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4
진씨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매씨의 얼음장 같은 눈길이 진씨에게 멈췄다.
매씨 앞에서는 늘 작아지는 자신이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진씨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죽어도 그럴 수 없다!
이때, 매씨가 한발 먼저 담담하게 입을 뗐다.
“그럴 필요 없다.”
“네?”
주 백야와 진씨,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믿어지지 않는 듯이 매씨를 쳐다봤다.
“왜요?”
“셋째를 지켜봐라. 곧 알게 될 것이야, 흥.”
매씨는 의미심장하게 진씨를 쳐다보고는 돌아서 나가 버렸다.
진씨는 매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미 연달아 일어난 일들만 해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편, 매씨가 공주를 정실부인으로 올릴 필요가 없다 하니 주 백야는 오히려 속이 근질근질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인데… 그녀를 섭섭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셋째가 곧 황위에 오를 텐데 평판도 신경 써야 했다.
주 백야는 결국 사람을 풀어 바깥에 소문을 퍼뜨렸다.
“운하공주는 기루에서 데려온 게 아니래! 기루에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는데? 옛날에 주 백야가 동주를 지나면서 중상을 당한 처자를 발견해 구해 준 거래!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주 백야는 우선 급한 마음에 그네를 구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워져서 여인이 주 백야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 거지.
그러다 갑자기 적들이 추격해 와서 주 백야는 어쩔 수 없이 여자를 어느 집에 맡겨 두었는데 그 맞은편에 마침 기루가 있었다는 거야. 나중에 주 백야가 그 처자를 데리고 돌아오니 기루에서 데려왔다는 소문이 났는데, 실은 그게 아니란 거지.”
주 백야는 계속해서 소문을 꾸며 댔다.
진씨는 이 이야기를 듣고 온몸에 힘이 빠져 침상에 누워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공주면 또 어쨌다는 말입니까? 그래 봐야 천한 첩인걸요! 공주가 천한 첩이 되다니, 하하, 평범한 사람보다도 더 비천한 거예요.”
녹지가 속상해하는 진씨를 위로하려고 옆에서 욕을 늘어놨다. 주묘서는 원탁에 앉아 조심스레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이든 알 게 뭐야. 아무튼 황제가 되고 나면 적모인 어머니가 태후예요! 나는 장공주고요!”
“그래, 애가哀家(태후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가 태후다!”
진씨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진씨의 눈에 차디찬 비웃음이 스쳤다.
“황제가 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가 효를 내세우면 그 아이가 기를 펼 수나 있겠냐는 말이야. 감히 나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공주의 아들? 하핫, 운하, 운하야, 낳느라고 고생했구나. 주운환이 황제가 되고, 네가 있어야 할 태후 자리는 나에게 넘겨주게 되었구나. 네 아들은 계속해서 내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씨는 자신이 이긴 것 같았다.
“맞아요. 마님… 아니, 태후 마마의 말씀이 맞아요. 운하공주면 어떻고 신분이 더 높으면 뭘 해요. 마마 발밑에 무릎을 꿇고 첩이 된 걸요. 진짜 정실로 높여 준다고 해도 마마보다 한 단계 아래예요.
또, 잘난 아들을 낳으면 뭘 하나요. 그 아들 덕에 태후 자리를 얻어 내 봤자 그건 마마의 자리인데요. 그 여자는 그저 마님의 디딤돌일 뿐이에요.”
정 마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알랑방귀를 뀌었고 진씨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디딤돌? 하하! 마음에 쏙 드는 말이구나.”
* * *
사람들은 이렇듯 저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시간은 그들과 상관없이 하루하루 흘렀다. 드디어 오월 스무날, 주운환의 즉위식이었다.
도성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귀족들이 모두 참석했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대전으로 들어와 손님들 앞에서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은 제후의 자리에 앉아 책봉을 시작했다.
환관이 성지를 들고 옆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의 명을 전한다. 짐의 생모, 대제의 운하 적장공주 모사는 근면하고 유순하며 성품이 평온하고 순량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짐이 몹시 애석하다. 이에 태후로 추서하고 효선 황태후의 시호를 추증하여 그녀를 기리도록 한다. 예식을 치르고 각부에서는 이를 상세히 살피도록 한다. 이상.”
한쪽에 앉아 있던 진씨가 두 눈을 반짝였다. 주운환이 그 천한 계집을 추서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관심 없는 일이었다!
“주씨 가문은 성지를 받으시오.”
환관이 다른 성지를 꺼내 들었다.
주 백야가 눈을 빛내며 매씨, 진씨, 주비양, 강심설, 주종과, 주묘서, 주묘화와 함께 앞으로 나갔다.
환관은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 드디어 중요한 부분에 들어섰다.
“조모 매씨를 태황태후에 봉한다! 생부 주정을 태상황에 봉한다! 적모 진씨를 태후로 봉한다.”
듣고 있는 진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태후! 이제 그녀는 태후다!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보니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녀는 어쨌든 태후 아니던가? 효를 내세워 언젠가 그 황위도 토해 놓게 할 것이다.
환관이 성지를 계속 읽어 나갔다.
“적형 주비양을 안왕, 그 처 강씨를 안왕비에 봉한다. 서형 주종과를 두왕에 봉한다.”
자신이 진짜 왕이 되니 주종과는 흥분해서 펄쩍펄쩍 뛸 뻔했다. 주운환이 황제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자신은 이제 왕이었다! 왕! 전에는 적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지만 인제는 어느 명문가의 금지옥엽이든, 자신이 고르는 입장이 된 것이다!
