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0화
“마님!”
혜연이 백지장 같은 얼굴로 뛰어 들어왔고 뒤에서 녹색 옷을 입은 궁녀가 따라오고 있었다.
“무엄하다!”
태황태후 뒤에 서 있던 궁녀가 소리쳤다.
“감히 태황태후 마마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다니.”
“무슨 일이냐?”
태황태후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소인……!”
혜연이 털썩 무릎을 꿇고 엽연채를 바라봤다.
“세자, 세자 전하가 보이지 않습니다!”
엽연채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냐? 아기가 보이지 않는다니? 무슨 일이야?”
“뭐?”
태황태후도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무슨 소리냐, 여기는 수안궁이다. 복도에서 앵무새를 본다 하지 않았더냐? 수춘, 네가 말해 봐라!”
수춘이라는 궁녀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방금 혜연 소저와 유모가 세자 전하를 안고 나가자 소인과 영지가 따라 나갔습니다. 저희는 저 앞에 있는 회랑에서 앵무새를 보고 있었는데,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혜연 소저 쪽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혜연 소저의 옷이 더러워져서 소인은 소저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는데…….
저희가 돌아오니… 유모와 영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인은 밖으로 구경을 간 줄 알았습니다…….”
거의 울기 직전인 혜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가 나가 보니 유모는 허둥지둥하고 있고 세자 전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모 말이 저와 수춘 소저가 자리를 비운 후 앵무새가 유모의 신발을 더럽혔다고 합니다. 유모가 영지라는 궁녀에게 세자 전하를 잠시 맡기고 손수건으로 신발을 닦았는데, 일어나 보니 궁녀와 세자 저하가 모두 사라졌다는 겁니다!
다 함께 급히 주변을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저는 마마께 말씀을 드리려고 이리 왔고, 유모는 아직 찾고 있습니다.”
“뭐라고? 네 말은 영지가 아기를 데려갔다는 말이냐?”
태황태후가 놀라 소리치더니 엽연채를 돌아보았다.
“영지는 내 밑의 이등 궁녀라네. 아기를 데리고 놀려고 수안궁을 나간 건지도 몰라. 아기가 노는 걸 좋아하고 보는 것마다 달라고 하니, 영지가 같이 놀다 잊어버린 게지.”
엽연채는 오히려 냉정해져서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마마, 어쨌든 지금 당장 아이를 찾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영지 이 천한 것이 크나큰 실례를 했구나! 장 마마, 어서 사람을 풀어 영지 이 몹쓸 것을 찾아서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장 마마가 서둘러 나갔다.
태황태후는 다시 엽연채를 돌아봤다.
“안심하게. 여기는 황궁이야! 잃어버릴 리가 있겠는가! 영지가 왕비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돌아오면 내가 호되게 혼을 내겠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다급하게 혜연을 불렀다.
“혜연아, 조회가 끝났는지 확인해 보거라.”
날 못 믿어서 주운환까지 찾는단 말인가? 태황태후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내색지 않고 다른 궁녀를 혜연에게 붙였다.
“그래, 그래. 운아, 네가 함께 대전에 가 보거라.”
태황태후의 뒤에 서 있던 궁녀가 앞으로 나서자 혜연은 황급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안심하게! 자, 계속 요리나 골라 보지.”
태황태후가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으나 엽연채가 어디 태평하게 음식이나 고를 기분이겠는가.
“아기가 분명 울고 있을 겁니다. 저도 밖에 가서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태황태후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으나 곧 자리를 떨치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럼 나와 함께 나가세. 나도 어머니니 얼마나 애가 타는지 안다네.”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함께 궁전을 나왔고 궁녀와 환관들이 뒤를 따랐다.
문을 나서자 유모가 울면서 뛰어와 엽연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세자 전하를 잘 살피지 않았습니다……. 놀라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전하가 보이시질 않습니다.”
“길을 몰라 그렇지, 이미 스무 명 넘게 사람을 풀었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환관과 금위군에게도 알렸는데 그 아이가 어딜 가겠어? 본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겠는가? 걱정 말게. 금방 소식이 있을 거야.”
태황태후는 엽연채와 유모를 안심시켰다.
“말씀 감사합니다, 마마. 저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엽연채가 말했다.
“왕비 마마…….”
유모가 울면서 엽연채를 바라봤으나 엽연채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가서 찾아라! 아기를 찾지 못하면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수안궁을 나가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궁녀들이 보였다. 엽연채는 빠르게 걷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보초를 서고 있는 금위군이 보여 그쪽으로 뛰어갔다.
“수안궁의 궁녀가 아기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까?”
금위군이 오른쪽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영지 말씀이시죠? 강보를 안고 지나가는 것을 확실히 봤습니다.”
그들은 이 주변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었다. 하니 수안궁 궁녀인 영지는 서로 자주 본 사이였다. 그래서 영지가 아기를 데리고 지나다녀도 달리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금위군이 말한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다른 금위군들에게 행방을 물어봤지만, 여전히 영지를 찾을 수 없었다. 조급해 타는 듯했던 마음이 서서히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만약 영지가 단순히 아기를 데리고 놀러 갔다면 이렇게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일부러 몸을 숨긴 걸까? 왜, 무엇 때문에?’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났다.
