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12
곧 주운환, 주 백야, 주비양 내외, 주종과, 심지어 백 이낭과 비 이낭까지 모두 도착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상황과 진씨와 주묘서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주비양의 표정이 변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또 수작을 부린 것이다.
“어머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 백야가 매씨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의정, 할머니를 좀 봐 주게.”
주운환의 명에 나 의정이 매씨의 상처를 살폈다. 매씨는 창백한 얼굴로 나 의정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었다.
“허리를 삐끗한 것 같은데, 맞지?”
나 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도 참, 조심하시지 않구요…….”
“네 부인에게 물어봐라.”
매씨가 어두운 낯빛으로 주 백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부인이 나를 미끄러지게 한 것이니. 내 이 늙은 목숨을 노렸나 보지.”
진씨와 주묘서는 얼굴색이 변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어머님이 넘어지셔 놓고 어떻게 제 탓을 하세요? 제가 전에 생각이 짧아 얼굴에 먹칠하는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일로 저를 모함하시면 안 됩니다.”
“맞아요, 저희는 할머니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어요. 할머니를 부축한 건 작은새언니와 둘째였어요. 누군가 일부러 할머니를 해치려고 했다면 작은새언니와 둘째가 한 일이겠지요. 할머니가 저희를 싫어하시는 건 저와 어머니도 잘 알고 있어 가까이 가지 않고 멀찍이 뒤에 떨어져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할머니의 목숨을 해하려 했다니요.”
진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묘서도 얼른 거들며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주 백야는 고립무원 같은 두 모녀를 보자 동정심이 일었다. 하여 그들을 도와 한마디 하려는 찰나.
“나 매람은 86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모함한 적이 없다.”
매씨가 손에 쥔 용 머리 지팡이를 세차게 두들기며 한기를 내뿜으니 주 백야와 진씨 모녀는 일제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장 마마, 내 신발을 벗겨 보게.”
매씨는 진씨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넘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현장을 벗어나지 않았고 신발을 바꿔 신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리고 셋째 며느리와 둘째 손녀만 나를 여기까지 부축했다.”
진씨와 주묘서의 안색이 달라졌다.
장 마마는 바로 매씨의 신발을 벗겨 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하나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여 다들 고개만 갸웃거리는데, 엽연채가 불현듯 ‘어’ 소리를 냈다.
“어, 얇은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신발 바닥에 손톱만 한 크기의 얇고 투명한 종잇조각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이게 뭐죠?”
주 백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흥.”
매씨가 처진 눈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빛이 진씨의 얼굴에 닿았다.
“그건 네 잘난 부인에게 물어보아라.”
진씨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뭘 알아요?”
“태황태후 마마께서 넘어지시기 전, 뒤에 있던 궁녀 소연이 태후 마마가 소매에서 뭔가 꺼내 던지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태황태후 마마의 발밑까지 굴러갔다고 하더군요.”
장 마마가 차갑게 고하니 평범하게 생긴 궁녀 하나가 그녀 곁에 서서 자신이 본 바를 나지막이 알렸다.
“태후 마마께서 소매에서 몰래 뭔가 꺼내서 던지시는 걸 소인이 봤습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못 봤지만 앞에서 가시던 태황태후 마마께서 그걸 밟고 바닥에 미끄러지셨습니다. 소인은 너무 겁이 나서 큰 소리로 알리지 못하고 그저 장 마마께만 말씀드렸습니다.”
진씨와 주묘서의 얼굴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진씨가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며 잡아떼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모함이에요!”
주운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가서 태후 마마와 공주의 몸을 뒤져 보아라.”
뒤에 서 있던 환관 네 명이 바로 달려가 진씨와 주묘서를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냐? 난 태후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놔라! 놔……!”
진씨가 소리쳤다. 하지만 여인의 힘으로 환관 여럿을 어찌 당해 낼 수 있겠나. 환관들은 조금의 체면도 생각해 주지 않고 거리낌 없이 두 사람의 몸을 뒤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주비양은 차갑고 초조한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없어! 없다니까!”
진씨의 고성에도 환관들은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수색하고 또 소매도 뒤집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봤느냐! 아무것도 없다!”
진씨가 차갑게 소리쳤다.
“네 손을 펴 봐라.”
차디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씨였다. 그녀의 지적대로 진씨는 계속 주먹을 쥐고 있었다.
진씨의 안색이 또다시 변했다. 곁에 있던 환관이 그 손을 잡고 펼쳐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손가락만 한 얇고 투명한 것이 손가락 사이에 있었다.
환관은 얼른 그 작은 조각을 떼어 주운환에게 가져갔다.
주운환은 차가운 눈으로 의정을 향해 물었다.
“의정, 이게 뭔지 좀 보시오.”
나 의정이 얼른 그 조각을 건네받고는 매씨의 신발 바닥에서 떼어 낸 것과 비교해 보고 대답했다.
“같은 것입니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기름 주머니입니다. 특별히 만든 기름을 창자 껍질에 넣어서 작은 기름 주머니를 만든 것입니다. 땅에 떨어뜨려서 그걸 밟으면 주머니가 터집니다. 바닥이 미끄러우면 넘어지지요.
