알 자격이 있었다.

“공주 마마는 늘 정원에 앉아 계셨어요. 먼 곳을 보면서 멍하니 앉아 계시길래 언젠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물어봤었어요. 멀리 있는 남동생을 그리워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분이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서 그런 곳으로 팔려 갔고, 그래서 남동생은 고향에 있겠거니 생각했었어요. 그분은 말씀이 없으셨기에 저도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거든요.”

교 마마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분이 기뻐했던 일이 하나 있었어요. 아이를 가졌을 때요. 사실 처음에는 공주 마마도 별 감흥이 없어 하셨습니다만, 달수가 찰수록 아이가 태어나는 날을 기다리셨어요. 태어나신 후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품에 안고 몹시 아끼셨어요.”

주운환은 가슴이 따뜻해지더니 그 온기가 이내 눈시울까지 전해져 침묵했다.

교 마마가 자리를 떠나자, 엽연채는 그를 살짝 감싸 안았다.

“그러니까, 그분이 제일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주운환은 엽연채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듯 말했다.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건 부인 아닙니까?”

엽연채가 낮게 웃었다.

“그분이 가장 먼저 당신을 사랑한 사람이에요. 양왕 전하가 두 번째, 전 세 번째고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아요.”

주운환은 감격에 북받쳐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

“부인…….”

그에게 밀려 엽연채는 융단에 쓰러졌다. 주운환이 가볍게 입을 맞춰 오니 엽연채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치며 웃었다.

“뭐 하는 거예요? 여긴 아기가 노는 곳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콩콩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얼른 일어났다. 주요가 뒤뚱거리며 들어와 엽연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엽연채는 ‘끙’ 소리를 내더니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휴, 우리 철단이 무겁기도 하지. 철단아, 정말 단단한 무쇠 같구나.”

주운환이 살짝 놀랐다.

“당신은 당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왜 갑자기 철단이라고 하는 겁니까?”

엽연채는 주요의 작은 손을 잡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철단이는 아프지 않으니까요!”

푸핫, 주운환이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말이 맞습니다.”

이때, 엽연채 품에 안겨 있던 주요가 갑자기 몸을 돌려 주운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버지…….”

부부는 깜짝 놀랐다. 주운환은 단숨에 주요를 받아 안았다.

“자소야, 지금 뭐라고 했니?”

“아버지!”

주요가 사랑스럽게 다시 한번 주운환을 불렀다.

“아하하, 높이 높이.”

“하하하, 우리 자소의 입이 트였구나. 그래, 높이 올려 주마!”

주운환이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리자 까르륵까르륵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른 집의 아이들은 일고여덟 달 정도 되면 금방 아버지 어머니를 불렀지만 주요는 돌이 되도록 입을 굳게 닫고 도통 열지 않아 엽연채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의정은 맥을 보고 나서 아무 일도 없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열네 달, 주요가 드디어 입을 떼어 말을 하기 시작하자 부부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주요는 주운환과 실컷 놀고 난 뒤 항탁 위에 놓인 간식을 집어 먹었다.

짤따란 팔로 떡을 집어 들고 먼저 한 입 베어 물고는 주운환에게 한 입 주고 다시 엽연채에게 건넸다. 한데 엽연채는 떡을 베어 물자마자 속이 불편해졌다.

“웁……!”

곧 한구석으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부인. 왜 그러십니까?”

주운환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주렴 아래 서 있던 혜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마마의 달거리가 벌써 열흘이 늦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설마?”

엽연채와 주운환은 놀라서 그대로 굳었다.

그건…….

“의정을 불러와라.”

주운환이 말했다.

눈치 빠른 청유는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주운환이 몸을 돌려 엽연채를 번쩍 안아 들고 침상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엽연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진짜라고 해도 내 발로 걸으면 돼요.”

주운환도 나지막하게 웃었다.

“필요합니다. 부인이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엽연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원망하는 거예요?”

“아니, 내 탓을 하는 겁니다. 3년 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음, 역시 내 능력이 뛰어난 탓이군요.”

주운환이 탄식하듯 웃었다.

살짝 신경질이 난 엽연채가 그를 밀쳤다. 주운환은 웃음을 띤 채 그런 그녀를 평상에 뉘었다.

