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2화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그리고 감히 태황태후 마마께 분풀이하지 마십시오!”
장 마마가 굳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영지가 수안궁의 궁녀라지만 이등 궁녀라서 한 번도 마마의 신변 궁녀였던 적이 없습니다! 수안궁의 일등 궁녀가 열두 명이고 이등 궁녀가 서른 명입니다. 그 밑에 잡일을 하는 어린 궁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마마께서 어찌 모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실 수 있겠습니까?
열두 명의 일등 궁녀도 다 살피지 못하시는데 이등 궁녀야 오죽하겠습니까! 왕비 마마도 주인이시니 잘 아실 겁니다. 설마하니 모든 하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왕비 마마께서 작년에 일등 여종 하나를 내쫓고 이등 여종도 하나 팔아 버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왕비 마마가 모르는 빈틈을 타서 못된 짓을 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태황태후 마마는 무조건 다 하실 수 있다고 우기며 감히 마마께 큰소리를 치시는 겁니까! 이건 하극상입니다!”
태황태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그녀를 다독였다.
“됐다, 됐어. 애가 타서 저러는 거야.”
그러고는 엽연채를 마주 보았다.
“나도 어미이니 왕비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알 수 있네. 어휴, 적어도 아기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안 그런가?”
엽연채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숙였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의심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태황태후와도 깊이 관련된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궁에 들어올 때마다 태황태후를 만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니, 오늘 궁에 들어오지 않아 태황태후가 부르러 온 것까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부자연스러운 일투성이였다.
먼저 자신을 붙들고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상관운을 잘 타일러 달라는 지극히 평범한 얘기를 늘어놨다. 전에 그렇게 시간이 많을 때에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더니, 왜 하필이면 꼭 오늘 이 시간이었을까? 그렇게 모든 사람을 물리고 자신만 궁전 안에 붙들어 놓고 주요는 밖으로 나가게 했다.
주요를 데리고 나가 앵무새를 본다더니, 공교롭게도 그 때문에 혜연이 옷을 갈아입을 일이 생겼다. 혜연이 자리를 비운 그다음엔 유모의 신발도 더럽혀졌다.
바로 그때, 분명 영지는 자신이 보겠다며 아기를 안았을 것이다. 유모는 매달 수안궁에 왔으니 이곳의 궁인들과도 낯을 익힌 후였다. 게다가 경비가 삼엄한 궁 안에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했을 테니 경계심을 풀고 아기를 영지에게 맡긴 것이다.
이 연극은 자신이 오늘 궁에 들어올 때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매달 궁에 들어올 때부터, 늘 수안궁으로 불려갈 때 이미 시작돼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엽연채는 생각할수록 무서워, 이 무서운 일에 휘말리고 만 주요를 떠올리며 떨었다.
‘아가, 요야. 지금 대체 어디에 있니?’
* * *
주운환은 궁을 떠나 바로 관아의 포졸들을 동원했고, 여한을 도성 밖으로 보내 경위영 3천을 데리고 온 도성을 수색하게 했다.
그 시각,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꼬불꼬불한 작은 길. 주변에는 나무가 빽빽하고 봄 내음이 물씬 풍겼다.
검은 천막을 씌운 마차 두 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주위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이삼십 명이 따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어느 지방의 지주나 향신이 봄놀이를 하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마차 안에는 법화사에서 선황제를 위해 불경을 읽고 기도를 올려야 할 양왕과 상관운이 앉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양왕이 희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아기는 양왕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상관운이 창의 휘장을 살며시 걷자 나비가 꽃밭을 날아다니고 초록이 무성한 봄날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덩달아 상쾌하고 즐거워졌다. 잠시 주변을 휘둘러본 상관운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폐하,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양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태항산太行山.”
“거기 가서 뭘 하나요?”
상관운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양왕은 역시 짧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가 보면 알아.”
“네. 신첩은 폐하와 함께 간다면 어딜 가도 즐거워요. 참, 그… 자소는 왜 이리 데려왔나요?”
양왕이 안고 있는 아기는 바로 주요였다.
양왕은 고개를 숙이고 아기의 조그만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하하, 재미있잖아.”
“네.”
상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지만 그 눈이 차갑게 반짝였다.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겠지? 그 천한 여자를 위해 나를 속이다니! 정말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상관운은 속으로 냉소했다. 자신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궁에 들어온 후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해 계속 합궁을 못 하고 있었다! 심지어 온 도성의 웃음거리까지 되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절망스러워 엽연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냉대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조차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기다려라!
