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7
울고 있는 진씨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어머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우리 정말 정주로 가야 해요?”
주묘서가 흐느끼며 입을 뗐다.
“전 정주에 가기 싫어요! 내가 왜 그런 시골에 가야 해요? 저도 도성에 남을래요! 난 공주예요! 난 고귀한 적공주라고요!”
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공주의 신분으로 뭔들 얻지 못할까?
그렇지만,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역적에게 시집을 가 신세를 망친 사람’이라는!
이렇게 고귀한 사람인데 하필……. 이 세상은 왜 자신에게만 이렇게 잔인한 걸까! 더구나 공주의 맛을 보기도 전에 도성을 떠나야 하다니!
“어머니, 전 정주에 가기 싫어요!”
주묘서가 소리쳤다.
“엽연채랑 할머니 두 사람이 편먹고 우리를 쫓아내려는 게 분명해요. 도성이 아닌 곳에 사는 공주를 공주라고 할 수 있겠어요?”
진씨가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맞다! 명만 쓸데없이 긴 저 노인네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저 천한 것들과 한통속이 되어 마음씨 좋은 사람인 척 태후니 공주니 책봉해 놓고는 그 자리에 며칠도 있지 못하게 도성 밖으로 쫓아내려는 거다. 이번에 떠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방금 노인네가 가시 돋친 말투로 저 천한 것이 가문을 도왔으면 도왔지 집안에 빚진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한 걸음 한 걸음 자신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연극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종과랑 그 계집애는 왜 안 가는지 물어봤어요?”
진씨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은 도성에 남아 혼사를 준비한단다!”
“나는요?”
주묘서가 빽 고성을 내질렀다.
“나도 혼인을 준비해야죠! 왜 나는 도성에 남아 혼사를 준비하지 않아요? 나는 어떻게 시집을 가란 말이에요? 설마 정주 같은 시골에서 시집을 가란 말이에요? 어쩜 그렇게 차별을!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차별할 수가 있어요! 모두들 우리만 못살게 공격하고 있어요. 엉엉… 으어엉……!”
주묘서는 탁자에 엎어져 통곡했다.
진씨도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더 이상 주묘서와 둘만 고통스럽게 지낼 수 없었다.
“마님…….”
조용히 곁에 있던 정 마마가 눈물을 흘렸다. 주씨 집안에서 제일 고귀한 본부인과 적장녀가 이렇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보니 너무나 분했다.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열흘 후면 출발해야 합니다! 그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정주로는 갈 수 없어요! 가면 돌아올 수 없어요!”
정 마마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매씨는 이미 나이가 여든이 넘었으니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운환의 사람이 그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 그녀가 죽어도 자신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도성 출입조차 막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낙향해 반쯤 감금될지도 모르는데, 주비양은 저 천한 주운환에게 완전히 세뇌되어 친모와 친누이도 몰라보고 첩이 낳은 천한 동생을 돕고 있으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이 역경을 헤쳐 나갈밖에는.
“그걸 누가 몰라,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
주묘서가 울면서 대꾸하니 정 마마가 눈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뭐라고 하셨지요? 둘째 도련님과 둘째 아가씨가 도성에 남아 혼사를 준비한다고 하셨죠? 그게 정말인가요?”
진씨가 이를 윽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가 수안궁으로 쳐들어갈 때 정 마마는 남아서 주묘서를 보살피느라 따라가지 않아 진씨와 매씨가 이야기한 내용을 듣지 못했다.
정 마마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일이 쉽겠습니다!”
“방법이 있느냐?”
진씨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정 마마는 진씨와 주묘서 귓가에 대고 자신의 계략을 말했다.
* * *
태황태후와 태상황이 도성을 떠나기 열흘 전. 도성에서는 그들의 출궁 준비가 한창이었다.
비 이낭과 주종과는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요양은 무슨. 적통 가족을 내쫓으려는 거야, 쯧쯧! 그치들은 당해도 싸지! 한데 셋째 그 천한 놈이 우리를 빼 준 것도 별일이구나 싶다.”
비 이낭이 히죽대며 이리 말하니 주종과도 코웃음을 치며 동조했다.
“황제니까요! 황제 노릇 하려면 체면도 챙겨야지요. 적통 식구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목을 받고 있어요. 할머니께서 직접 말씀하신 게 아니었다면 조정 대신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죠. 그런데 저와 둘째 누이까지 쫓아 보낸다면 평판이 어떻게 되겠어요!”
“쯔쯧. 아무튼 적통 식구들이야 그래도 싸지. 자,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고, 둘째야, 어서 이 화첩을 좀 봐라. 어느 소저가 마음에 드니?”
주종과가 왕에 봉해진 후로 비 이낭은 자신이 집안의 안주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혼사도 직접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매파 고씨를 불렀다.
