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10
“어떻소?”
차가운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경들 중 원하는 사람이 있소?”
대신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직 우스워서 죽을 것 같던 진지항만이 대담하게 주운환에게 맞장구를 쳤다.
“없습니다.”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보아하니 짐과 태황태후 마마의 결정이 옳은 것 같소. 흔설공주는 이곳을 떠나 몇 년 요양을 한 후에 다시 혼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소. 다만 태후 마마와 공주가 짐의 마음을 몰라주니…….”
대신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너나 할 것 없이 황제의 편에 섰다.
“현명하십니다, 폐하!”
“맞습니다! 태후 마마가 목을 매어 폐하를 협박하신 건 정말 자애롭지 못한 일입니다.”
“왕 어사를 비롯한 어사들은 바람 소리만 듣고 비가 온다고 생각했으니,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이 틈에 왕성촌을 걸고넘어지는 대신도 있었다.
주운환의 눈길이 다시 왕 어사에게 향했다.
“짐이 보니 왕 어사는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들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소. 특히 누가 중매를 서고 누가 혼인을 하는 그런 일들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꼭 틀어쥐고 있군. 하니 짐이 왕 어사에게 관심사에 딱 걸맞은 중매부의 소사를 맡기도록 하겠소!”
조정 대신들은 모두 웃음을 참느라 끅끅댔다. 특히 왕성촌의 관심사에 딱 걸맞다는 말을 듣자 돼지 울음소리 같은 걸걸한 웃음이 속에서부터 솟구쳤다.
다 늙은 남자가 부인들 사이를 오가며 중매를 선다니! 왕성촌은 수치스러워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었다. 이보다 더 큰 치욕은 없었다!
게다가 중매관 소사는 구품의 말직이었다! 멀쩡한 일품 어사가 순식간에 구품 말직으로 떨어지다니!
일생의 노력, 십 년의 형설지공, 별의별 수단을 동원해서 시골의 가난한 수재가 일품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하루아침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날의 조회는 이렇듯 왕성촌의 강등으로 끝났다.
대신들이 궁을 나서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황제가 태후와 공주를 도성 밖으로 쫓아내려 하자 태후가 목을 맸고, 그 때문에 간언을 올렸던 어사는 오히려 찍소리도 못 하고 강등이 되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도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아침나절에 죽어라 헛소문을 지어내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공연장이나 찻집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요 며칠 나도는 소문들은 하나도 믿지 않았어.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야! 옆에서 듣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진상이 밝혀졌네. 참, 헛소문을 지어내던 사람들은 어딜 갔는지…….”
“폐하가 그런 분이 아니시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그 공주는 역적에게 시집갔었으면서 애까지 떼느라 몸이 망가진 여자잖아. 황제가 그런 안 좋은 소리가 줄어들 때까지 몇 년 궁에서 피해 있다 돌아오면 혼사를 주선해 주려 했는데, 자기가 푸대접이라도 당하는 줄 알고 목을 매지를 않나 죽겠다고 하지를 않나!”
“그 모녀는, 아니지, 적통 집안이 원래 제대로 된 사람들이 아니었잖아.”
“그래, 예전에는 황제를 몹시 푸대접했지. 황후가 당시 진씨 집안과의 혼담을 꺼내셨더니 싫다고 퇴짜를 놓았던 일만 해도 그래. 황후가 하는 수 없이 자기 고모에게 진지항을 소개해 주셨더니, 또 쫓아가서 좋은 사람을 왜 자기부터 소개해 주지 않았느냐 난리를 피웠잖아.”
“어디 그뿐인가. 태후도 별장으로 가서 황제가 장원 급제를 해서 자기 모녀를 쫓아냈다고 하고 허튼소리나 해 대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자들 하는 짓이 그렇다니까! 이번에는 목을 맸잖아! 무슨 일이 생기든 적반하장으로 적모, 적매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황제가 출세하고 자기들을 못살게 군다면서 불쌍한 척을 하고 있어. 사실 농간을 부리는 건 자기들이면서,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지.”
“오늘 아침에도 헛소문이 돌았잖아. 허 참, 저렇게 얼굴이 두껍고 염치없는 사람은 처음 봐! 자기가 먼저 폐태자를 유혹해서 서씨 집안 식구들을 다 죽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 애초에 황제가 혼인을 말리는 것을 자기가 우겨서 한 거잖아!”
“그리고 시집을 가든지 말든지, 폐태자가 황위를 빼앗으려던 것과 무슨 상관이야? 그 여자가 시집가지 않았대도 정선제는 중병이 났다가 나았을 거고, 그럼 폐태자는 그걸 견디지 못하고 황위를 찬탈하려 했겠지. 그게 그 여자가 시집을 간 것과 무슨 상관이야. 지금 새 황제 폐하는 그때 이미 제후인 데다 경위영 통령이셨는데 말이지! 갖다 붙이면 다 자기 공인가?”
“그래, 그리고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 이제 태후가 되고 공주가 되었는데, 아니, 무슨 차별을 한다는 거야? 궁을 떠나서 요양하라고 했더니 목을 매고, 정말이지 좋은 마음을 저렇게 악독하게 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담!”