곁에 있던 비 이낭도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날은 비 이낭과 백 이낭도 따라왔다. 그들은 본디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지만,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 주 백야가 굳이 데려온 거였다. 궁에서도 태상황이 될 사람이 데려왔으니 막지 않았다.
주종과가 한창 기쁨에 도취돼 있는 동안, 상석에 앉은 주운환은 붉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엽연채는 풉, 웃음이 새어 나와 손으로 주운환을 살짝 찔렀다. 두왕荳王? 콩 두? 진심인가? 앞으로의 일은… 생각만 해도 재미있었다!
“적매 주묘서를 흔설공주, 서매 주묘화를 영유공주에 봉한다.”
성지를 모두 읽은 후, 환관이 말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석의 엽연채와 주운환 옆에는 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주 백야는 잔뜩 신이 나서 진씨와 함께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은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고 자신이 태상황 자리에 앉을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어 다른 사람들의 책봉이 이어지고 관리들의 인사 이동이 있었다.
경위영 부통령 하배는 이제 경위영 통령으로 승진했다.
여한 형제는 각각 금위군 통령과 금린위 통령에 책봉되었다.
본래 그 자리를 책임지던 언서 형제는 경엽제를 묻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운환은 이들이 평생 경엽제를 따르고 지킬 수 있도록 황릉에 함께 순장했다.
문신 중에서도 노왕의 사람들이 정리되며 인사가 대거 개편되었다.
대리시경 장찬은 병부상서로 승진하자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운환에게 어찌나 감사한지 수차례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다.
그 광경을 봐야만 하는 맹씨와 장박원, 엽이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죽어도 오늘 이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 주운환이 즉위하고 엽연채가 황후가 되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니! 하지만 장찬이 크게 화를 내며 오지 않으면 집안에서 내쫓겠다 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이었다.
엽이채는 눈을 부릅뜨고 주운환 곁에 앉아 있는 엽연채를 보느라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눈물이 고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무릎 위에 올린 손수건을 있는 힘껏 틀어쥐었다.
‘저 사람이 황제… 그리고 엽연채가 황후가 되다니! 황후? 한 나라의 국모라고?’
주운환은 원래 자신의 정혼자였다. 자신이 주운환과 혼인했어야 한다! 하니, 황후의 자리도 역시 자신의 것이었다… 어떻게…….
엽이채는 억장이 무너지면서 장이 다 꼬이는 것 같았지만, 차마 그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어 온 힘을 다해 꼭꼭 삼켰다.
엽씨 가문도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높이 날아오르는 엽연채를 보는 엽학문은 속이 말이 아니었다.
엽연채가 주씨 가문에 시집을 가고 난 후, 엽학문은 하는 일마다 곤경에 처하면서 마음에 차지 않는 손녀를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 손녀는 날개를 달고 계속 날아올라 이제는 황후까지 되었다.
‘하나 어찌 됐든 엽씨 가문의 딸이다! 이제 나는 황후의 친조부가 되었고, 내 손녀사위가 바로 황제다.’
엽씨 가문은 이제 황후의 처가였다. 집안의 주인인 자신은 응당 승은공이 될 것이었다! 흥분한 엽학문은 간절한 눈빛으로 상석의 엽연채와 주운환을 보고 있었다.
주운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엽씨 가문은 황후를 키운 공이 있으니… 황후의 오라버니 엽균을 정일품 영안후로 봉한다. 황후의 모친 온씨는 초일품 고명부인에 봉한다.”
책봉이 발표되자 엽학문은 피를 쏟을 정도로 부아가 치밀었다!
보통 황후의 생부를 승은공으로 책봉하지만 엽승덕은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이니 엽학문은 당연히 자신이 책봉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를 건너뛰고 엽균을 책봉한 것이다.
피를 토할 것 같은 것은 맹씨도 마찬가지였다.
엽균이 처음에는 자신의 딸 장만만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당시 자신이 결사반대해 장만만을 장국후 세자의 후처로 보내 버렸다. 그런데 엽연채가 황후가 되었으니 엽균도 누이동생 덕에 권세를 얻게 될 것이었다.
모든 책봉이 끝나고 주운환은 연회를 시작하라고 명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매씨가 갑자기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주운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제, 요즘 내 몸이 편치 않아 의정이 일 년 내내 봄처럼 따뜻한 곳에 가서 요양을 하라 권유하더군요.”
엽연채가 매씨를 보며 물었다.
“할머님, 어디로 가시려고요?”
“쿨럭쿨럭……. 이 늙은 몸 때문에 너무 힘이 들, 쿨럭!”
진씨는 매씨의 요양하러 떠나겠단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들썩거렸다. 진씨는 태후 책봉을 받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그 위에 태황태후가 버티고 있으니 마음 한편이 석연치 않았다.
저 노인네가 복을 제 발로 차 버리고 떠나겠다니! 정말 잘됐지 않은가! 진씨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머님의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 요양부터 잘하셔야 합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매씨가 진씨를 흘깃 쳐다보며 되물었다.
“정주면 어떤 것 같으냐?”
“정주요? 좋은 곳이지요! 일 년 내내 봄처럼 따뜻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진씨는 잔뜩 흥분했다. 정주는 도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다. 늙고 쇠약해진 매씨의 상태로는 한 달은 족히 걸려야 도착할 것이다. 가고 나면 도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매씨가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좋다니 됐다. 고부끼리 함께 요양도 하고 경치도 구경하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