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4화
동쪽에서 아침 해가 솟아올라 도성의 대문이 천천히 열리는 시각. 금위군 부대가 준마를 타고 징을 요란하게 치며 대명가를 지나 골목골목을 질주했다. 도성의 백성들은 징 소리에 잠을 깨 성루로 모여들었다.
어젯밤 내내 노왕을 황제로 옹립하는 일을 상의하고 이제 좀 쉬려던 유 재상과 대신들은 시종이 전해 온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위군이 성루에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모두 급히 옷을 갖춰 입고 성문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백성들이 물 샐 틈 없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성문 아래에는 금위군과 경위영이 서 있었고 성루 위에는 위엄 있는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금린위 통령 방언동, 경위영 부통령 하배, 그리고 태부 주 선생이었다. 세 사람은 초췌하고 차가운 얼굴이었다.
용 무늬의 황금색 성지를 들고 있던 언동이 성지를 펼치고 침착하게 읽기 시작했다.
“천명을 받들어 황제의 성지를 전한다. 짐이 붕어하게 된다면 이 성지를 발표하라. 작년 사월 열하루, 양왕비 조앵기가 성루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나고 짐은 몹시 후회했다. 밤낮으로 그리워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도사와 승려, 금린위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 방법을 찾아 보았지만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유월 하순 짐이 와병 중일 때, 진서왕 세자의 목숨으로 왕비의 혼을 인도하여 아이들 백 명을 환혼충에게 제물로 바치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고 노왕의 측비 고원이 알려 주었다. 짐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었고, 제사 당일인 어제 사월 열하루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노왕과 그 측비가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꾸민 모략이었다! 하지만 짐은 이미 그 함정에 빠졌으니, 진서왕이 구출하러 오고 있지만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
지금 이 성지를 낭독하고 있다는 것은 짐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리라. 짐은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하지 못해 군왕이라 할 수 없다. 짐은 이 자리에서 온 세상에 그 죄를 고한다!
선황제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간신의 손을 빌려 충성스러운 소씨 가문을 멸문했다. 그리고 폐태자 모정건은 색욕에 눈이 멀어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세력을 다지기 위해 풍씨 가문 아들을 시켜 응성에서 진서왕을 살해하려 하였다.
충심이 깊은 풍씨 가문에서 이를 따르지 않자 사악한 계략이 드러날까 걱정한 폐태자는 풍씨 가문의 충신들을 살해했다. 나중에는 아버지인 황제를 시해하고 황위를 빼앗으려 했다.
그리고 짐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을 모해하였다! 노왕 모정업은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백성들의 생명도 불사하였다. 용왕 모정영은 몰래 노왕을 도왔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모씨 가문 아들들은 성군이 될 자질이 없다.
다행히 우리 대제에도 복이 있다. 바로 운하 적장공주와 주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주운환이 그 복이다. 그는 장원 급제자이자 하늘이 내려 준 신이다. 그는 사해를 평정하고 비적들을 토벌했으며 메뚜기 떼도 소탕했다. 주운환은 문무를 겸비하여 못 하는 것이 없다.
이제 짐은 진서군왕 주운환에게 황위를 선양한다! 백성들이 태평성대에서 평안하게 지내기를 기원한다! 이상!”
성지를 발표하자 성루 아래에 있던 백성들과 관리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아이들을 잡아간 것이 정말 황제의 짓이었다니! 게다가 양왕비를 위한 것이었다니!
게다가 이 계획을 짜고 황제를 끌어들인 배후가 노왕이라니! 지난 며칠 동안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백성들을 살뜰히 보살피던 게 모두 연기였단 말인가!
황제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황위를 진서왕 주운환에게 양위했다는 것이다.
백성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진서왕이 즉위한다고? 어떻게 그런…….”
“안 될 게 뭐 있어! 당연히 진서왕이 황제가 되어야지!”
“모씨들은 전부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다들 황제의 성지를 들었잖아. 선황제와 폐태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까발려진 거야. 그리고 황제도 자기가 한 나쁜 짓들을 인정했잖아. 노왕도 그렇고 용왕도 마찬가지고,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네!”
“그래, 맞아! 모씨는 이미 뿌리까지 썩었는데 어떻게 황족이라고 할 수 있겠어.”
황제는 성지에서 이미 죄를 인정하고 모씨 가문에는 희망이 없다고 밝혔고, 백성들도 그간의 상황을 지켜봐 왔기에 이에 이내 수긍했다.
단 성루 아래에 있던 유 재상과 여지, 오봉 등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그들은 모두 사고방식이 케케묵은 사람들인지라 양왕이 내려오면 당연히 노왕이 올라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노왕이 죄를 지어 황제가 될 수 없다면 용왕이 황위에 올라야 했다! 그런데 그마저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모씨 황족 중에서 혈연이 제일 가까운 사람을 찾아 대통을 이으면 됐다! 그게 관례였다! 그런데 황제는 그 맥마저 끊어 버리기 위해 성지에서 선황제와 폐태자의 추잡한 치부들을 남김없이 밝혔다. 모씨 황족을 옹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일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게다가 언동이 금린위와 금위군을 이끌고 직접 성지를 발표했고, 하배는 경위영 군사들을 이끌고 왔다. 지금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자신들 문신들이 말해 봤자 단번에 묵살될 것이었다.
