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1
방 안은 어두웠고, 깨어난 상관운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칠흑 같은 암흑이었다.
상관운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여기는 어디지? 난 왜 여기에 있지? 깊은 잠에 빠졌었지만, 그녀는 잠들기 전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자신은 부드럽고 편안한 침상 위에 누워 있고 양왕이 옆에서 자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런 거지! 설마 들킨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상관운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군가 부르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했다가 자신이 조앵기가 아니라는 것을 들킬까 봐 걱정되었다. 들키면 황제를 기만하는 중죄로 벌을 피하지 못하리라.
잠시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의 모습이 제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문 하나에 창도 하나뿐인 굉장히 간소한 방이었다. 한데 아주 높은 곳에 자리한 그 창은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상관운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집에도 이런 방이 있었다! 바로 잘못을 저지른 여인들을 가두는 방, ‘암실’이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곳에 오게 되었단 말인가? 설마… 고원이 마수를 드러낸 걸까?
상관운은 침상에 앉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쩌지? 이렇게, 이렇게 폐위되는 건가? 안 돼, 그럴 순 없어! 나도 고원의 꼬임에 넘어간 것뿐이지 함께 모의한 게 아니라고! 게다가 이 모든 일에서 나 역시 장기짝에 불과한걸!’
상관운은 스스로를 세뇌하듯 같은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그래, 나는 피해자다! 아무것도 모른다! 공모자라곤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상관운은 양왕의 분노와 질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수백 가지의 방안을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날이 밝아 왔다.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암실을 환히 밝혔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상관운은 고개를 들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낯선 마마가 환관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마마는 어두운 얼굴로 성지를 꺼내 들어 낭독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의 뜻을 전한다. 상관운은 노왕 측비와 남몰래 공모해 황제를 기만하였으니 삭발해 비구니가 되어야 하며, 녹취암으로 출가하여 평생 하산할 수 없다! 승은공 상관씨는 작위와 관직을 내놓고 평생 도성에 돌아올 수 없다.”
상관운은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져 침상에서 뛰어 내려왔다.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 자기가 노왕 측비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는 말입니까? 데려가라!”
되묻는 마마의 눈에 짙은 조롱이 비쳤다. 뒤에 있던 환관 둘이 앞으로 나와 끌어내려 하자 상관운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놔라! 폐하를 뵈어야겠다! 폐하를 뵙겠다! 본궁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고원과 결탁했다니,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저 폐하께서 나를 산에 데리고 가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폐하?”
마마가 정색했다.
“경엽제 말입니까? 경엽제는 벌써 붕어하셨습니다! 노왕과 노왕 측비가 꾸민 모략으로 밝혀졌으며, 전 진서왕이 새 황제로 즉위하셨습니다.”
“뭐라고?”
상관운은 몸에 힘이 풀리고 하늘이 노래졌다. 황제가 죽어? 주운환이 새 황제가 되었다고?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아니… 어떻게 그런……!”
“끌어내라!”
마마가 말했다.
“안 된다! 안 돼! 놔라. 놓으란 말이다. 뭐 하는 짓이냐?”
“뭐 하는 짓이냐니? 귀가 안 들립니까? 머리를 밀어 비구니로 만들려는 겁니다. 그게 선황제께서 남기신 마지막 은혜입니다.”
“은혜?”
상관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혜’라는 두 글자가 몹시 우스웠다.
“하하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마마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환관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끌어내라!”
“물러서라!”
상관운이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머리에서 잠簪을 뽑아 들고 자신의 목에 들이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죽어 버리겠다!”
마마와 환관들이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성지는 상관운을 비구니로 만들라는 것이지 그녀를 죽이라는 게 아니었다. 죽더라도 자신들의 면전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 그 죄를 자신들에게 물으면 어쩐다는 말인가?
“엽연채를 불러 줘! 만나게 해 달라고!”
감정이 격해진 상관운의 눈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제 엽연채가 황후겠지? 그래, 그녀라면 분명 황후가 되었을 것이다.
상관운은 정말이지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 녹취암에 가면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올 희망조차 없을 것이다. 녹취암은 총애를 받지 못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한 비빈들이 가는 곳이었다. 들어가는 사람은 있어도 거기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
마마는 이를 악물었다. 엽연채는 이제 아무나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황후였다! 하지만 더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됐으므로 일단은 혜연에게 알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상관운에게 욕을 몇 마디 더 하고는 방을 나갔다.
마마가 혜연에게 알리자, 혜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엽연채에게 갔다.
침상에 앉아 엽연채를 기다리는 상관운은 한시도 잠을 목에서 떼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저녁까지 기다렸다. 치욕과 분노로 가득했던 상관운의 얼굴은 점차 차갑게 평정을 찾았고 눈빛은 가라앉았다.
해시亥時(저녁 9시~11시) 무렵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혜연이 앞장서고 그 뒤에 엽연채가 서 있었다.
