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2화
제단 위에는 돌로 만든 침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분홍 옷을 입은 여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상관운이었다.
그녀는 늘 화려하게 차려입었었지만 지금은 머리를 푼 채 잔잔한 무늬의 흰색 상의와 벚꽃 무늬가 수놓아진 분홍 치마를 입고 있었다. 달빛을 오롯이 받는 그녀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고아하고 청초했다. 평안하고 조용한 모습이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양왕은 상관운 곁에 서서 찬찬히 그녀를 바라봤다.
고원이 살짝 웃으며 운을 뗐다.
“폐하, 한 시진만 지나면 자시입니다! 자시가 되면 주요를 제물로 삼아 환혼충에게 그 피를 먹여 황후 마마의 몸에 넣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사내아이들과 여자아이들에게 일제히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이 왕비 마마의 혼백을 강하게 할 것입니다. 내일 깨어나면 황후 마마는 양왕비 마마가 되어 있을 겁니다.”
양왕의 마음이 떨려 왔다. 이제 곧 돌아온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주요를 보았다. 아기는 그의 품에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보살폈더니 주요도 어느 정도 그에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후로 시간은 너무나 더디게 흘러갔다. 해시가 겨우 반 정도 지났을 무렵, 산 아래에서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언동이 굳은 얼굴로 달려왔다.
“폐하, 진서왕이 병마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양왕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얼마나 데리고 왔느냐? 친위대만 왔다면 수가 많지 않다. 우리 쪽은 만 명이 아니더냐?”
족히 4만 명이 되는 금위군과 친위대를 데리고 나온 차였다. 다만 주운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이들을 모두 분산시켜 위장해 놓은 곳들을 지키게 했다.
“경위영 4만 명을 데리고 나와 2만 명을 저희가 위장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신호를 보내지 않은 것을 보니 진서왕이 다른 곳으로 유인한 것 같습니다.”
양왕의 곁은 만 명이 지키고 있었다. 7천은 산 아래에서 사방을 지키고 있었고 3천은 산속에서 지키고 있었다. 주운환이 데려온 사람 중 천 명은 친위대였고, 나머지는 모두 경위영 병사들이었다.
경위영 병사들은 주운환을 믿고 따랐다. 하지만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제를 보면 공격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도리어 주운환을 반역자로 보고 공격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주운환은 분명 이 경위영 병사들로 산 아래 있던 양왕의 사람들을 유인하고 천 명의 친위대만 이끌고 오고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분명 경위영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었다.
“하하. 대단하군, 주운환!”
양왕이 음산한 눈빛을 번뜩였다.
“폐하, 지금 바로 피하시지요!”
언동의 얼굴이 창백했다. 하지만 굳은 얼굴의 고원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폐하, 양왕비 마마의 영혼이 이미 환혼충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만약 이레 이내에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환혼충이 스스로 터져 죽어 버리고 왕비 마마의 혼백도 날아가 사라질 것입니다.”
“닥치시오!”
노한 언동이 들고 있던 검을 고원에게 휘둘렀다.
“앗……!”
고원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비틀대며 뒷걸음질 쳤다.
양왕이 그의 검을 잡았다.
“언동! 명령을 거역하려면 꺼져 버리거라! 짐에게는 너 같은 호위 무사가 필요 없다!”
언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눈은 붉어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았다.
“폐하… 소인은…….”
언동은 양왕과 주운환이 대립하는 것을 보고 싶지도, 그런 결말을 원하지도 않았다. 하나 양왕의 태도가 너무나 확고하니…….
“가거라! 네가 나를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곳을 지켜라. 죽어도 진서왕의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양왕이 소리쳤다.
언동은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병사들의 고함 소리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언동이 빽빽한 숲 가까이로 가자 별안간 은색 빛이 번쩍였다. 주운환이 날카로운 검을 들고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언동은 몸을 돌려 공격을 피했지만 주운환은 이미 그를 지나쳐 양왕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진서왕……!”
언동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를 추격하기 전에 또 다른 날카로운 검이 날아왔다. 이번엔 여한이었다.
지척에서 싸우고 사람을 죽이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그들의 금위군과 주운환의 친위대가 엉겨 붙어 싸우고 있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언동 형제가 금위군을 용맹한 군사로 키워 냈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운환을 따라 응성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에 어디 비할 수 있겠나!
주운환의 병사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니 한 명이 세 명을 상대하는 정도는 가뿐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양쪽 모두 사람 수는 비등비등했다.
언동은 자기들이 수세에 몰리는 것을 보고 방어선이 뚫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러면 황제가 마주하게 될 것은 주운환 하나가 아닐 것이다.
