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9
왕성촌은 분개를 금치 못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좋습니다. 소신이 오늘 어사의 본분을 다하여 소상히 폐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적모에게 불경하셨고, 태황태후 마마의 병환을 이유로 태후 마마와 흔설공주 마마를 도성에서 쫓아내려 하셨습니다! 심지어 태후 마마께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도록 몰아세우셨습니다.”
분노한 진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 어사. 도성을 떠나겠다 하신 분은 태황태후 마마입니다. 태황태후 마마는 태후 마마가 병구완을 해 주길 바라셨을 뿐인데, 그렇다면 불효한 분은 태후 마마가 아니십니까!
도성을 떠나 시어머니의 시중을 들기 싫어서 죽음으로 협박한 것인데, 그 책임을 황제 폐하께 돌리다니요? 당신네 어사들은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어찌 불효한 태후 마마를 먼저 탄핵하지 않습니까?”
왕성촌은 지지 않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태후 마마는 가지 않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왜 굳이 흔설공주 마마도 함께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영유공주 마마는 어째서 가지 않습니까?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왕 전하만 가고 두왕 전하는 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폐하는 두왕 전하와 영유공주 마마가 혼인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흔설공주 마마는 혼인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말뜻을 명백하게 알아들었다. 황제가 의도적으로 적통 가족을 배척하고 적모에게 불경하게 굴었기 때문에 적모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렸단 얘기였다!
“폐하, 어째서 적형과 적모, 적매를 배척하시는 겁니까? 제왕은 너그럽게 포용할 줄 아셔야 합니다!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 되신단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흔설공주 마마가 대제의 폐태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자를 미혹하지 않았더라면 대의가 어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성촌의 말에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그런데 주운환은 오히려 ‘푸훕’ 소리 내어 웃었다.
“왕 어사는 개요? 왜 늘 짐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며 물어뜯는 거요?”
왕성촌은 흠칫 굳어 버렸으나 아래 있던 대신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왕성촌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뜻이십니까, 폐하? 소신은 언관입니다. 간언을 올리는 것은 소신의 본분입니다! 폐하께서 그것이 전 황조에서 설치한 직위라고 생각하신다면 폐하 마음 가는 대로 충언을 무시하시고 어사대를 없애셔도 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조정의 인사를 변동할 때 이 자리를 남겨 두신 것은 언관의 직책을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니옵니까. 언관의 직책을 남겨 충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평가는 온 천하에 알리고 싶어 하시면서,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무시하실 수는 없습니다.”
눈빛이 달라진 주운환이 차갑게 말했다.
“짐은 언관의 간언을 안 듣겠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오. 짐이 장원 급제했을 때부터 왕 어사는 죽 짐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소!”
대신들은 모두 그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왕성촌을 보았다.
왕성촌 역시 이지러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늘 주운환만을 탄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주운환이 말단 육품 수편일 때부터 이품 서정장군, 그리고 진서후가 될 때까지 계속 그를 탄핵했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에도!
돌이켜 보니 정말 미친개처럼 주운환만 쫓아다니며 물고 늘어지는 꼴이었다! 자리에 있던 대신들 역시 왕성촌이 정말 이름 그대로, 왈왈 짖으며 사람을 쫓아 마을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것 같다 생각했다!
주운환은 미소 띤 입술로 말을 보탰다.
“처음에는 황후 친정의 일 때문에 짐이 은정랑이라는 ‘장모’에게 불효하고 불경했다고 했소. 다음에는 짐이 주묘서의 혼담을 주선하지 않아 적모가 도성을 떠나게 했다며 불효하고 불경하다고 했지. 세 번째는 짐이 비적들과 내통하고는 멸구滅口하였다고 했소. 그러더니 이번엔 또 짐이 적모에게 불효하고 불경한 짓을 했다고 하는군.”
주운환은 이야기를 하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왕성촌과 그 뒤에 선 어사들을 바라보았다. 왕성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소… 소신은 그저 어사의 본분을 다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네가 탄핵한 일들 중 어느 것 하나 사실이었소? 몇 번이나 탄핵을 했는데 결국은 모두 적반하장 아니었소. 아직도 부족하오?”
왕성촌은 낯빛이 변해 부들부들 떨었다. 진무와 주 선생은 물론이고 많은 대신들이 조롱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주운환이 탁자의 벼루를 들어 힘껏 집어 던지자, 벼루가 왕성촌 발아래에 떨어지며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짐은 그대들에게 탄핵을 하고 간언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소. 그런데 어사들은 짐의 기대를 저버리고 온종일 보잘것없고 사소한 일에 그 권력을 남용하고 있지!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소란부터 피워 대는 것이 어사의 본분이란 말이오?”