안에 든 기름은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서 터져서 햇빛을 받으면 금방 휘발되어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기름을 찾을 수 없고 창자 껍질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진씨는 부들부들 떨면서 웅얼거렸다.
“아니… 당신… 무슨 헛소리… 내, 내가 어떻게…….”
“아직도 잡아떼느냐? 증거가 바로 네 손에서 나왔다.”
매씨가 무서운 눈으로 진씨를 보았다.
“두 개를 준비한 것은 내가 밟지 않으면 두 번째 주머니를 던지려던 거겠지? 내가 첫 번째 주머니를 밟았으니 남아 있는 두 번째 주머니는 버리려다 장 마마와 사람들이 너를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차마 버릴 수 없었겠지. 그러다 몸수색을 한다고 하니 터뜨려서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고.
지난번 목을 매달았던 것이나 다른 농간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제 늙은 목숨까지 노리다니! 추잡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구나. 발뺌한다고 도망갈 수 있겠느냐?”
주 백야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화가 치밀어 진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자네……!”
주묘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 백야를 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들 왜 이렇게 우리 모녀만 공격하는 거예요! 다들 나와 어머니만, 우리만 노리고 있잖아요. 지금도 일부러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엉엉……!”
굳은 얼굴의 매씨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조용히 해라! 엇……!”
매씨가 휘청하자 엽연채가 화들짝 놀라며 주묘화와 함께 그녀를 부축했다.
“어서, 가마를 가져와라. 일단 안으로 모시거라.”
엽연채가 황급히 지시를 내렸으나 눈이 벌게진 매씨가 거절했다.
“아니다, 우선 저 모녀부터 처리해야겠다! 아니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다니. 쫓아내겠어! 이번엔 정말 쫓아낼 거다!”
격노한 주 백야가 노성을 쳤다.
“안 돼요, 아버지! 어머니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주묘서가 소리치자 주 백야는 더욱 분노했다.
“묘서 너도다! 그렇게 네 어미와 수작질하는 것을 좋아라 하니, 너도 같이 가 버리거라!”
진씨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를 쫓아낸다고요? 보나 마나 낙운 그 천한 것에게 자리를 내주려는 거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주씨 가문의 정실부인이에요! 서자가 출세를 했다고 집에서 나를 내쫓겠다니… 낙운 그 창기에게 자리를……!”
진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운환이 다가가 뺨을 때렸고, 진씨는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주운환의 눈빛이 전에 없이 차갑고 어두웠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자를 때려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내 적모이자 집안의 어른입니다. 하나 당신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주운환의 그 차갑고 어두운 시선에 진씨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너 이 천한……!”
주운환이 냉소했다.
“나는 서자이고 당신은 내 적모입니다. 나는 태어난 후로 늘 분수에 만족하며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늘 나를 박하게 대했어도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습니다. 당신들은 적통이고 나는 서자이기 때문에 감히 적형과 같은 대접을 받겠다는 헛된 희망도 가져 본 적 없습니다.
당신 기분이 나쁘다고, 머리가 아프다는 말 한마디로 나를 사당으로 보내 무릎 꿇리고 경전을 베끼게 해도 나는 밤새도록 경전을 베껴 썼습니다. 적형의 물건을 탐해 본 적도 없고, 집안의 가업 역시 하나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모든 것들은 내가 스스로 얻어 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즉위한 후에 당신을 태후로, 큰형님을 왕으로 책봉하고 영지도 많이 내렸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정말 죄송하지만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났습니다.”
진씨는 창백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주운환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지더니 그는 성지를 내렸다.
“짐은 태상황의 이혼을 허락한다! 진씨는 태황태후를 모해하였고 흔설공주 주묘서는 악행을 도왔으니 진씨의 태후 작위와 흔설공주 주묘서의 공주 작위를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하며, 주씨 집안 족보에서 제하도록 한다! 오늘 당장 국경으로 귀양을 보낸다!”
진씨와 주묘서는 그 말을 듣자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왕왕 울렸다.
“나를 폐위한다고? 나는 태후다! 태후……!”
“그럴 수 없어! 나는 공주야!”
주묘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공주야, 대량의 공주라고.”
주운환이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자격? 황제로서 명하는 것이다!”
엽연채는 진씨 모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으로는 폐위되는 것보다 국경으로 귀양을 가는 것을 무서워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 모녀는 폐위되는 것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주비양이 잔뜩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서 주운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셋째… 아니, 폐하, 제발 저들을 귀양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강심설도 이를 사리물고 함께 무릎을 꿇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저 모녀가 아예 죽어 버렸으면 했다! 하지만 주비양에게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일이니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니 자신도 남편인 그의 편에 설 수밖에는.
“비양… 뭐 하는 짓이냐!”
진씨가 소리치며 달려들어 주비양을 잡아끌었다.
“네가 저놈한테 무릎을 꿇어? 일어나라! 일어나! 너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귀한 적장자다! 어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냐! 엉엉, 세상에, 이게 다 무슨 난리라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