곧 의정이 와서 엽연채의 맥을 짚어 보더니 웃었다.

“맥박이 굉장히 약하고 달수가 적긴 하지만, 좋은 소식이 분명합니다. 경하드립니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

이 소식을 듣자 엽연채와 주운환은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주운환은 한편으론 마음껏 엽연채를 사랑해 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후엔 꼭 조심하리라 다짐하면서, ‘이번에는 꼭 여자아이였으면 좋겠군!’ 하고 바랐다.

‘만약 아들이면 아명은 철두라고 할 것이다. 딸이라면… 그래! 그렇다면 이번엔 당이라고 하자!’

* * *

태의가 진단하기로는 회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달수가 차지 않았기 때문에 소식을 알리는 것은 미루기로 했다.

주비양이 진씨와 주묘서를 데리고 궁을 떠난 후, 주운환은 조정의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성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다. 두왕이 그제는 이씨 집안 소저와 혼인을 한다고 했다가, 어제는 요씨 집안 소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고, 또 오늘은 임씨 가문 소저를 맞아들인다고 난리를 피웠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종과는 잔뜩 들떠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하면서 주운환이 혼사를 정해 주겠다고 한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주종과가 한창 혼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어느 날, 주운환이 아침 조회에서 대신들에게 말했다.

“어제 서노 왕이 서신을 보내와 서노의 장공주가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니 도성으로 시집보내고 싶다고 알렸소. 짐에게 공주의 혼사를 정해 달라 하더군.”

대신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원래 주운환이 응성에 가지 않게 됐으니 서노가 또다시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다. 국경이 다시 위태로워지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주운환이 서노에 서신 몇 통을 보냈더니 서노가 스스로 혼인의 연을 맺자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운환의 후궁은 비어 있었다! 대신들은 어떤 구실로 주운환에게 후궁을 들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서노의 공주가 나타난 것이다!

“폐하, 아주 큰 경사입니다.”

여지가 말했다.

“맞습니다.”

유 재상과 대신들이 웃으며 동조했다.

“서노 공주를 누구와 혼인시키면 좋겠소?”

주운환도 웃으며 물었다.

대신들이 서노 공주를 후궁으로 들이자고 말하려던 참에 진무가 앞으로 나섰다.

“소신은 두왕 전하가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들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주운환은 살짝 웃었다.

“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짐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싫어서 말이야. 여봐라, 두왕을 불러들여라.”

대신들은 그저 얼굴만 바라보았다. 후궁으로 들이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두왕과 맺어 주다니. 게다가 두왕의 생각까지 물어보겠다? 황제가 너무 서노를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닌가.

곧 주종과가 실실거리며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주종과는 예전부터 주운환을 몹시 못마땅해했지만, 주운환이 황제가 되고 난 후에는 완전히 수그러들었다. 황제라는 신분은 태산과 같아 평생이 걸려도 대적할 수 없으니 마지막 남은 투지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주운환의 흠을 잡으려는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길 배짱은 없었다.

어찌 됐든 자신도 왕이 되었으니 속은 계속 쓰려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서노의 공주가 도성에 시집을 오게 되었네. 두왕도 마침 혼인을 할 때가 되었으니 짐이 그대들 둘의 혼인을 맺어 줄까 하는데, 두왕의 생각은 어떻소?”

그 말을 듣자마자 주종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어떤 세도가의 적녀들을 보아도 왜 그렇게 하나같이 마음에 차지 않고 결정하기 어려웠는지 이제 깨달은 것이다! ‘공주’라는 두 글자가 귀에 들어오자 순간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바로 이거였다! 나는 고귀한 공주를 아내로 맞아야 하는 사람인 거다!’

그는 이제야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 이 오랜 시간 동안 왜 부인을 얻지 못했는지, 원남옥이든 제민이든 왜 그렇게 지나쳐 갔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운명은 벌써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고귀한 공주를 배필로 맞아야 한다고!

주종과는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바라보았다. 엽연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공주보다 고귀하겠는가! 주운환이 황제면 또 어떠냐, 적어도 혼사 면에서는 공주와 혼인하는 자신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네! 좋습니다!”

주종과는 주운환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서노 공주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서둘렀다. 주운환은 미칠 듯이 기뻐하는 주종과의 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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