“부인!”
당황한 엽연채가 고개를 드니 주운환이 검은 관복을 입고 급히 다가오고 있었고 그 뒤에 혜연이 바짝 붙어 오고 있었다.
“부군!”
그를 보자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기가…….”
“압니다, 침착해요. 이미 수풍에게 알렸습니다. 금위군을 보내 황궁의 모든 문을 굳게 닫고 있으니 분명 찾을 거예요.”
주운환은 상황을 알리며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수풍은 가장 늦게 양왕을 따른 부하였으나 충심과 공훈이 커 지금은 금위군 부통령을 맡고 있었다. 언동이 법화사까지 황제의 호위를 맡았기에 궁 안의 일은 수풍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네.”
엽연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으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전하, 왕비 마마! 영지를 찾았습니다!”
멀리서 한 궁녀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엽연채가 흥분해서 물었다.
“우리 아기는?”
“그게,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태후 마마께서 사람을 잔뜩 내보내시고 금위군도 출동했습니다. 마마가 수안궁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갑자기 금위군 하나가 와서 벌써 영지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반월궁 쪽에서요.
태후 마마께서 얼른 왕비께 알리라고 소인을 보내셨습니다. 태후 마마도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사람을 찾았는데 왜 데려오질 않는 것이냐?”
심상치 않은 전개에 엽연채의 두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소인…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그저 마마의 분부대로 왕비께 알려 드린 겁니다.”
“갑시다!”
주운환이 굳은 얼굴로 엽연채를 데리고 반월궁으로 급히 향했다.
두 부부가 헐레벌떡 뛰어 도착했더니, 마침 태황태후도 장 마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가다 그들을 보고 돌아섰다.
“자네들 왔군.”
엽연채와 주운환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우리 아이는요?”
엽연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묻자 태황태후가 난색을 표하더니 말없이 정원으로 들어갔고, 부부도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저 멀리 금위군 몇몇이 서 있었는데, 그 옆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그 붉은빛 위에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엽연채는 안색이 변해 서둘러 뛰어갔다. 금위군 무리의 우두머리가 주운환을 보고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전하, 전하가 찾으시는 궁녀를 찾았습니다. 발각당하자 머리로 기둥을 들이받았는데 아직 목숨은 붙어 있습니다.”
“내 아기는!”
엽연채가 달려들어 핏물 속에 쓰러져 있는 영지의 멱살을 있는 힘껏 잡아 쥐었다.
영지는 힘없이 눈을 떠 엽연채를 보고는 다시 주운환을 한번 쳐다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고통스럽지? 드디어… 조금이나마 태자 전하를 위로해 드렸다, 하하하……!”
“무슨 뜻이냐? 내 아이는 어디 있어?”
엽연채가 다그쳤다.
“하하…….”
다시 한번 냉소한 영지의 고개가 풀썩 꺾이더니 더 이상은 미동도 없었다.
이 순간, 주변의 금위군과 궁녀들은 속사정을 대략 눈치챘다. 분명 폐태자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했다. 폐태자가 반역을 꾸밀 때 진서왕에게 의지해 왔는데 진서왕은 폐태자를 보기 좋게 속여 넘겼다. 그 결과, 폐태자는 반역에 실패해 죽음을 맞이했다.
영지가 진서왕 세자를 납치한 까닭은 폐태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그녀도 폐태자의 부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수풍이 다가와 영지의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죽었습니다.”
“아니야, 아니다!”
엽연채가 날카롭게 소리치더니 영지의 옷깃을 붙잡았다.
“우리 아기는 어디 있어? 어디? 어서 말해!”
“태후 마마, 왕비 마마……!”
갑자기 멀리서 놀란 비명이 들렸다.
“여기 피가, 그리고 대나무 호랑이 장난감이…….”
엽연채는 눈앞이 다 아찔했지만 기어코 정신을 붙잡고 그쪽으로 향했다. 궁녀가 조금 떨어진 우물가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피가 낭자하고 바닥에 대나무 호랑이와 피 묻은 돌이 흩어져 있었다.
엽연채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휘청대며 뛰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주운환이 우물 안을 살펴보았다. 붉게 물든 우물물. 주운환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자 전하……. 설마, 설마 우물에 던진… 그럴 리가!”
붉게 일렁이는 물결을 본 혜연은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켜라!”
주운환은 혜연을 밀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앗!”
금위군과 궁녀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부군! 부군!”
엽연채는 우물가에 꿇어앉은 채 목 놓아 울었다.
건져 낸다고 주요가 아직 살아 있을까? 온통 피바다인데 우물에 던져 넣기까지 했다면… 살 수 있을까?
엽연채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어쩌면… 저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태어났는데, 그렇게 조그맣고 허약했음에도 천천히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하니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 버릴 리 없다!
촤아악. 잠시 후 주운환의 흠뻑 젖은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수풍이 얼른 물을 긷는 밧줄을 던지고 주운환은 그 밧줄을 잡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