언동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안에 있는 것이 황제 폐하든 진서왕이든… 그래, 그리고 왕비도! 방금 그건 분명 진서왕비겠지!”
방금 주운환과 함께 뛰어 들어간 것은 분명 엽연채였다. 언동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여양,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장치를 작동해 주위에 묻어 놓은 석궁이 발사되게 할 것이다. 그러면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누굴 속이는 거냐! 그런 장치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안의 아이들을 보지 못했나! 이 석궁은 그 아이들 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아이들의 목숨을 한시에 빼앗으려고 만든 장치다.”
여한, 여양과 장씨는 그 이야기를 듣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짜리 꼬마들이다! 백 명은 족히 되는 아이들을 모두 죽인다니!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망할 놈!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아!”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여양이 소리치며 언동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저리 꺼져!”
언동은 그런 그를 떨쳐 내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아니면 저들 모두 다 죽을 것이다.”
여한 형제와 장씨 등은 분해서 치를 떨었다. 금위군은 자신들의 적수가 되지 않으니 금방이라도 밀고 들어가 모두 구해 낼 수 있었는데, 웬 석궁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단순한 거짓 위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달려들었다가 위협을 느낀 양왕 쪽에서 정말 그 장치를 작동시키면 어떡하나?
금위군과 주운환의 친위대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대치했다.
한편, 멀지 않은 공터에 제단이 있었다. 주운환과 엽연채가 서 있었고 양왕도 근처에 서 있었다. 양왕이 안고 있는 아기는 그에게 기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가……!”
아기를 보자 엽연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운환은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손에 쥐고 있는 검도 떨리는 것 같았다.
“폐하… 요를 돌려주십시오.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 풀어 주십시오! 그럼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양왕이 차가운 눈으로 주운환을 보았다. 양왕의 눈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지만 지금 그의 검은 눈동자는 끝이 없는 심연처럼 새까맸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아느냐?”
“양왕비 마마를 위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폐하, 왕비 마마는 돌아가셨습니다! 이미 저승으로 가셨기에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습니다!”
주운환의 외침에 양왕은 도리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왕비는 아직 여기 있어…….”
“더 이상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한순간 양왕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더니 주운환을 노려봤다.
“죽은 자가 엽연채가 아니니 네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앵기를 다시 살려 낸다 한들 어쩌신다는 말입니까?”
엽연채였다. 그녀는 일그러진 양왕의 얼굴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건 앵기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앵기는 밖으로 나가 놀고 싶어 했고,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습니다! 매일 왕부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황궁은 더 싫어했지요. 후궁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을 싫어했고 온갖 규율과 법도에 얽매이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폐하에게 구속당하는 것은 더욱더 싫어했습니다.
앵기가 원한 것은 자유였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영혼은 자유로워졌으니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진정으로 앵기를 사랑한다면 놔주십시오. 고승에게 청해 앵기의 영혼을 제도하고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요사스러운 주술을 쓰고 저리 많은 목숨을 바쳐 가며 억지로 그녀를 데려오려 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이걸 보면 미쳐 버릴 겁니다!”
“하하, 싫다! 왕비는 내 거다! 살아서도 내 것이고, 죽어서도 내 것이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내가 살아서는 매일 내 옆에 있어야 하고, 내가 죽는다면 나와 함께 영면永眠에 들어야 한다. 왕비가 같이 앉아 있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고, 왕비가 곁에 누워 있지 않으면 잠도 잘 수가 없으니까!”
“아니……!”
엽연채는 이렇게 강한 분노를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양왕은 미쳤다! 광인! 꼬일 대로 꼬인 사람이었다!
“대체 어디서 알게 된 사술邪術입니까? 폐하는 속으신 것입니다!”
주운환의 이 말에 양왕의 눈이 시뻘게졌다.
“사술이든 아니든 네가 상관할 것 없다! 속았든 아니든 그것도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모두 해 볼 것이다! 무슨 방법을 쓰든 상관없다!
만일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하면 된다! 다음에 안 되면 세 번째, 네 번째가 있다……! 내가 살아만 있으면 모든 방법을 써서 언젠가… 언젠가는……!”
어째서인지 말을 하는 양왕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조각나 버린 것 같았다.
언젠가, 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건만 어째서인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하.”
양왕이 갑자기 품에서 주요를 떼 내더니 왼손으로 아이의 옷깃을 쥐고 잡아 들었다.
주변의 소란에도 지쳐 곤히 자던 주요가 이 거친 동작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 큰 눈을 뜨고 작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