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9화
“부군.”
엽연채가 돌아서 주운환을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죽으면 당신도 이렇게 나를 잊을 거예요?”
주운환이 깜짝 놀랐다.
“쓸데없는 소리, 부인이 죽긴 왜 죽습니까!”
엽연채가 힘없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서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만약도 없어요!”
“예를 들면 말이에요, 세상일은 모두 변하는 거니까요.”
“예도 들지 마십시오!”
주운환이 번번이 선을 긋자 엽연채도 짜증이 났다.
“정말, 부군이랑 얘기 안 할래요!”
엽연채가 돌아서자 주운환은 냉큼 손목을 잡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안 돼요! 이런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주운환이 끝끝내 싫다 하니 엽연채도 살짝 한숨을 쉬며 그저 그에게 기댔다.
* * *
이튿날 아침 조정, 황제는 선황제의 기일인 사월 초나흘에 황후와 함께 법화사로 가 직접 선황제를 위해 일주일 동안 불경을 외우겠다고 공표했다.
사흘 전에 목욕재계를 해야 하니 사월 초하루에 길을 떠나기로 결정됐고, 대신들은 모두 입을 모아 황제의 효성을 칭송했다.
사월 초하루. 황제와 황후는 대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궁을 떠났다. 언동이 금위군 만 명, 하배가 경위영 3만 명을 데리고 도성을 떠나 법화사까지 황제를 호위했다.
정무는 유 재상과 주 선생에게 맡겼다.
사월의 봄 날씨는 아름다웠지만, 조정도 여러 가지로 바빴고 엽연채도 집에서 바쁘게 지내느라 풍광을 구경하러 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응성으로 떠나는 날이 확정된 것이다. 정양절이 지나고 오월 초이레에 출발하기로 했으니 빨리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이장 날짜는 사월 열여드레로 정했다.
그 전에 주요가 돌이 되니 돌잔치도 열어야 했다. 국상 때문에 만월연을 하지 못한 것도 아기에게 섭섭한 일이니, 엽연채는 이번 돌잔치는 꼭 제대로 치러 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경험이 없는 엽연채를 돕기 위해 이튿날 아침 온씨와 묘씨가 함께 진서왕부를 방문했다. 엽영교도 소식을 듣고 아기를 안고 구경하러 왔다.
운연거 서차간에 깔개를 깔아 놓고 어른들은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두 아기는 그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었다.
“준비해야 하는 게 경서하고 목검, 돈, 연지, 장난감…….”
온씨가 말했다.
“경서를 잡으면 앞으로 학자가 될 테고 목검은 장군, 주판을 잡으면 엄청난 재산을 가진 상인, 연지는… 풍류를 아는 한량이 되겠네.”
엽영교는 온씨의 말을 받아서 잇다 말고 갑자기 깔깔 웃었다. 엽연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했다.
“연지를 빼면 되지요.”
“안 되지.”
엽영교는 즉시 반대했다.
“그게 없으면 돌잡이라고 할 수 없어.”
“참, 염염이는 뭘 잡았어요?”
“붓을 잡았지, 우리 염염이는 앞으로 재주 많은 여자가 될 거야.”
“까르르! 엄마……!”
엽영교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염염이 비틀비틀 일어서서 엽영교를 향해 걸어왔다. 아기가 다가와 푹 안기자 엽영교는 휘청하면서 아기를 끌어안고 웃었다.
“아휴! 요 아기 돼지, 기운이 아주 장사로구나.”
엽연채는 염염과 주요는 겨우 보름 남짓 차이가 나는데 염염이 벌써 엄마 소리를 하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엽연채는 주요에게 다가가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살짝 손을 떼자 주요는 곧 엉덩방아를 찧더니 애처롭게 엽연채를 바라보며 옹알거렸다.
“우웅, 아아…….”
엽연채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울지 마, 애교 부려도 소용없어! 어서 엄마라고 해 봐! 자, 엄마!”
“맘…….”
“아니지. 봐 봐. 엄마, 엄, 마!”
엽연채가 가늘고 긴 검지를 들어 올리며 주요를 가르쳤다. 그러나 주요는 따라 하기는커녕 삐친 듯 조그만 입을 삐죽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제 호랑이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기 시작했다.
“세 달이나 일찍 태어났는데 열 달 다 채우고 태어난 아기랑 비교하면 안 되지. 그리고 돌까지 열흘은 남았잖아. 늦은 건 아니야.”
온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늦게 입을 떼는 아기들이 더 똑똑하다더라.”
엽영교도 이렇게 엽연채를 안심시켜 줬다.
“우우…….”
주요가 손에 든 호랑이 장난감을 던지고 엽연채의 품으로 기어 올라와 비비적거렸다. 엽연채는 그래도 탐탁지가 않아 아기의 조그만 코를 가볍게 잡았다.
“너 말이야! 이렇게 애교만 부릴 줄 알지. 이래서야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소월이 들어왔다.
“마님, 궁에서 첩자가 왔습니다.”
“궁에서 첩자가?”
엽연채가 고개를 돌렸다.
“가져오렴.”
소월이 주렴을 걷고 들어와 첩자를 엽연채에게 건네주었다. 엽연채는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궁? 누구야?”
엽영교가 물었다.
“태황태후 마마요. 매월 초이튿날이면 제가 부군과 함께 궁에 들어가서 폐하를 뵙고 태황태후 마마도 만나 뵈었거든요. 이번 달에는 폐하가 궁을 떠나 법화사로 가셔서 저희도 궁에 들어가지 않았더니 태황태후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부르시네요.”