하지만 기다릴수록 절망만이 커졌다! 인내 끝에 돌아온 것은 미쳐 버린 황제였으니까!
갑자기 도사와 스님들을 잔뜩 불러들인 것이 악령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조앵기를 다시 살려 내기 위해서라니! 한술 더 떠 금린위를 만든 것마저도 사람을 풀어 조앵기를 부활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소식을 듣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끊임없이 그를 비웃고 또 비웃는데 어느새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계속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사람이 다치면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현듯 머릿속에 조앵기와 닮은 그때의 여종이 떠올랐다. 엄청난 적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조앵기가 정말 살아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조앵기가 살아날 수 없다 해도 양왕은 분명 조앵기와 닮은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쪽에서 먼저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앉아 죽음만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결국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할 테니까!
그 순간 상관운의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노왕의 측비, 고원! 남만의 공주였다!
그녀가 온 남쪽 땅은 몹시 기이한 땅이어서 별별 독이 다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것은 독충이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보통의 독충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만 정말로 독이 강한 경우에는 사람의 마음마저 미혹한다고 한다.
그리고 듣자 하니 그쪽 지역의 여인들은 모두 사랑에 집착하는 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정이 없단다. 하여 사랑하는 남자를 곁에 붙들어 두기 위해 많은 여인들이 독충을 써 한평생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저를 떠나지 않도록 한다고.
평범한 여인들도 그런 비방을 안다면 고원은……? 그녀는 그냥 남만 사람이 아니라 공주이다! 보통 신분이 아니었다.
상관운은 고원을 궁으로 불러들여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린 후에 말을 꺼냈다.
“측비가 우리 대제로 시집온 지 벌써 2년이 되어 가는데 지내는 건 적응이 됐나 모르겠네요.”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마마.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적응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적응이 안 돼도 해야죠!”
아래에 앉은 고원이 당돌하게 대답해 오니 상관운은 작게 신음하며 말을 이었다.
“노왕 전하가 측비를 많이 총애하신다 들었는데, 과연 그곳의 공주답게 주술이 대단하네요.”
고원이 피식 웃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주술이라니요.”
상관운이 차를 마셨다.
“그쪽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것은 독충과 관련된 주술이라고 하던데…….”
“하하하.”
고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주술이니 독충이니 하는 것은 모두 소문일 뿐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 남강南疆은 습하고 더운 지역이다 보니 독이 있는 벌레가 아주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벌레들과 생활하다 보니 쫓는 방법을 좀 터득했을 뿐입니다.
한데 정말로 그저 독이 있는 벌레일 뿐입니다. 뱀, 쥐, 벌레, 독전갈, 독거미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것들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 제가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저희가 그런 독을 가진 벌레들을 쫓을 줄 아니 바깥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와전돼 묘한 소문이 난 것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현혹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 영원히 늙지 않는다, 시체에 혼을 넣어 살릴 수 있다, 불로장생한다… 정말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하나 정말 남강에 이런 주술이 있다면 해마다 조공으로 전답을 바치겠습니까?”
상관운은 굳어진 얼굴로 웃었다.
“측비…….”
“마마, 떠보실 필요 없습니다.”
고원의 아름다운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마마께서 무얼 하고 싶으신 건지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시니 독충을 써서 폐하가 오로지 마마만 보게 만들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상관운의 낯빛이 변했다.
“본궁은…….”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터놓고 말씀하시지요.”
상관운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결국 본심을 꺼냈다.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단 말인가요?”
고원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상관운이 흠칫 놀랐다.
“무슨 방법이죠?”
“속이는 겁니다!”
“속인다고?”
상관운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뭘 속인다는 거죠? 누구를요?”
고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폐하입니다.”
“폐하를? 왜 황제를 속여야 하죠? 무엇을 속인단 말이에요?”
“저도 소문을 좀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양왕비를 되살리려 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조앵기의 이야기가 나오자 상관운은 속이 뒤틀려 얼굴도 따라 일그러졌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더더욱! 그 일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조앵기보다도 못해 보일 것 아닌가!
하지만 고원은 자신을 도와줄 유일한 동아줄로 보였다. 상관운은 주저 끝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고원이 조롱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미쳤군요!”
“하지만 측비가 방금 도와줄 수 있다고 했죠!”
“마마는 방금까지도 제가 주술을 할 수 있다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남강이 굉장히 신비로운 곳이라고 생각하시지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곳!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고원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고원은 말을 하며 일어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제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