“저희 마님이 오셨으니 들고 있는 잠을 버리십시오.”
혜연이 차갑게 이르자 상관운은 하는 수 없이 잠을 던졌다. 혜연은 다가가 잠을 줍고 그녀의 몸을 뒤졌다. 그런 다음에야 엽연채가 들어올 수 있게 한편으로 비켜섰다.
엽연채는 담담하게 상관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하세요.”
“난…….”
상관운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왜 비구니가 되어야 하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랐다고요! 난 그저 폐하가 큰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에요. 폐하가 직접 나를 데리고 산으로 가신 거라고요. 범인은 고원이에요. 대체 뭣 때문에 그 사람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는 말이에요?”
그녀가 눈물을 쏟아 내는 모습에 엽연채의 검은 눈썹이 꿈틀했다.
“우리 속 시원히 털어놓고 이야기해 봐요. 피차간에 다 알고 있잖아요? 고작 거짓말을 하려고 날 부른 거라면 이만 가겠어요.”
“연채!”
엽연채가 돌아서는데, 마음이 급해진 상관운이 그녀를 홱 붙잡았다.
“내가 뭘 잘못했죠? 나도 그저 부군의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부군의 총애를 받고 싶은 게 잘못은 아니죠. 하지만 방법이 틀렸어요! 속여서는 안 됐어요. 요를 다치게 하고 수많은 아이들을 해치려 해서는 더더욱 안 됐고요.”
상관운은 이를 윽물고 도리질했다.
“그래요, 맞아. 내가 잠시 정신이 흐려져 잘못된 방법을 택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니면 어떤 방법이 있었겠어요? 궁에 들어온 후로 총애는커녕 일말의 관심조차도 받지 못했어요! 심지어 합궁조차 못 했다고요.
내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졌고, 도움을 청해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당신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잖아요! 내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그 사람 앞에서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았죠!”
엽연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재미있군요. 내가 당신의 부모도 아니고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나요? 궁에서의 앞날을 스스로 꾸려 나가야지, 그걸 왜 나에게 미루는 거죠?
난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보살이 아니에요! 하루 종일 시답지 않은 일에 참견하면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지 않다고요! 나도 내 생활이 있는 바쁜 사람이에요.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을 볼 때마다 아픈 내 아이를 버려두고 구하러 갈 수 없어요!
그리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모두 도왔어요! 그 사람이 그런 병이 들었는데 내가 이야기한다고 듣겠어요?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사람을 해쳐 놓고 지금 내 탓을 하는 건가요?”
상관운은 그대로 얼어붙어 손을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너무 힘들었어요. 짙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것만 같고 아무 길이 보이지 않았다고요! 고원의 말은 한 줄기 빛처럼 나에게 희망을 줬어요. 만약 내가 응하지 않았더라면 그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었을 거예요!
난 그 사람의 부인이에요… 어째서 나를 그렇게 대했던 거죠? 왜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냐고요!”
“당신이 계후였으니까요!”
엽연채의 차가운 일갈에 상관운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뜻이에요? 그래요, 난 계후예요! 하지만 계후도 사람이에요. 당신이 정후라고 계후를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요. 아직까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선황제와 혼인하기 전부터 당신은 조앵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잖아요. 하니 당신이 정실부인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지요. 그자가 조앵기를 마음에 품고 있으니 억울하고 고달픈 생활을 할 거라고 미리 예상했었어야죠. 혼인 후에 갈 곳 없이 불쌍한 척하며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고요.”
엽연채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상관운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죠. 하나 난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랐다고요. 그 사람에게 정실부인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양왕비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나요? 양왕이 왕비를 아끼지 않았다는 걸 누가 몰랐나요?
양왕비는 양왕 때문에 떨어져 죽었어요. 양왕의 마음에 양왕비가 없다는 건 온 세상이 알고 있었으니 나도 혼인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속이고 나도 속였어요. 그러니 내가 그런 계후의 억울함을 당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날 속인 거니까요!”
상관운의 하소연은 말이 끝나갈 즈음에는 날카로운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엽연채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며 하나씩 받아칠 뿐이었다.
“몰랐다고요? 양왕이 양왕비를 좋아하는 걸 몰랐다고요? 아니, 알고 있었어요! 몰랐다면 어떻게 나를 궁으로 불러들여 왕비의 유언을 꾸며 내라고 했겠어요? 양왕의 마음속에 양왕비가 자리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그런 거지요! 입만 열면 양왕이 왜 자신을 버려두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다만 내 입으로 말하기를 기다린 것 아니던가요.
양왕이 당신을 구해 준 후 늘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양왕을 사모해 왔다고 했죠? 그리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서 그의 행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는 말인가요? 양왕이 얼마나 양왕비를 사랑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양왕과 혼인하고 누굴 원망한다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