“또한!”
성루 위의 언동이 다른 성지를 하나 더 꺼냈다.
“황위를 찬탈하려 모략을 꾸민 노왕 모정업은 온 식솔을 참수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노왕을 도운 용왕에게도 독주를 내린다. 대내총관 기해는 노왕에게 협조하였으니 금일 오시에 시장에서 사지 거열형에 처한다.
황후 상관운은 비록 내막은 몰랐으나 남몰래 노왕 측비와 결탁하여 황제를 기만하였으니 삭발해 비구니가 되어 녹취암으로 출가하고 평생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승은공 상관씨는 작위와 관직을 박탈하며 영원히 도성으로 돌아올 수 없다.”
첫 번째 성지는 자신의 죄를 밝히고 황위를 선양하는 성지였고, 두 번째는 벌을 내리는 성지였다.
* * *
도성은 소란스러웠지만 태항산은 슬픔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유 재상과 언동 등이 태항산에 도착해 산을 오르는 길에 금위군과 경위영 군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그 한쪽에 모여 울고 있었다.
유 재상 일행이 산 정상에 도착하니 높다란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제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주운환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몸에 잔뜩 묻은 피는 햇빛을 받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나 그 피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양왕은 주운환의 다리 위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진 그의 머리칼에도 피가 묻어 한 움큼씩 엉겨 붙어 있었다. 이렇듯 꼴은 말이 아니고 얼굴은 창백했지만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한때 도성 제일가는 미남이었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것이 유 재상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본 광경이었다. 황제가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될 줄은, 그 누구도,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었다.
엽연채는 저만치 떨어져 서서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앵기, 저 사람은 정말 널 사랑했어. 안타깝게도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랐던 거야……. 너도 봤지?’
* * *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아침을 지나 정오가 되고, 다시 천천히 해가 떨어져 날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주운환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언서와 언동, 주 선생이 주운환에게 다가왔다.
언동의 두 눈은 붉게 부어올랐고 목소리도 갈라져 있었다.
“날이 더우니, 어서… 좋은 모습으로 보내 드리십시오.”
말을 끝낸 입에서 결국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서둘러 안장하지 않으면 시체가 부패할 것이었다.
주운환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환을 보는 언동과 언서의 심경이 복잡했다. 이번 일은 주운환을 탓할 수 없었지만 결국 양왕은 주운환 때문에 죽은 것이니 그가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형제는 이성을 놓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있었다.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전하가 황위를 원하지 않는 것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분이 남긴 것이니 부디 받으십시오. 전하는 그분의 외조카이니 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가 아니라면 누구의 손에 들어간다고 해도 싫어하실 겁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니까요.”
언서의 말에 주운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금위군들이 관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주운환은 직접 양왕을 관에 넣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편히 쉬십시오. 꼭 왕비 마마를 만나실 겁니다.”
대제의 스물두 번째 천자이자 마지막 황제. 후대 사람들은 그를 경엽제景燁帝라고 불렀고, 연호는 그를 따라 경엽이 되었다.
경엽 원년 사월 열하루, 황제가 붕어하였다.
대제의 적장공주와 주정의 아들 주운환이 황위를 이어받아 개국하였으니 국호는 양梁, 사람들은 대양이라고 불렀으며 연호는 소무昭武로 정했다.
사월 열여드레, 경엽제의 출상이 있었다. 소무제가 아들을 대신하여 깃발을 들고 대제 황릉으로 들어갔다.
양왕비 조앵기는 순명황후純明皇后로 추서하여 경엽제와 합장하였다.
경엽제를 안장한 후 주운환이 정식으로 즉위했다.
즉위식은 오월 스무날에 거행하기로 했다.
* * *
즉위식 날, 새 황제는 정실부인 엽연채를 황후로 책봉하고 적장자 주요를 태자로 책봉했다.
이날 온 도성에는 붉은 비단이 깔렸다. 화려하게 장식한 금란전에는 손님들이 가득했고 축하하는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금홍색의 봉관 하피 차림인 엽연채가 주운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대전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함께 걸으며 양왕의 유언을 떠올렸다.
“즉위하는 날… 황후와 대혼을 올려 줘.”
‘앵기에게 성대한 혼례를 올려 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 찬란하게 빛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정식으로 신랑 신부가 되고 싶었을 거야. …왜냐하면 나도 그렇거든.’
성대한 혼례가 시작되었다.
“이 세상이 인연을 맺어 준 당신을 배필로 맞이합니다…….”
-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