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14
“태후… 태후 마마…….”
정 마마와 사람들이 바깥에서 울고 있었지만, 주 백야가 데려온 환관들이 그들을 막고 있었다.
이때,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뭐 하시는 겁니까?”
주비양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뛰어와 단숨에 주 백야가 들고 있던 병을 쳐냈다. 병은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어두운 녹색 빛을 띠는 약이 고작 몇 방울만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진씨는 벌써 대부분을 삼킨 듯했다.
“쿨럭… 아……!”
진씨는 목을 붙잡고 죽어라 콜록거렸다. 얼굴은 검붉게 일그러져 있었고 사지가 계속 기괴하게 비틀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태의를 불러라!”
주비양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악! 어머니!!”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주묘서가 뛰어 들어왔다. 진씨는 사지가 배배 꼬인 참담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 백야와 주비양은 어두운 얼굴로 한편에 서 있었다.
주묘서는 진씨에게 달려들어 울부짖었다.
“어머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엉엉, 어머니……! 비양 오라버니, 어머니가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냐구요?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태의와 환관들이 뛰어 들어왔다.
주비양이 급히 말했다.
“태의, 얼른 봐 주게나.”
태의는 진씨에게 다가가 맥을 잡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해독약이 없는 묵담墨膽이라는 독입니다. 어휴… 이미 이렇게 많이 마셨으니 어서 쌀뜨물을 먹여 토해 낼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 늦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비양은 납빛이 된 얼굴로 황급히 쌀뜨물을 준비시켰다.
사람들은 눈이 뒤집어진 진씨에게 벌컥벌컥 그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진씨는 어두운 녹색 물을 두 대야 정도 잔뜩 토해 낸 다음 투명한 물까지 토해 냈다. 모두 토해 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진씨의 팔다리와 얼굴은 마비된 채였다. 입까지 비뚤어져 말도 할 수 없었다.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거의 흡수가 되었지만 반은 토해 냈으니 목숨은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 이미 몸은 망가져 버리셨습니다!”
주비양은 훅 숨을 들이켜고는 옆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주 백야는 자신과 수십 년 동안 한 이불을 덮던 본처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보자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그도 순식간에 십수 년은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주 백야는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섰다.
주묘서가 뛰어와 태의의 옷자락을 잡고 광인처럼 빽빽 소리쳤다.
“무슨 말이에요? 망가졌다니?”
태의는 그 광기에 놀라 새파란 얼굴로 그녀를 밀쳤다.
“말 그대로 망가졌다는 뜻이지요. 노인이 중풍을 맞은 것처럼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아, 어떻게! 이런 돌팔이! 어서 나 의정을 불러와요!”
주묘서는 소리치며 태의에게 주먹질까지 했다. 화가 난 태의가 주묘서를 밀치자 그녀는 우당탕 바닥에 넘어졌다. 태의는 더는 참을 수 없는지 그녀에게 침을 뱉었다.
“퉤, 무슨 짓이야! 소박맞고 폐위된 비천한 죄인들 주제에 감히 이런 짓을! 언감생심 의정을 청하다니!”
태의는 곧 약상자를 둘러메고 떠나 버렸다. 주비양이 자리에 있음에도 태의는 그를 전혀 겁내지 않았다. 주비양은 실권도 없고 곧 도성에서 쫓겨날 왕에 불과했다.
“우우… 쿨럭……!”
바닥의 진씨는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망연자실한 눈빛이었다. 보아하니 정신만은 또렷한 것 같았다.
“엉엉… 어머니, 어머니!”
주묘서는 감히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주비양에게 달려가 주먹질을 해 댔다.
“어떻게 어머니에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어머니를 해칠 수가 있어요. 소박맞고 폐위가 되었어도 우리 어머니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요……!”
앞선 상황을 보지 못한 주묘서는 진씨에게 약을 먹인 것이 주비양인 줄 알았다. 그녀의 눈에 주 백야는 아무리 간이 커졌대도 이런 큰일을 벌일 수는 없는 사람이니, 주비양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주비양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맞고만 있었다. 한참 아무 말도 없던 그에게서 불현듯 ‘허허’ 하는 참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
“무슨 말이에요? 오라버니, 미쳤어요?!”
주묘서는 눈을 치뜨며 악을 써 댔다.
정 마마와 녹지, 녹엽, 춘산 등 측근들은 그러한 남매를 뒤로하고 진씨 곁에 모여 울었다.
“마마… 태후 마마, 엉엉……!”
특히 정 마마와 녹지가 제일 마음 아파하며 진씨의 몸을 연신 주물러 댔다. 그렇게 하면 진씨를 고칠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주비양이 담담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정 마마와 녹지를 끌고 가서 죽여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방을 나섰다. 놀라서 겁에 질린 정 마마와 녹지가 고개를 홱 들었다.
“전하, 무슨 말이세요?”
“오라버니, 뭐라고 하셨어요? 설마……!”
주묘서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주비양 곁에 있던 호위 무사 둘이 뛰어와 정 마마와 녹지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흰 비단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바깥에서 비명 소리가 그친 다음에도 주묘서는 바닥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진씨를 보며 목 놓아 울었다.
* * *
이튿날 아침, 조회에서 주운환은 태후가 태황태후를 모해하려다 발각된 일을 공표했다. 태상황이 처를 내쫓고 자신이 태후와 흔설공주를 폐위한 일련의 일도 모두.
