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3
양왕이 양왕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아도 여인이란 연적에게 몹시 예민할 수밖에 없다. 상관운은 그들을 내내 관찰하며 양왕이 진심으로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조앵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관운은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양왕은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남자였지만 안타깝게도 태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었다. 저런 사람과 혼인해서 같이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양왕은 자신이 원하는 남자가 아니니 조앵기에게 은혜를 베푼 셈 쳤다!
그럼에도 조앵기를 볼 때마다 양왕을 차지한 그녀가 미웠고, 한편으론 양왕에게 어울리는 여인은 고작 조앵기 수준의 여자뿐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려고 가서 싱긋대며 알은체한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결국 양왕은 성공했다! 그리고 조앵기는 죽었다!
끝내 자신이 제일 좋은 것을 얻어 낸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저처럼 고귀한 여인에게는 가장 고귀한 남자가 어울린다! 양왕이 마침내 이쪽이 원하는 신분이 되었으니, 더는 맺어지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훌륭한 낭군이었다!
“알겠나요? 당신은 자격이 없단 걸요!”
엽연채는 손을 들어 올려 저를 놓아주지 않는 상관운의 뺨을 힘껏 후려쳤고, 상관운은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입가에 피를 흘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문을 나서던 엽연채가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녹취암에서 잘 지내요!”
“안 돼, 아니야, 그럴 순……!”
상관운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기어 왔지만 ‘쾅’ 하고 문이 닫히는 게 먼저였다.
녹취암은 좋은 사원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곳으로 보내지는 비빈들은 모두 총애를 못 받거나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하니 녹취암의 비구니들은 그들에게 잘해 주지 않았다.
특히 자신처럼 자손을 낳지 못한 사람, 황제를 모해하려 했던 사람! 큰 죄를 지어 가족까지 벌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하니 자신은 절대로 편히 지낼 수 없었다! 분명 시궁창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상관운의 머릿속에 웅웅 벌레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곳 비구니들은 불심이 깊지 않아서 암자에 남자들을 들여 돈을 벌기도 한다고 했다. 언뜻 주워들었던 그 망측한 소문이, 아득해지는 뇌리 한편에 떠올랐다…….
* * *
엽연채와 상관운의 만남은 사월 열나흘 저녁의 일이었다. 궁에서는 아직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한편, 태항산에서 엽연채가 풀어 준 아이들 백 명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를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가족들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면서 주운환에게 거듭 고마워했다. 왕조가 바뀌고 나라의 주인이 변했지만 그곳이야말로 민심이 향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여러 원로 대신들과 모씨 황족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특히 모씨 가문 황족 중 항렬이 높은 두 왕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주운환은 그들을 좌시하지 않고 무력도 동원했다. 성지에 바로 승복한 사람들은 작위를 한 등급 내렸을 뿐 무사히 지내도록 하였다. 반면 불복하는 사람들은 모두 끌어가 목을 베었다.
태황태후는 작호를 빼앗고 정일품 태군으로 봉한 다음, 그녀의 작은아들의 모씨 왕부로 내보냈다. 그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궁에서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그대로 영면에 들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주요의 일로 인해 그녀에게 조금의 호감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황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니, 전 태황태후의 장례는 모씨 왕부에서 치렀는데 조문을 가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 무렵, 온 도성을 들끓게 하며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주운환의 신분이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주운환을 그저 주씨 가문 셋째 서자라고 알고 있었다. 하니 생모인 이낭의 신분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 그녀가 기루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다들 알고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주운환의 능력이 너무나 출중한 까닭이었다. 영웅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하지 않던가.
그래서 주운환이 적장공주인 운하의 아들이라고 경엽제가 인정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운하공주? 처음 듣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어?”
“없기는? 경엽제와 동복同腹인 친누이잖아. 소 황후가 낳은 적장녀 말이야. 그때 소 황후 집안이 누명을 쓰고 소 황후는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났지. 어려도 효성 깊었던 운하공주는 무릎을 꿇고 같이 내보내 달라 빌었었다군.
나중에 소씨 가문이 복권되었을 때는 소 황후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어. 정선제가 남매를 데려오는 와중에 정씨 사람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했었지. 경엽제는 그때 중상을 입고 궁으로 돌아왔지만 운하공주는 사라졌었고, 나중에 공주가 죽었다고 발표했었어!”
“죽은 거 아냐? 그럼……?”
“말할 필요도 없어. 찾을 수 없으니 죽었다고 발표한 게지. 하나 공주는 사실 살아 있었던 거야! 그러다 붙잡혀 기루에 팔려 버린 거고…….”
“세상에, 그 귀한 적장공주가 어떻게… 가엾기도 하지!”
“쉿, 조용히 해!”
“그러다가 주 백야에게 시집오면서 도성으로 돌아온 거지. 그런데 왜 황실로 돌아가지 않은 거지?”
“일찍 죽었다더라고!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대.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거지. 아무튼 진서왕… 아니, 황제 폐하는 문무를 겸비해 조금씩 명성을 쌓아 지금에 이르셨으니, 하늘에 있는 공주의 혼도 기뻐하고 계시겠지!”