“그리고 그 왕 어사도 정말 우습지 않아? 맛이 간 견공도 아니고, 뭐만 보이면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니 말이야. 그러다 황제가 그렇게 흔설공주가 좋으면 왕씨 가문 장자와 혼인시키겠다고 하니 싫다고 했다며? 자기도 그런 물건을 집에 들이기 싫으면서 입만 열면 헛소리나 하고 말이야. 구품 말단으로 떨어져도 할 말 없지, 뭐!”
“황제가 그 자리에서 그 여자들한테 정주에 가기 싫다면 가지 않아도 된다 했다잖아! 그리고 또 흔설공주의 배필을 구했는데 대신들이 죄다 고개를 숙이고 황제와 눈도 맞추지 못했다던데!”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장대소하며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꿈도 야무지지 말이야. 도성에 남아 있으면 혼인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나? 누가 그런 여자를 원한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황제도 다 공주 생각을 해서 그런 거잖아! 남아 있으면 뭐 바로 혼인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나 봐? 영유공주가 정혼을 맺고 시집을 가는 동안 흔설공주는 혼담도 들어오지 않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체면을 생각해 준 건데 도리어 저렇게 공격을 하다니!”
궁 밖에서는 다들 아주 신이 나서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 댔다.
같은 시각 궁 안.
진씨와 주묘서는 굳은 얼굴로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고 정 마마가 그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은 진씨가 목을 매면 주운환에게 불효라는 큰 죄를 씌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어사들이 꼬투리를 잡아 주운환을 탄핵하고, 주운환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계산엔 중요한 한 가지가 간과돼 있었다. 주운환이 독한 수를 서슴없이 쓰는 사람이란 점이!
주운환은 그 자리에서 주묘서의 배필을 찾겠다고 나섰고, 대신들 중 단 한 명도 주묘서를 며느리로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없었다.
진씨 모녀는 주운환이 구정물을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자신들을 도성에 남겨 두고 주묘서의 혼사를 알아봐 주리라 예상했다. 만약 좋은 배필을 찾아주지 않으면 주운환이 일부러 차별하는 것이니, 그는 적모에게 불효하고 적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할 참이었다.
이렇게 진씨가 효도를 내세워 주운환을 짓누르면 주운환은 하는 수 없이 그녀가 만족할 만한 배필을 고를 줄로만, 그렇게 혼인을 성사시킬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예 그 자리에서 배필을 찾고, 그것도 우선 사람을 정해 두고 운을 뗀 게 아니라 조정 대신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아무도 주묘서를 원하지 않았다……!
진씨 모녀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자신들은 억울한 피해자들인데, 고작 그 짧은 시간에 어떤 동정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뺨까지 덤으로 얻어맞은 격이었다!
“아악… 죽어 버릴래요! 죽어 버릴 테야… 엉엉……!”
주묘서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체면을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대성통곡했다.
그녀는 살면서 자신에게 극도로 망신스러운 일이 단 두 번뿐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전 태자비가 시녀들을 시켜 자신을 태자부 밖으로 쫓아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측비가 된 자신이 화연花宴에서 엽연채에게 망신을 주려다 도리어 태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였다!
그게 그녀 인생에서 가장 큰 치욕이자 제일 큰 망신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이 일은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었으니… 땅에 떨어졌다고 추락이 끝나는 게 아니란 사실을 몸소 체험한 셈이었다!
“아아아악……!”
주묘서는 괴성을 지르며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다. 한데 진씨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뿐, 말리지를 않았다!
주묘서는 탁자에 머리를 재차 박으며 더욱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지만,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그녀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악!!”
난처해진 주묘서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달려가 정 마마를 밀치고 때리기 시작했다.
“모두 네년 때문이다……! 이런 거지 같은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면 난 벌써 정주에 갔을 거야! 엉엉… 모두 다 네년 때문이야! 이 망할 년……!”
정 마마는 흠씬 맞으면서 새된 비명을 질렀고 어느새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빌 수조차 없었다. 이 계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녀 혼자 생각한 것이었다.
“시끄럽다!”
이때, 위엄 있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묘서는 놀라 손을 멈췄다.
진씨 모녀가 고개를 드니 매씨가 밖에 서 있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직도 망신을 덜 당했느냐?”
매씨는 진씨를 매섭게 노려보며 호통쳤다.
“진씨! 애가가 묻지 않느냐! 귀가 먹었느냐?”
진씨는 부르르 떨더니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들어 매씨를 쳐다봤다.
매씨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돌아가는 꼴을 너도 잘 봤겠지! 네 것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말아라! 능력도 없으면서 네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란 소리다. 나와 함께 정주로 가서 몇 년 지내거라. 서로 제 분수를 알고 도란도란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
진씨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주묘서는 속이 상하고 분이 풀리지 않아 두 눈이 새빨개졌다.
매씨는 냉랭해진 눈빛으로 두 모녀를 훑으며 조용히 말했다.
“종일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니 너희가 할 일이 없는 게로구나. 정주로 가기 전 매일 조석으로 내 궁으로 와 문안 인사를 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 생활과 식사도 돌보도록 해라.”
말을 마친 매씨는 냉큼 돌아서 떠났다.
진씨와 주묘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환관 몇을 데리고 쿵쾅거리며 들어오는 주 백야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요? 계속 이러면 쫓아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