“아.”
엽영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는 이 일을 엽영교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태황태후는 양왕의 친조모였지만 예전에는 폐태자와 정 황후를 더 아꼈다. 하여 지금 양왕과 태황태후의 사이는 나쁘진 않지만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사이였다.
“궁이 굉장히 적적하다고 들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으니 가 보지 그러니?”
묘씨가 이리 권하니 엽연채도 고개를 주억였다.
“가 보죠, 뭐. 내일은 할 일도 많고요.”
애초에 태황태후가 사람을 시켜서 불렀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나.
“어머니, 할머니, 여기 계세요. 점심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주방에 말씀하시고요. 저는 궁에 다녀올게요. 이따 부군과 같이 돌아올 테니 계셔요.”
엽연채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주운환은 지금 궁에서 조회에 참석하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 자신도 입궁했단 소식을 알리면 같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 그래. 우리가 너와 내외하겠니. 우리가 손님도 아니고 접대할 필요 없다.”
온씨가 웃으며 대꾸했다. 주운환은 진씨와 사이가 좋지 않아 온씨와 더 가까웠다. 하니 이곳은 사위 집이 아니라 딸 집이나 다름없는데 무엇을 사양하겠나?
“참, 아이도 데려가니? 우리가 봐 주마.”
엽연채는 얕은 한숨을 쉬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우리 철단이는 잘 때가 아니면 제가 조금만 보이지 않아도 울어서요.”
엽연채는 옷을 갈아입고 유모, 혜연과 함께 궁에 들어갔다.
일행은 가마로 갈아타고 바로 수안궁으로 향했다. 대전에 들어가자 귀티 나는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태황태후였다. 그녀는 엽연채를 보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유, 이제 왔구나.”
엽연채도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태황태후 마마를 뵈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보니 엽연채와 태황태후도 꽤 가까워졌다. 여든이 넘은 태황태후는 적적한 모양인지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아기는 특히 더 좋아했다.
“나는 늘 매달 초이틀만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은 오질 않지 뭐야.”
엽연채는 실망한 태황태후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궁을 나가 계시니 제가 들어오면 마마께서 쉬시는 데 방해될까 염려가 되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자네가 시간이 없나 했지.”
태황태후는 짐짓 성이 난 듯이 말하나 싶더니 이내 웃음을 흘렸다.
“하하, 좀 안아 보게 데려오게나.”
엽연채가 아기를 안고 바투 다가갔고 태황태후는 아기를 안고 어르면서 그녀와 한담을 나눴다.
이각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태황태후가 곤란한 듯 한탄했다.
“아휴! 폐하는 언제쯤이나 증손주를 안겨 줄지 모르겠네!”
엽연채는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실의 자손 문제는 감히 그녀가 입을 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내가 왕비에게만 긴히 할 말이 있네.”
이 말에 엽연채가 유모와 혜연을 돌아보니 주요는 유모 품에 안겨 앵앵거리며 한시도 조용하게 있질 않았다.
“세자 전하가 복도에 있는 앵무새를 제일 좋아하시니 모시고 구경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유모가 웃으며 말하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녀들까지 모두 나간 후에 엽연채가 입을 뗐다.
“마마께서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요?”
태황태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겠는가? 당연히 자손 문제이지.”
“마마, 제 무능함을 용서하십시오. 폐하의 자손 문제는 저도 도울 방도가 없습니다.”
“아니네.”
태황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 아이가 몇이나 있었네. 딱하게도 태어나질 못해서 그렇지. 그때는 왜 그랬는지 후궁들에게는 자손을 낳지 못하게 했었네. 이제 즉위도 했는데 전에는 황후와 사이도 나쁘고 후궁에도 걸음을 하지 않더군. 폐하의 성미가… 나도 감히 뭐라고 못 한다네.
이제야 겨우 황후와 사이도 좋아지고 황후를 총애하고 있어.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황후에게 아무 소식도 없으니 황후 몸이 안 좋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 그래 내가 많이 마음을 쓰고 애를 태우고 있지. 황제가 좀 더 후궁에 자주 가서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네.”
“아…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내가 얘기했는데도 듣지를 않아. 황후에게만 가고 다른 곳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지.”
태황태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왕비가 황후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네. 이번에 두 사람이 돌아오면 폐하가 다른 궁전에도 좀 갈 수 있도록 왕비가 황후에게 말 좀 잘해 주게.”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셨다. 상관운과 내가 사이가 좋다고? 하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자신들 사이는 자신들만 알 뿐이니. 찻잔을 내려놓은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성공한다는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됐네.”
태황태후는 안도하며 웃더니 식사를 권했다.
“참, 오늘은 봉의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니 나와 함께하도록 하지! 우리 궁에서 만드는 요리도 정말 맛있다네.”
“네.”
“뭐가 먹고 싶은지 다 말하게.”
태황태후가 뒤에 선 마마에게 눈짓을 했다.
“왕비가 고를 수 있게 요리책을 내오거라.”
뒤에 서 있던 마마가 나가더니 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엽연채가 살펴보고 있으니 태황태후가 계속 이 음식은 어떻고 저 요리는 어떤 맛이고, 짜고 싱겁고 하다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님! 마님!”
이때,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더니 쿵쾅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엽연채가 혜연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혜연은 예의범절을 잘 아는 아이로 이렇게 궁내에서 큰 소리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