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1화
“폐하, 식사하시지요.”
양왕이 흘깃 쳐다보며 짧게 대꾸했다.
“고원과 먼저 들게.”
“네.”
대답을 마친 상관운은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팔선상 가득히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상관운이 자리에 앉자 고원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와 그녀 곁에 앉아 탕을 한 그릇 떠서 내밀었다.
상관운이 탕을 받아 들었다.
“미약이 들어 있는 탕입니다.”
상관운이 흠칫 놀라자 고원이 살짝 웃었다.
“이걸 드시면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겁니다.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가 되면 주요와 저 아이들을 제물로 삼아 그 주술을 시작할 겁니다. 마마는 다시 눈을 뜰 때면 ‘조앵기’가 되어 있으실 겁니다! 이날을 위해 수도 없이 연습했으니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상관운은 전율이 몰려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예요.”
지난 반년 동안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습했다. 심지어 깨어난 그 순간의 첫 눈빛을 연습하기 위해서 저 미약도 이미 여러 번 마셨다. 그럼에도 탕을 들고 있는 상관운의 손이 떨렸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주술이 끝나고 나면 폐하는 마마께서 양왕비가 되었다고 믿을 테니까요. 우선 배를 좀 채우십시오!”
상관운은 억지로 음식을 좀 먹은 후에 탕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곧 정신이 흐릿해지며 그녀는 탁자에 엎드렸다.
고원이 상관운을 찔러 보니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고원은 방에서 나와 양왕에게 갔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는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양왕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밤 치를 주술 의식을 생각하자 기대감과 긴장감이 함께 밀려왔다.
“저녁에 깨는 일은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 정도의 양이면 내일 아침까지 잘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그분이 돌아오실 것입니다.”
양왕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조앵기를 생각하자 갑자기 막막해지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앵기가 곧 돌아올 것이다. 깨어나서 날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나 양왕은 곧 그 후를 상상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그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조금 커서 왕부에서 생활한 후로는 자신의 서재 쪽 화원의 시냇가에 숨곤 했다. 그곳에서 예전에는 이야기책을 보다가 나중에는 거북이를 씻겼다. 거북이가 죽고 나서는 거북의 등딱지를 씻었다.
‘거북이 한 마리, 등딱지 같은 게 뭐가 재미있다고?’
늘 이리 비웃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 마음속에는 늘 자신이 있었다.
하나 결국엔… 그녀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폐하.”
고원이 양왕을 다시 불렀다.
“편히 쉬시면서 정신을 가다듬으십시오. 그래야 저녁에 의식을 치를 정력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
양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요를 안고 일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 * *
도성.
도성은 혼란에 휩싸였다. 곳곳에서 황제가 아이들을 잡아다가 주술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거나 피를 뽑아 요사스러운 술법을 연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 재상과 사람들은 법화사를 이 잡듯 뒤졌지만 황제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요명대사에게 물어도 황제는 법화사에 온 후 계속 감은전에만 있었다 할 뿐이었다. 황제가 감은전으로 들어간 후로는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고 스님들은 감은전으로 출입하지 못했다고. 황제가 절에서는 불공을 드릴 준비만 하면 된다고 명했다는 거였다.
음식은 주지 스님인 그가 직접 가져다줬지만 매번 기해가 나와 음식을 받고 다시 내놓아 황제의 그림자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도성에 돌아온 유 재상과 여지는 유씨 가문의 서재에 모여 의논했다.
“말할 것도 없소. 이 일은 폐하가 벌인 것이오.”
여지가 확언했다.
“십중팔구 그렇겠지요.”
유 재상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지는 이미 증손자가 사라진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 정신을 차렸다. 물론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자손이 많은 집안이라 하나가 사라졌다 해도 큰일은 아니었기에 이미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였다.
그가 분노하는 것은 황제 때문이었다!
“폐하는 제멋대로이고 자기만 생각할 뿐, 백성을 아끼지도 않고 덕도 없소. 내 이미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 선황제 폐하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시오들?”
여지가 좌중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유 재상이 한숨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양왕은 정이 없고 교활하며 내키는 대로 사는 데다 풍류를 밝혀서 언젠가 여인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오직 태자만이 어질고 능력이 있는 황제의 재목이라 보셨고요.”
“선황제 폐하가 현명한 제왕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말의 반은 맞았소! 양왕은 성정이 괴팍하고 법도도 도리도 모르는 것이 척 봐도 좋은 군주가 아니오. 폐태자도 추악한 짓을 끊임없이 벌이긴 했지만 그나마 폐태자는 성군인 척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소. 적어도 즉위하고 나면 체면이 무서워 폭군은 되지 못할 사람이었단 말이요.
하지만 양왕은 다르오. 양왕은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나 명성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니 조만간 폭군이 되고 말 것이오! 지금도 보시오! 결국 조금씩 그 마수를 드러내고 있지 않소!”
유 재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
“조금이 아니라 모두 드러내 보인 셈이오. 진서왕의 아이를 잡아가고 온 도성 백성들을 분노하게 했소. 우리까지도… 그것참!”
