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04화 (804/858)

제804화

고원은 미간을 한껏 째푸리며 한마디만 했다.

“폐하, 저를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왕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짐은 네가 짐을 농락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정말 그네를 살려 낼 수 있는 거냔 말이다.”

고원이 차갑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말을 하시든 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희 남강에서도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나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 진통이 시작돼 태어나는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양왕비 마마는 정말 천운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부활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양왕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폐하, 양왕비 마마의 꿈을 꾸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양왕은 낯빛이 변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니 고원이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왕비 마마의 혼이 계속 무덤에 있기 때문입니다. 왕비 마마가 폐하의 꿈에 들어가지 않는데 폐하가 어찌 마마의 꿈을 꾸시겠습니까? 하지만 어제 환혼충이 돌아온 왕비 마마의 혼을 받았습니다.”

고원은 소매에서 조그만 청화 병을 꺼내어 양왕에게 다가섰다.

“이건 환혼충의 피입니다. 밤에 주무시기 전에 한번 드셔 보십시오.”

고원은 그 말만 남기고 궁을 나갔다.

저녁이 되자 밤마다 잠을 못 이루던 양왕은 결국 병 안에 든 것을 삼켰다. 그랬더니 정말로 그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그녀를 결국 만날 수 있었다.

꿈에서 조앵기를 다시 만난 양왕은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 되는 일인 거다! 앵기가 정말 돌아오지 않았더냐!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정말로 앵기를 살려 낼 수 있다.’

이튿날 아침, 양왕은 다시 고원을 궁으로 불렀다. 고원은 흥분한 그의 얼굴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

“폐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왕이 굳은 얼굴로 탁자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살려 내라! 어떤 희생이 필요하더라도 모두 감수하겠다.”

고원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왕비 마마의 탄신일인 구월 초열흘에 태어난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을 쉰 명씩 준비해 주십시오. 반드시 도성이나 그 부근의 아이들이어야 하고 신분은 높을수록 좋습니다.”

양왕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반드시 도성에서?”

“그렇습니다.”

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도성, 즉 황제가 있는 곳의 기운이 가장 좋아 다른 곳의 아이들보다 순수합니다. 물론 신분이 귀한 집 아이들일수록 팔자가 좋으니 신분도 높으면 높을수록 좋습니다. 성공할 확률이 커지지요! 그리고 주요가 있어야 합니다. 또 필요한 것들이…….”

고원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읊었다.

“주술은 내년 사월 열하루, 왕비 마마가 세상을 떠난 그날 거행할 것입니다.”

양왕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 자네 말대로 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잊으셨습니까, 폐하? 몸이 필요합니다! 왕비 마마의 혼이 부활해서 들어갈 몸 말입니다.”

“아무나 상관없나?”

“건강하고 팔자가 좋은 사람이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문제를 줄이려면 후궁에서 하나 고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서두르셔야 제가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보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후궁?

“황후는 어떤가?”

양왕의 이 말에 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과연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황후 마마는 봉황의 명을 타고났으니 폐하와 제일 잘 어울립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알겠습니다.”

고원이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양왕을 빤히 쳐다봤다.

“제가 폐하의 일을 도와 드렸으니, 폐하도 소인의 청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원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을 것이란 건 양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해라. 원하는 게 뭐냐?”

“황제 폐하도 벌써 짐작하고 계실 것입니다. 2년 전의 전쟁으로 남강의 국고가 텅 비었습니다. 그러니 남강이 해마다 바치는 조공의 7할을 줄이도록 윤허해 주셨으면 합니다!”

양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그리고…….”

고원이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저는 더 이상 측비에 만족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아들이 훨씬 노왕 세자에 어울리는데 폐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목적을 달성한 고원이 웃으며 인사했다.

양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상관운의 사주팔자를 고원에게 넘겨주고 그녀가 필요하다 한 모든 것을 준비했다.

* * *

얼마 후, 고원은 상관운을 궁 밖으로 불러내 비밀스러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상관운은 고원이 황제를 꼬드기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몹시 흥분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바로 환혼충을 쓴다 하면 될 것을 아이들 이야기는 뭐 하러 꺼냈어요, 그리고 주요까지! 주운환… 그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게다가 아이들이 그렇게 많으면 일이 커지니 수습하기 어려울까 걱정되는군요.”

“하하, 이 일로 제 복수를 하는 겁니다!”

고원이 차갑게 웃었다.

“주운환이 아니었으면 제가 지금 이런 꼴로 지낼 리가 있습니까! 주운환만 아니면 저는 여전히 고국에서 고귀한 공주로 지내고 있었을 겁니다! 벌써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도 했겠지요!

또, 제가 주요만 필요하다고 했으면 황제는 분명 저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의식이 성대할수록 황제의 믿음도 커질 것입니다. 게다가 황후 마마도 주운환 부부가 밉지 않습니까.”