주운환은 진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중풍을 맞아 마비되었다고 말을 이었다. 주비양이 그래도 진씨를 봉양하기를 원하여 스스로 진씨와 주묘서를 데리고 궁을 떠나 영지로 가겠다고 청해서 허락했고, 태황태후는 부상으로 인해 정주로 가려던 계획을 접고 궁에서 휴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이 이 일로 또다시 시끌시끌했다. 대부분은 진씨 모녀는 나쁜 짓을 하다 결국 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오시 일각, 주비양은 행장을 챙겨 진씨와 주묘서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
매씨는 성문 쪽을 바라보며 살짝 한숨지었다.
진씨에게는 응당한 결말이었다. 손을 쓰지 않았다면 설령 주운환에게는 아무 짓도 못 했더라도 주비양의 앞길을 막았을 것이었다. 주묘서는 진씨가 쓰러지면 어떤 위험한 모략도 생각해 내지 못할 그릇이었다.
물론, 진씨를 제압하는 일도 주운환의 머릿속에 분명 들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매씨는 주운환과 주비양 사이의 귀한 우애까지 사라지는 것만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정을 시켜 진씨의 일을 수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매씨는 주묘서의 그릇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비양이 도성을 떠나고 사흘 후, 주묘서가 도망친 것이다!
주묘서는 줄곧 진씨를 그렇게 만든 것이 주비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비양이 정 마마와 녹지까지 죽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녀는 그가 주운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씨를 해쳤다고 믿은 것이다.
‘친어머니도 저렇게 만들었는데 다음은 내 차례 아닐까?’
자신은 이제 고작 열여덟이었다. 마비되어 침상에 누워만 있고 싶지 않았다! 겁에 질려 급기야 도망을 친 것이다.
주비양이 주묘서를 찾을 사람을 풀자 그녀는 병사들을 피하려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다 치료가 용이치 않아 그 다리를 결국 잘라 내고야 말았다.
주비양의 영지에 도착한 후 더없이 우울하고 예민해진 주묘서는 매일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다리 한쪽이 없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편, 적통 가족들이 도성을 떠나자 엽연채는 가슴을 짓누르던 큰 산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높은 등천루에 올라 궁문 쪽을 보고 있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주운환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를 묶은 띠는 바람에 휘날리고 그가 입은 샛노란 용포의 옷자락이 소리 내며 펄럭이고 있었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곁에 서서 먼 곳을 응시했다. 엽연채는 고개를 돌려 그의 아름답지만 쓸쓸함이 드리운 얼굴을 보았다. 어쩐지 처음 그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깨끗이 빨아 입은 빛바랜 의복과 폭포처럼 늘어뜨린 긴 머리, 청량하고 우아하지만 유약한 서생.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는 달라져 이젠 하늘을 떠받치고 우뚝 서서 이 땅을 책임지는 군주가 되어 있었다.
엽연채는 난간 위에 놓인 그의 손, 또렷하게 드러난 손마디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부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주운환이 황위를 이어받은 후 두 달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주운환은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단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주운환은 잠시 말이 없다가 느리게 운을 뗐다.
“과연… 그분이 나를 좋아했었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엽연채는 흠칫 놀랐다. 그분이 운하공주를 칭하는 줄 금세 깨달은 것이다.
“난 그분이 평범한 기루의 여인이었으면 했어요.”
주운환의 눈에 비통함이 스쳐 갔다.
그녀가 처음부터 비천한 신분이었다면 비록 기루의 여인이 됐더라도 조금은 나았을 터였다. 나중에 주씨 가문에 시집을 왔고 아이를 임신해 자리를 굳혔을 땐 기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공주였다. 황실의 금지옥엽이자 존귀한 사람이었고 행복하게 살았었다. 그랬는데 그런 신세로까지 전락한 것이다.
주운환은 참지 못하고 공주의 생전 이력을 알아보았다. 기루에 팔렸을 뿐만 아니라 금수만도 못한 남자 둘에게 유린당했다……. 주씨 집안에 들어온 것 또한 세파를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그 생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아이를 가진 것이다!
“그럼요, 분명 부군을 좋아하셨을 거예요.”
엽연채는 따스한 눈길로 주운환을 보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어요. 어쩌면 처음에는 정말 도망가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부군을 좋아했을 거예요.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기를 떼어 버리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인걸요.”
주운환이 움찔하는 순간, 엽연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만 가요…….”
두 사람은 등천루에서 내려와 태극전으로 돌아갔다.
* * *
태극전 서차간. 바닥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주요를 위해 엽연채는 바닥에 융단을 깔아 두고 그 위에서 아들과 함께 장난을 치며 놀곤 했다.
엽연채는 주운환을 서차간으로 데리고 와 신발을 벗고 융단 위에 앉았다. 주운환은 그들 모자가 늘 함께 노는 곳에 따라 앉았다. 엽연채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와 아기의 젖내가 주변에 스며 있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혜연, 교 마마를 불러와.”
엽연채는 주운환의 유모였던 교 마마를 계속 중용하고 있었다. 입궁한 후에는 교 마마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 집사를 맡겼다. 이제 작은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지금이면 아기에게 줄 간식을 만들고 있을 시간이었다.
엽연채는 바닥에 놓인 낮은 탁자에서 주전자를 들어 주운환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곧 교 마마가 들어왔다. 그녀는 장미 전병, 새우와 무가 들어간 떡과 매실탕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교 마마는 다가와 항탁에 음식을 하나씩 올렸다.
“교 마마, 예전에 운하공주의 시중을 들지 않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