왕성촌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그의 뒤에 있던 어사들은 놀라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태황태후 마마께서 며느리에게 병간호를 맡기는 것은 변치 않는 만고의 이치요. 또 흔설공주는 이미 한번 시집을 다녀온 데다 건강도 좋지 않소. 태황태후 마마께서 공주를 많이 아껴 정주에 몇 년 데리고 있으며 몸과 마음을 요양케 하려 하셨으니, 이는 모두 공주를 생각해서 내리신 결정이오. 짐도 그 마음을 이해하여 그리하시게 하였소.
그런데 태후 마마가 태황태후 마마와 짐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흔설공주가 도성을 떠나는 것을 굉장히 반대하는 것 같소. 그렇다면 흔설공주를 도성에 남겨 혼사를 추진하겠소!”
주운환의 차디찬 눈빛이 왕성촌에게 멈췄다.
“왕 어사가 흔설공주 혼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짐이 예전에 진지항 부부를 위해 혼담을 주선한 적이 있는데, 그때 왕 어사가 이리 좋은 혼사가 있는데 흔설공주부터 챙기지 않는다고 시끄럽게 했었지. 오늘도 왕 어사는 또다시 같은 일로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있고. 왕 어사가 그토록 흔설공주를 좋아하니 왕 어사의 장자와 흔설공주를 혼인시키도록 합시다.”
“네?”
왕성촌이 놀라서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안 됩니다, 폐하. 소신의… 소신의 아들은…….”
“일전에 짐이 이미 매관을 시켜 알아봤소. 왕 공자는 용모도 준수하고 학식도 깊은데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더군.”
주운환은 말허리를 자르곤 씩 웃어 보였다.
벌써 조사까지 마쳤다니! 왕성촌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안면 근육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주묘서는 역적에게 시집을 갔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망가져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단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 어떻게 왕씨 가문 적장자의 부인이 될 수 있겠나!
“폐하… 소신의 아들은 실로 금지옥엽 흔설공주 마마의 배필이 되기에는 많이 모자랍니다…….”
왕성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완곡히 사양했으나 주운환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소리요. 흔설공주는 재가를 드는 입장인데. 왕 공자는 자격이 충분하니 걱정 마시오.”
진무와 주 선생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폐하, 소신의 아들이 아직 정혼은 하지 않았으나… 안사람이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 그 집안과 오월이 지나면 곧 정혼하기로 이야기를 해 두었습니다.”
왕성촌이 황급히 둘러대자 주운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 그렇소? 그렇다면 어느 집의 규수인지 말해 보시오, 왕 어사.”
왕성촌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주운환이 저렇게 꽉 물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니 만약 어느 가문의 소저라고 말한다면, 그 즉시 주운환이 사람을 보내 물어볼 것 같았다. 그리하든 안 하든, 황제 앞에서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그길로 무를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그리되면 집안엔 망조가 드는 것이다. 이 일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알려질 테고, 지목된 가문은 황제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혼담을 부인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주군을 속인 자가 되는 것이다.
주군을 기만한 죄! 왕성촌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주운환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왜? 흔설공주가 그렇게 마음에 차지 않소?”
왕성촌이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소신은…….”
주운환이 소리를 높였다.
“싫지 않다면 왕 공자의 부인으로 흔설공주를 맞으시오. 싫다면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말이지!”
왕성촌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수치감이 몰려왔다. 결국 그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주운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윤허하시면 소신이…….”
“그만! 다 죽어 가는 얼굴을 보고도 짐이 그대에게 강요하겠소? 원하지 않는다면 대답할 필요 없소. 다만 왕 어사,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자기도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시오!”
곧이어 주운환의 시선이 아래쪽의 대신들에게 향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여기서 흔설공주의 배필을 찾아보겠소. 경들 중 흔설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거나 공주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 있다면 말하시오. 짐이 바로 흔설공주의 혼례를 성대하게 치러 주겠소.”
주묘서를 집안에 들이라는 말을 듣자 대신들은 놀라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주묘서를 집안에 들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흔설공주가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집안에 그녀를 들이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묘서는 역적에게 시집을 갔다가 낙태를 하느라 몸이 망가졌으니 어느 집에서 그런 여자를 들이고 싶겠나? 게다가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여자를!
더 중요한 건 그녀가 공주라는 것이다! 집안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서자 등은 절대로 그런 신분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었다. 적장자여야만 그녀와 혼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그녀가 첩실을 투기해서 첩실도 아기를 낳지 못하게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대가 끊기는 셈이었다!
그리고 태후까지 도성을 떠나지 않겠다며 목을 매달고 소란을 피우지 않았던가! 정말이지…….
‘온 집안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존재다! …아니다, 분명 온 집안에 해를 끼칠 삿된 물건이다!’
그 모녀 때문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목을 매어 죽은 서씨 집안과 태자를 생각해 보면… 저런 돼먹지 못한 기질은 평생 버리지 못할 터였다!
대신들은 모두들 머리를 가슴 쪽으로 파묻었다. 절대로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황제에게 지목될까 봐 모두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