감히 귀족들의 아이들까지 건드리다니! 지금 잡아간 것은 아이들이지만, 나중에는 대신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하나씩 죽여 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 일은 수습할 수 없소. 황위조차 장담할 수 없소! 진서왕이 황제와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친아들의 죽음까지는 참지 못할 것이오. 만약 황제가 황위에서 내려온다면 누가 즉위해야 하겠소이까? 노왕? 용왕?”
여지가 굳은 얼굴로 본심을 꺼냈다.
“노왕 전하겠지요. 노왕 전하는 장자인 데다 언제나 고지식하고 법도를 지키는 분 아니십니까. 크게 뛰어난 부분은 없어도 오점이나 못된 습관도 없으시니, 노왕 전하가 즉위하신다면 중용의 길을 걸으실 거요. 안으로는 문신들이 받치고 밖으로는 진서왕이 나라의 문을 지키면 대제가 백 년은 평안할 것이오.”
유 재상의 말에 여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노왕 전하가 이 사건을 맡고 있기도 하고 나중에 황제의 일이 밝혀지면 백성들이 분노하고 진서왕과도 반목할 테니, 그때 노왕을 추대하면 될 것 같습니다.”
* * *
진씨 가문.
진무와 진지항이 서재에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나리, 도련님, 장 대인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모셔라.”
곧 장찬이 급히 들어와 진무와 인사를 나눴다.
“어쨌거나 우리는 친척이니 진 형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러 왔습니다. 지금… 보아하니 곧 세상이 뒤바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진무가 탄식했다.
“모를 일입니다.”
진지항이 이리 말하자 장찬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폐하가 하신 일이 분명하네. 도성 백성들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할 거고.”
진지항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일단은 운환이 어떻게 해결할지 지켜보시지요! 아이들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운환은 폐하를 몹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저 군신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의 정을 나눈 사이입니다. 운환이 예전에 저에게 직접 말했었습니다. 자신에게 폐하는 스승이자 친구이며, 심지어 아버지이기도 하다고요. 한마디로 폐하는 운환의 가족입니다!
하니 그 아이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리고 철단이도 무사하다면 분명 평화롭게 마무리될 겁니다. 폐하를 향한 도성 백성들의 분노도… 아이들만 살아서 돌아온다면 무마할 수 있습니다. 폐하가 벌이신 일이 아니라 폐하는 그저 잠시 사라진 것이었다고… 꾸며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리자는 것이지요. 운환이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니었다면 벌써 이 일을 천하에 알렸을 텐데, 지금껏 무엇도 밝히지 않았잖습니까.”
장찬과 진무는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진무가 입을 열었다.
“지항의 생각이 맞는 것 같네. 어쨌거나 진서왕을 지켜보도록 하지. 진서왕이 하는 대로 따르면 될 것이야.”
* * *
정국백부.
주 백야는 안절부절못하며 집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주요가 사라지자 주운환은 사람들을 데리고 도성을 나섰다. 황제를 찾으러 간 것인가? 황제는 정말 그저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밖에 떠도는 소문처럼 주요와 아이들을 납치해 간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운환이가 황제에 맞서 대립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결과는? 아들이 죽는 걸까? 그러면 주씨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 함께 순장되는 걸까?
주 백야는 점점 조급해졌으나 진씨는 몰래 흐뭇해했다. 그 천한 것이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진씨도 걱정은 됐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황제가 자신이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것을 인정할 리가 없잖은가? 주운환이 정말 친아들 때문에 황제에게 맞섰고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황제가 돌아와서 그걸 사실대로 발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마도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잡아간 것이고, 주운환이 실종된 황제를 구하러 왔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겠지!’
체면을 위해서 주씨 가문에 보상을 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진씨의 입매에 음험한 미소가 걸렸다.
그 시각, 엽씨 가문.
엽학문도 주 백야와 같은 생각이었다. 당장 짐을 싸 들고 도성을 빠져나가고 싶은 심정으로 속으로 백 번은 더 엽연채 욕을 했다! 정말 애물단지가 따로 없다니까!
한편, 양왕부.
양왕이 즉위한 후 양왕부는 적막에 휩싸였고 한 줄기의 빛도 내리비치지 않았다. 주 선생은 고요한 평정소축에 꿇어앉아 양왕의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의 세월을 더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주 선생의 눈에서 고통스러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 * *
날은 이미 완전히 깜깜해져 태항산에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제단의 네 모서리에서 불이 활활 타올라 산꼭대기의 건물을 환히 밝혔다.
백 명의 아이들 모두 꽁꽁 묶인 채 입에는 재갈을 물고 제단을 빙 둘러앉아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멀지 않은 빽빽한 숲속에는 수백 개의 석궁이 그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손잡이를 당기면 석궁이 바로 난사되어 이 아이들은 벌집이 될 것이었다.
아이들은 위기가 다가온 것을 느꼈는지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막아 놔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