마지막 말에 상관운은 가볍게 신음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모험을 감수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아기를 잃고 고통받을 엽연채를 생각하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 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고 어떻게 황제가 나를 선택하게 한 거죠?”

“제가 황후 마마를 직접 언급하면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고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애초에 너무 당연한 결과입니다. 적절한 몸을 찾는다 치면 황후 마마가 제일 편하겠지요! 폐하가 황후 마마는 팽개쳐 두고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낯선 여인을 궁에 들여 총애한다면 남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테니 지금의 부인인 황후 마마가 제격이겠지요.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은데 누가 감히 의문을 품겠습니까? 저라고 해도 황후 마마를 선택했을 겁니다.”

상관운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미소가 그 얼굴에 머무르는 건 아주 잠시였다.

“폐하는 벌써 제 요구에 응하셨습니다. 황후 마마도 연기를 잘하십시오! 시간을 벌었으니 그동안 조앵기를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생각지 않은 요구에 상관운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조앵기가 되어야만 그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니.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황제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

“열심히 흉내 내십시오. 말이나 행동, 표정, 말하는 습관까지도 열심히 따라 하셔야 합니다.”

“한데… 내가 아무리 똑같이 따라 한다고 해도 결국… 빈틈이 있을 텐데.”

염려스러워하는 상관운을 고원이 다독였다.

“안심하십시오. 완벽하진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제가 폐하께 조앵기는 몸을 빌려 다시 살아난 것이니 본래의 자신에 대해 얼마간은 잊어버릴 거라고, 또 기억이 황후 마마의 기억과 섞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릴 겁니다. 그러니 약간의 빈틈은 가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낫기 위해 갖은 애를 씁니다. 그때 가서 폐하는 마마가 부활한 조앵기라고 믿고 싶어 안달 나 계실 겁니다. 마마께서 처음에만 조앵기를 잘 따라 하시면 나중에 어느 정도 변한대도 폐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알겠네!”

이후, 양왕이 노력하는 동안 상관운도 열심이었다.

양왕은 상관운의 몸과 신분으로 조앵기를 부활시키겠다고 결정한 후, 상관운에게 조금씩 친절해졌다. 그래야 잘해 주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시기가 무르익자 조앵기에게 의지가 되고 처가가 될 상관 가문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칠월 만수절 이후엔 사람을 시켜 아이들을 잡아들였고, 상관수에게 수사를 맡겼다. 하지만 누구에게 맡겼더라도 범인은 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단서들은 양왕에게 제일 먼저 보고되었고, 그가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상관수는 국구이고 이제 양왕도 상관운을 아끼고 있으니 어사들도 감히 상관수를 탄핵하지 못했다. 양왕은 주운환에게는 다른 일을 맡겨 도성 밖으로 내보내 이 사건이 결국 유야무야되게 했다.

해가 지나고 양왕은 다시 아이들을 잡았다. 일찌감치 착착 준비한 대로 진행해 무능한 노왕에게 수사를 맡겼고 그가 인신매매꾼을 잡아들이게 함으로써 이 사건도 마무리했다.

이제는 주요까지 손에 넣었다. 그런데 아직도 아이들이 몇 명 모자랐다.

‘고원은 신분이 높을수록 성공 확률은 커진다 했다. 하니…….’

두 대의 마차가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앞의 마차에는 양왕과 상관운, 주요가 있었고 뒤따르는 마차에는 고원이 앉아 있었다.

* * *

주요가 사라진 일로 도성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궁 안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이다.

진서왕 세자에게 변이 생겼다! 폐태자 잔당이 복수를 위해 세자를 납치해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고 시체를 우물로 던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케 했다는 것이다.

그 탓에 진서왕비는 미치기 직전이라고 한다. 흉수가 세자의 얼굴을 짓이겨 놓아 신원을 알기 어렵게 했더니 진서왕비는 죽어도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고! 부인을 사랑하는 진서왕은 하는 수 없이 진서왕비 말대로 포졸들과 경위영 병사들을 풀어 이미 죽은 아이를 찾고 있단다.

백성들은 모여서 수군거렸고 정이 많은 사람들은 울기도 했다.

진서왕은 나라를 평화롭게 지켜 준 난세의 영웅인데 그의 유일한 아들이 뜻밖의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아주 참혹하게.

아이를 계속 찾는 것은 그저 진서왕비가 미쳐서 발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태황태후도 그녀가 가여워 금위군을 시켜 궁을 수색했다지만… 벌써 죽었는데 어디서 살아 있는 아기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온씨는 찢어지는 가슴을 붙들고 진서왕부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엽씨 가문 식구들도, 장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찾아왔다.

엽연채가 잘나가는 모습을 언제나 고깝게 여기던 손씨와 엽승신, 엽이채와 장박원, 맹씨 세 명까지 위문객 사이에 껴 있었다.

‘그 불길한 아기가 죽었다니. 쯧쯧.’

이 다섯 사람은 엽연채가 미쳐 버린 그 모습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 일로 정말 미쳐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그러기만을 손 모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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