“어쩐지 황제 폐하가 그렇게 대단하시더니, 적장공주의 아들이셨군!”
온 세상이 운하공주를 동정했고, 안타까워하거나 존경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지는 않았고, 그녀를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주씨 가문은 이미 시끌시끌했다. 주운환이 죽기는커녕 황위에 오르자, 진씨와 주묘서는 뒤로 넘어갈 듯 화가 났다. 진씨는 심지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욕까지 해 댔다.
“그 천한 것이 무슨 수로 황제가 된단 말이냐! 비천한 서자 주제에!”
정말 주씨 가문에서 황제가 난다 해도 그 자리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앉아야 했다. 주비양이야말로 적자이고 적통이거늘!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제일 속 터지는 일은 그게 아니라는 걸 진씨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야 운 이낭이 공주라는 것을 들었다!
놀라서 눈앞이 캄캄해진 진씨는 그대로 혼절했다.
깨어나자마자 진씨는 주묘서와 함께 쿵쾅대며 주 백야의 서재로 뛰어갔다. 그 길에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비 이낭 모자를 마주쳤다. 네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비 이낭이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나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 천한 것이 어떻게 공주라는 말입니까? 거짓말이지요?”
운 이낭은 기루 여자였다! 그녀가 어떻게 공주란 말인가! 더구나 생모가 공주라면 주운환은 같은 서자라도 같은 서자가 아니었다!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셈이니!
진씨와 비 이낭이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종과는 이를 하도 악물어 부서질 지경이었다. 자기보다도 못난 놈이 어떻게 갑자기 공주의 아들이 된단 말인가?
주 백야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소식을 듣고는 이미 한참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주운환이 황제가 된다. 주 백야는 꿈을 꾸는 듯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낙운이 공주라고? 운하공주? 설마? 한데 정말 그렇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공주를 집에 들였다는 말인가…….’
“지금 제가 묻고 있잖아요!”
진씨의 두 눈이 시뻘게졌다.
“내가 어찌 알았겠소! 늘 국경과 변방을 떠돌았는데 황실 여인들을 어찌 알아본다는 말이오? 그런 공주나 군주를 안다 해도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 아니오!”
“난 20년 전에 이 집에 들어왔어요. 집안의 여자들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인데 바깥사람을 알고 지낼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그때는 나도 궁에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으니 알아봐도 어머님이 알아봤어야지요.”
진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기루의 천박한 창부를 집에 들이는데 그 노인네가 반대는커녕 아무 말 없더라니… 설마, 진작부터 공주였던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노마님!”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씨와 비 이낭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매씨가 여종과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니. 셋째… 셋째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주 백야가 황급히 다가서며 소식을 전하니 매씨는 그를 흘겨보며 짧게 대꾸했다. 그걸 자기가 여태 모르겠냐는 투였다.
“경엽제가 양위를 했으니까.”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이 급한 주 백야는 펄쩍 뛸 판이었다.
“성지에… 셋째의 생모가 운하공주라고… 어머니, 전에 줄곧 도성에서 요양하시면서 궁에도 자주 들어가지 않으셨습니까, 혹시나 알아…….”
“그래. 알고 있었다.”
매씨는 그를 차갑게 돌아보더니 다시 진씨와 비 이낭 모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예전에 소 황후와 사이가 좋았었지. 그 딸을 내가 어찌 몰라보겠어. 궁을 떠날 때 이런저런 일을 겪고 그런 신분으로 돌아와 다시 만날 때까지…….”
매씨는 말을 하다 말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 백야는 다시 멍해졌다. 주 백야는 놀라는 한편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진짜 공주였다니… 어쩐지 그토록 아름답고 기품이 남다르더라니…….
“그때 적장공주가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사실은 죽지 않았었군요. 그래서 제가… 만나게 되었고요! 그런데 도성에 돌아왔으면서도 왜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어머니도 어째서 제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고요?”
주 백야가 따지듯 묻자 매씨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말을 하면 뭐가 달라진다고? 네가 뭐라도 할 수 있었겠더냐?”
주 백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선제는 양왕이 도성에 돌아오기 전 태자를 세웠다. 그건 양왕에게 여지를 주지 않겠단 뜻을 분명히 밝힌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양왕의 친누나를 맞이했다는 것은… 알고 모르고를 떠나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됐다.”
매씨는 무서운 눈빛으로 식구들을 둘러봤다.
“이제 셋째는 황제고, 그 생모는 운하공주니 너희들도 제대로 대접해라.”
“그럼요, 당연하지요.”
주 백야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데… 운 이낭… 아니, 공주의 신분도 회복되었고 셋째도 즉위해야 하니 우리도 공주의 신분을 정실부인으로 높여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
진씨가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저 천한 놈이 황제가 되었다 해도 여전히 서자이다! 낙운 그 천박한 것이 제아무리 공주라 해도 비천한 첩일 뿐이다! 그런데 정실로 신분을 높여 주겠다고?
‘그렇다면 저 잡종이 적자가 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