불려온 매파 고씨는 그저 웃었다. 황제가 이미 친히 혼사를 정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자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사람으로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비 이낭은 꿋꿋이 화첩을 원했다. 고씨도 저들이 하는 양을 보니 금방 고르지도 않을 것 같아 고관대작들의 적녀들이 그려진 화첩을 넘겨주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주종과와 비 이낭은 정말 천천히 골랐다. 이 여자는 얼굴이 둥글어서 안 되고, 저 여자는 얼굴이 각이 져서 안 되고, 또 저 사람은 키가 작아서 안 된다며 흠을 잡았다. 외면받던 처지에서 높은 신분으로 벼락출세한 그들은 도성의 모든 귀족 규수가 목을 길쭉이 뺀 채 자신들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 덕분에 도성의 이름난 귀족 규수들은 누구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때 아닌 한기를 느껴야만 했다.
* * *
금방 오월 말이 되었다.
태황태후와 태상황, 태후, 흔설공주와 안왕 내외가 도성을 떠나는 유월 초하루를 딱 하루 남기고, 오월 그믐날 낮에 주운환은 궁에서 이들을 배웅하는 연회를 열었다.
가족끼리의 연회이니 주씨 가문을 제외하고도 진씨의 친정 식구들이 민주에서 건너와 연회에 참석했고, 강심설의 친정에서도 손님이 왔다. 그 밖에도 주운환은 진씨 가문, 온씨와 엽씨 가문, 그리고 대신 몇몇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초대했다.
모두들 수안궁에 도착해 연회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정 마마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울면서 아뢰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입니다! 태후 마마가 목을 매셨습니다! 엉엉엉, 태후 마마가… 목을 매셨어요! 목숨을 끊으려 하셨어요!”
정 마마가 크게 소리치며 사람들 사이에 털썩 쓰러지자 손님들은 혼비백산 흩어졌다. 그 소란 속에 정 마마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주운환과 매씨를 향해 머리를 찧어 댔다.
“폐하, 태황태후 마마… 태후 마마가 스스로 목숨을… 목을 매달아서 자진을……!”
“뭐라고?”
기함한 주 백야의 마음에 분노와 걱정이 교차했다. 잘 있다가 이제 와 왜 또 무슨 일을 벌인 거지? 한데 정 마마가 아주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태후 마마가 목을 매?”
진씨 집안 식구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특히 진씨의 오라비와 새언니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진씨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남은 친정 가족이라고는 오라비 진 노야와 그 부인뿐이었다. 하지만 주씨 가문이 몰락한 후 진씨는 친정과 그다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이후 주씨 가문이 다시 출세하자 진씨 집안에서 먼저 빌붙으려 했지만 진씨는 여전히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씨가 태후가 되자 그 친정 식구들은 어떻게든 줄을 대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그게 성공하기도 전에 태후는 물론이고 주비양 내외까지 도성을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들은 하나같이 침울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 진씨가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 그들은 소란을 피워 댔다.
한편, 매씨는 다른 연유에서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했거늘! 또 이런 일을 벌이다니!
“폐하… 멀쩡하던 태후 마마가 갑자기 어찌 목을 맸다는 말입니까!”
진씨 집안 사람들이 주운환과 매씨를 바라봤다.
주운환의 눈에 조롱이 스쳤다.
‘정말이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고를 치는군.’
“가서 살펴보시지요.”
주운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진씨가 거처하는 궁으로 향했다.
주비양의 잘생긴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고, 강심설은 그를 흘깃 보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곧 진씨가 머무는 궁에 사람들이 도착했다.
문을 열자 바닥에 주저앉은 주묘서가 진씨를 감싸 안아 제 다리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산발한 진씨의 이마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목에는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모녀는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나를 왜 살려 냈느냐……!”
진씨가 울부짖었다.
우아한 흰색 옷을 입은 주묘서의 머리에도 상처가 나 있었고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 모녀가 모진 짓이라도 당했거니 여길 법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주 백야가 제일 먼저 뛰어왔다.
“누이, 묘서야, 이게 무슨 일이냐?
진 노야도 황급히 달려왔다.
진씨가 벌떡 일어나 주운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사정했다.
“셋째야, 내가 죽겠다. 응? 내가 그냥 죽으마, 막지 말거라……!”
진씨는 말을 마치자마자 옆에 있는 탁자에 머리를 들이받으려고 했고, 주묘서가 급히 진씨를 막으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머니,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세요!”
“마마! 마마……!”
정 마마, 녹지와 춘산을 비롯한 측근들은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었다.
온 대전 안이 비참한 울음소리로 가득 찼음에도 주운환, 엽연채와 매씨는 차가운 눈길로 소란스러운 광경을 지켜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특히 엽연채는 해바라기씨라도 까먹으면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조용히 하시오!”
주 백야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응?”
진씨가 가슴을 부여잡고 울먹였다.
“죽어 버릴래요! 죽게 놔두세요!”
“조용히 하시오! 울긴 왜 운단 말이오!”
주 백야는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도성에서 태상황의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떠나야 해서 속이 시끄러웠는데, 진씨까지 죽네 사네 소란을 피워 대니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더 울면 쫓아내 버리겠소!”
진씨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울음을 뚝 그치고 주 백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를 내쫓아요! 쫓아내 줘요! 운 이낭에게 내가 자리를 내줄게요. 내가 물러날게요!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